느닷없지만 운명 같았던 첫 만남 , 서로를 탐색하며 친밀감을 쌓던 시간, 함께 살기로 결정했던 다짐.

얼핏 인간의 사랑과 연애와 결혼에 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건 저와 삼삼이의 이야기예요. 삼삼이는 제 발로 절 찾아왔어요. 저와 삼삼이는 한참 동안 각자의 생활을 유지하며 우정을 쌓아갔어요. 삼삼이와 함께 살기로 결심했을 때, 저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정서적 성장을 경험했어요. 길에서 집으로 생활의 공간이 바뀌었던 삼삼이만큼이나 저도 큰 변화를 겪었어요. 그전까진 제가 좀 엉망이었거든요. 자연이나 동물, 환경보호에 관해 생각하며 살려고 애쓰는 편이긴 했지만 삶의 동료로서 동물에 관해선 무관심했어요. 심지어 저는 동물과 함께 살 수 없을 거라고 스스로 단정 짓고 있었어요. 바보 같은 확신이었죠.

 

동물이 제 삶의 일부로 들어온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제가 아주 꼬맹이였을 때 시골의 고향 외양간에서 소를 키웠고, 영화 <워낭소리>만큼은 아니라도 할아버지가 소를 알뜰하게 챙기며 아끼는 모습을 보기도 했었지만, 그게 사람과 동물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으로 생각되진 않았어요. 전 기껏해야 명절 때 잠깐 고향에 가서 외양간에 있는 소를 ‘구경’하는 정도였으니까요. 할아버지 댁에서 외양간도 보고 닭을 키우는 닭장도 보았지만 개집을 본 적은 없었어요. 시골 풍경을 묘사할 때 흔히 등장하는, 줄에 묶인 채 종일 집을 지키는 개의 모습이 제 기억엔 없어요.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개를 묶어서 키우는 것에 미안함을 느껴 그랬던 건 아니었어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잠깐이라도 귀한 손주들이 집에 왔을 때 놀라거나 다칠까 봐 그랬다고 해요. 지금 생각하니 웃기는 이유네요.

 

Photo by Ryan Cheng on Unsplash

 

부모님은 삶의 정서적인 부분에 관해 지나치게 무심한 편이라 집에서 화분 하나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분들이 살아온 인생을 하찮거나 불행한 것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거칠고 메마른 삶이었단 걸 부정할 순 없을 것 같아요. 그땐 그런 시절이었다,라는 말은 똑같은 시대를 다르게 살았던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변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원망은 없지만 아쉬움은 있어요. 제 내면의 사막 같은 황량함과 대면하고 있으면, 그 척박함의 기원이 어디인지 보이거든요. 스무 살에 집을 떠나 외지로 나가면서 많은 것이 바뀌긴 했어요.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세상, 다른 사람들과 만나면서 영원히 메말라 있을 줄 알았던 마음의 황무지에 비가 내리고 물이 고이고 푸른 생명이 자라기 시작했거든요. 경제적 생존 말고도 문화적 풍요로움과 삶의 품위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유독 동물에 관해서만은 여전히 무심한 채였어요. 인권감수성이나 젠더감수성 같은 개념을 동물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면 저의 동물감수성은 풀 한 포기 없는 불모지 같았어요.

 

그렇게 죽어 있던 마음의 땅이 울창한 숲으로 살아난 건 온전히 삼삼이 덕분이에요. 그렇지만 그전에 비를 잔뜩 머금은 생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사건이 있었어요. 삼삼이보다 먼저 제 일상에 난입한 고양이가 있었거든요. 2013년 가을이었어요. 당시에 살았던 작은 빌라를 오가는 골목길, 차와 사람이 함께 다니는 좁은 이면도로에 어느날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어요. 골목엔 아마 여러 고양이들이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도 나타났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처음 마주치자마자 그 아이가 제 다리에 얼굴을 부비고 바닥에 발라당 누우며 친근함을 표시했기 때문이에요. 평소에 길에 고양이가 있는지 없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던 저에겐 마치 고양이가 세상에 처음 나타난 것 같았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개나 고양이를 만진다는 건 상상할 수 없고 근처에 오는 것도 무서워 하던 때였지만 미처 방어하거나 피할 새도 없이 녀석에게 접근을 허락하고 말았어요. 그 아이는 흔히 말하는 ‘개냥이’ 그 자체였어요. 얼마나 살갑게 구는지 처음의 어색함과 무서움은 금세 사라지고 곧 저도 녀석에게 손등을 내주고 녀석의 엉덩이를 쓰다듬는 정도가 되었어요. 딱히 이름을 지어주겠단 생각은 하지 못했고 그냥 울음소리를 따서 ‘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길에서도 마냥 편안했던 먕이

 

처음 시작하는 게 어려운 법이지 일단 발을 들이고 나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것들이 있어요. 술이나 담배, 도박, 마약…… 혹은 그에 준하는 중독성을 가진 것들이 있죠. 이를테면 고양이와 우정을 쌓는 일, 같은 것 말예요. 먕이와 친분이 조금 쌓였을 때 밥을 챙겨주려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런데 작은 빌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골목엔 밥그릇을 놓을 만한 자리가 마땅히 없어 보였어요. 할 수 없이 살고 있던 빌라의 옥상으로 가는 계단참에 물과 밥 그리고 혹시 몰라 잠자리로 삼을 수 있는 종이 박스를 놓아두었어요. 3층짜리 작은 빌라여서 옥상을 출입하는 사람이 없었고 마침 제가 3층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방해받을 일이 없었죠. 먕이는 작은 살림이 차려진 계단참까지 곧잘 올라와서는 밥을 먹고 갔어요. 가끔은 박스에 자리를 잡고 누워서 놀아달라고 기다리기도 했어요. 참 똑똑한 아이였던 것 같아요. TNR이 되어 있었는데 당시 저에겐 고양이의 암수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성별까지는 알지 못했어요.(사진으로 남은 모습을 보니 분명 암컷이었던 것 같긴 해요)

 

사진을 보니 제 기억보다 훨씬 작은 아이였네요

 

제 일상도 조금씩 변해갔어요. 처음엔 밥과 물만 챙겨주다 서로 시간이 맞으면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서 잠깐씩 놀아주는 정도였다가 나중엔 퇴근하고 집에 오면 아예 현관문을 열어 놓고 먕이가 언제 오려나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어요. 호기심 대마왕인 종족답게 먕이도 곧 제가 살던 집을 탐색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경계하는 듯했지만 이내 집 안까지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되었어요. 그렇게 집에서 함께 지내다가 (제가) 잘 때가 되면 다시 밖으로 내보내는 날이 한동안 계속되었어요. 먕이와 꽤 친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동물과 함께 산다는 건 생각지도 않던 때였거든요. 그 정도로 지내는 것만 해도 양쪽에 모두 충분하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거기서 한 발짝만 더 내딛어 보라고, 그러면 전혀 다른 세상과 만날 수 있다고 과거의 저에게 충고하고 싶지만 당시에는 그게 아마 최선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제 (반려)동물감수성이 그만큼밖에 안 되었던 터라 다른 관계를 상상하긴 어려웠을 거예요.

 

“닝겐, 내가 들어갈 준비는 되었는가?”

 

“집이란 게 편안하니, 좋구만”

 

먕이와의 어색한 동거는 꾸준히 지속되었어요. 그러다가 한 달 가량 긴 여행을 다녀올 일이 생겼어요. 먕이는 저를 만나기 전에도 길에서 잘 살아왔던 아이라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어요. 여행을 마치고 왔을 때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었고요. 먕이는 다시 부지런히 찾아왔고 저는 또 부지런히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어요. 밥을 주고 물을 주고 쉴 수 있는 보금자리를 제공했죠. 그런데 세상일이란 게 늘 예상한 대로만 흘러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어느날 갑자기 먕이가 사라져버렸어요. 더 이상 집으로 찾아오지도 않았고 골목에서도 모습을 볼 수가 없었어요. 합정동 골목의 작은 빌라 3층 계단엔 다시 적막함만 남았어요. 그땐 묘연이란 것도 몰랐고 고양이와 함께 산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슬픔에 가까울 만큼의 허전함을 느꼈어요. 일상에 공백이 생겨버린 기분이었어요.

 

먕이가 사라졌지만 3층 계단참에 있던 보금자리를 치우지는 않았어요.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몰라서 밥과 물을 늘 채워놓고 있었죠. 그렇게 빈 자리로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 때, 이번에도 역시나 어느날 갑자기, 새로운 녀석이 등장했어요. 그런데 먕이와는 모든 면에서 다른 녀석이었어요. 우선 생긴 게 무서웠어요. 얼굴에 선글라스 모양의 검은 무늬가 있어서 딱 보기에도 험상궂어 보였거든요. 게다가 경계가 심하고 공격적인 성격이어서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면 송곳니를 한껏 드러내고 하악, 하며 겁을 주거나 펀치를 날리곤 했어요. 그렇다고 사람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화들짝 놀라 차 밑으로 숨거나 담 너머 사라져버릴 정도는 아니었어요. 적당한 거리라면 사람과 함께 있는 걸 무서워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였어요.

 

딱 봐도 무서운 녀석…

 

아무리 사람을 경계하고 곁을 내주지 않는다고 해도 길 위를 떠도는 불안한 존재임을 숨길 수는 없었어요. 잔뜩 긴장하고 움츠린 채로 3층 계단참까지 올라와 밥을 먹기 시작했어요. 함께 있던 박스에 잠깐이나마 몸을 뉘였다 갔는지 아니면 갈증가 허기만 채우고 곧장 떠나버렸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아무튼 부지런히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녀석은 몸은 흰색 털의 바다 위에 검은색과 갈색의 반점이 섬처럼 떠 있기도 하고 대륙의 국경처럼 이어져 있기도 한 삼색 고양이였어요. 그래서 ‘삼식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땐 삼색 고양이가 수컷일 확률이 3천 분의 1 혹은 3만 분의 1이란 걸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얼굴이 무섭고 성격도 까칠한 녀석이 당연히 수컷이라 생각했거든요.

 

처음에는 삼식이, 그러니까 삼삼이를 원망하기도 했어요. 마치 삼삼이가 먕이를 내쫓고 자리를 차지한 것 같아 보였거든요. 먕이가 사라진 시기와 삼삼이가 등장한 시기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먕이의 살가움과 삼삼이의 포악함(?)을 비교해 봤을 때 충분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삼삼이는 굴러온 돌 같았어요. 비록 박힌 돌을 직접 밀쳐내진 않았지만 비어 있던 자리가 마치 제 것인양 얌체처럼 눌러앉았으니까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삼삼이가 등장한 방식이 어쩌면 제가 살아왔던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굴러온 돌, 김굴돌 선생님

 

제 삶을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증상의 이름을 ‘굴러온 돌 증후군’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아요. 굴러온 돌이란 초대받지 않은 존재를 의미해요. 동시에 의외의 존재 혹은 낯선 존재이기도 하죠. 그렇게 굴러온 돌처럼 초대받지 않은 낯선 자리를 찾아 끝없이 움직여야만 하는 병이 있다면 저는 완치 불가능한 말기 증세의 환자가 아닐까 싶어요. 올가 토가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에는 ‘재발성 해독 증후군’이란 증상에 관한 설명이 나와요. “어떤 이미지를 향해 끊임없이 돌아가려는 의식의 작용, 나아가 그러한 이미지에 대한 강박적 추구”, “ 통계 수치에 따라 일정하게 반복되는 패턴, 예를 들어 모두가 흡족한 표정으로 화목한 미소를 지으며 뭔가를 축하하는 풍경은 내게 아무런 흥미도 일으키지 못한다. 내 감수성은 기형학(畸形學)이나 괴짜를 향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죠. 저 역시 언제나 불안함과 위태로움에 더 끌렸던 것 같아요. ‘방랑자 신드롬’ 혹은 ‘굴러온 돌 증후군’.

 

불안하게 굴러들어 왔을지언정 뿌리를 내리고 박힌 돌이 되는 과정은 삼삼이도 먕이와 똑같았어요. 3층에서 옥상으로 가는 계단참에 와서 밥을 먹고 가는 생활이 익숙해지자 살짝 열어놓은 현관문을 비집고 들어와 집 안을 탐색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곧 제집인 양 편하게 머물렀죠. 고양이와 함께 살지는 않을 거지만 현관문을 열어두는 인간과 굳이 거길 찾아가 밥을 먹고 놀다 가는 고양이의 동거 시즌 2가 시작되는 것 같았어요. 한 번의 끝을 경험한 터라 언제까지 지속될지 장담할 순 없었지만 별문제는 없어 보였어요. 하지만 세상일이란 예측하지 못한 허들을 넘어야 하는 장애물경기 같은 것이죠. 이번에 평화를 위협한 건 고양이의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사건이었어요. 살고 있던 빌라의 전세계약이 만료되어 이사를 가야할 때가 되었어요. 선택할 시간이 되어버린 거예요. 선택지는 둘 중 하나밖에 없었어요. 삼삼이를 두고 그냥 이사를 가거나 삼삼이를 데리고 이사를 가서 ‘함께 살거나’.

 

“뭐, 어딜 간다고?”

 

굴러온 돌이었던 삼삼이는 그렇게 멈추었어요. 더불어 제 삶도 완전히 바뀌었죠. 비록 각자의 리듬으로 자유롭게 살아간다고는 해도, 생존의 필수 요건을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존재와 함께 산다는 건 처음이었었으니까요. 삼삼이가 굴러와서 제 안에 있던 방랑자를 걷어차 날려버렸고, 우리 둘은 지구의 중심까지 뿌리를 내릴 만큼 단단히 박힌 돌이 되었어요.

 

To be continued…

 

* 먕이는 저 말고도 골목의 여러 사람들에게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예쁨을 받았어요. 사실상 첫 번째 묘연이라고 할 수 있는 먕이를 그 뒤로 다시 볼 순 없었지만 무탈하고 건강하게 잘 살고 있으리라 믿고 있어요.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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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각자의 자리   |   ⑤ 굴러온 돌   |   ⑥ 잃어버린 시간

Episode 3. 미래에서 온 카오스, 강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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