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오랜만에 고양이에 관한 얘기로 글을 시작하네요,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로 채우고 있어요. 도대체 왜 저런 기묘한 자세로 잠을 자고 있는지, 왜 새로 산 장난감에는 관심이 없고 택배 박스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아마 고양이들끼리도 다른 고양이가 왜 그러는지 잘 모를 거예요. 물론 제각각의 이유는 있겠죠. 우주적 차원의 거창한 이유일 것 같기도 해요. 고양이니까요. 본인 말고 다른 존재에게 뭔가를 납득시켜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부재하신 분들이잖아요. 그런데 고양이의 행동이 이해되는(듯한) 순간들이 간혹 있기도 해요. 봉산아랫집 오묘를 예로 들면 삼삼이, 모카, 치코, 미노, 오즈가 창가에 앉아 멍하게 밖을 쳐다보는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그건 분명히 각자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모습이에요.

 

창밖 보기 매니아, 김삼삼 씨

 

종일 잠만 자는 것처럼 보이는 고양이도 사실은 하고픈 일이 많을 거예요. 사람과 함께 안전하고 풍족하게 살고는 있지만, 사람의 인생이 신변의 안전과 포만감만으로 완성될 수 없는 것처럼 고양이에게도 그게 묘생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누군가의 눈에는 집에서 편안하게 살아가는 고양이가 뭔가를 더 바라는 게 사치스러운 일처럼 보일 수도 있겠어요.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골목 구석구석을 떠돌아야 하고 언제 어디서 닥칠지 모르는 위협을 피해 항상 숨어야만 하는 길고양이의 삶과 비교하면 말이에요. 하지만 그렇게 최악의 상황을 비교 대상으로 삼아 상대의 꿈과 희망과 욕망의 가치를 폄훼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죠. 누구라도 각자의 처지에 맞게 다양한 걸 욕망할 수 있어야 해요. 사람도 고양이도 말이에요. 사람의 집에서 살아가는 고양이는,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고 해도 공간이 제약당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울타리 너머를 보며 자유를 향한 의지가 불타오르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어요. (집)고양이도 저 밖에서 뭔가를 하고 싶다고!

 

고양이가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행동은, 겉으로는 고요하고 평온해 보일지라도 내면에서는 수많은 욕망이 꿈틀대는 격정적인 순간이라 생각해요. 얼만큼 멀리 갈 수 있을까?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무슨 재미난 것들이 있을까? 이를테면 앞집 감나무 둥치를 우다다다 타고 올라 늠름하게 꼭대기에 올라서거나 뒷집 담장 위를 여유로이 거닐며 우아한 캣워크를 하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깃털 달리고 딸랑 소리가 나는 플라스틱 장난감을 사냥하는 게 지겨워졌을 때 진짜 새를 쫓으며 놀고 싶을 수도 있고요. 그런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흥분되고 즐거울까요. 곧 냉정해져야 하지만요. 고작 창문 하나일 뿐이지만 결코 넘어갈 수 없는 세계이니까요. 모든 (집)고양이의 마음속엔 바깥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이 잔뜩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걸 고양이의 버킷리스트라고 부를 순 없어요. 버킷리스트가 단지 하고 싶은 일의 목록만을 뜻하는 건 아닌 것 같거든요. 삶의 조건이나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버킷리스트를 만드는 일이 허락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거예요. 고양이의 삶이 그런 것처럼 말이에요.

 

모카는 창밖도 조심스럽게

 

버킷리스트라는 단어가 한국의 일상에서 흔하게 사용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어요. <버킷리스트>라는 영화가 개봉하면서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는 글을 어디선가 봤는데 정말로 그렇더라고요. 구글에서 2006년 이전으로 조건을 설정해서 ‘버킷리스트’를 검색하면 결과 목록이 12쪽에서 끝나버려요. 아무 조건 없이 검색하면 4,300,000개의 결과가 나오는데 말이에요. 심지어 한국 포털에서 뉴스를 검색하면 가장 오래된 검색 결과가 영화 <버킷리스트>에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이 캐스팅되었다는 2006년 7월의 기사예요. 그전까지 신문에서 ‘버킷리스트’라는 단어가 사용된 적이 없는 셈이에요. 영화는 크게 흥행하지 못했지만(최종 관객 29만 명) 제목만은 오래도록 남아 한국인의 일상에 짙은 흔적을 남겼어요. 그런데 영화의 제목이 일상 용어가 된 데에는 지나치게 친절했던 부제의 역할이 큰 것 같아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 한국에는 영화가 2008년 4월에 개봉했는데 도대체 그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람들이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의 목록이란 단어에 마음이 움직였을까요?

 

한국어에도 꼭 이루고 싶은 일을 지칭하는 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소원이나 희망 같은 단어에 비하면 버킷리스트라는 단어가 왠지 세련(?)돼 보이고, 거기다 ‘죽기 전’이라는 조건까지 더해져 마치 ‘기간 한정 판매 스페셜 굿즈’라도 만난 양 반가워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버킷리스트라는 단어의 유래에는 조금 섬뜩한 면이 있어요. 기사로도 많이 나와서 알고들 계실 거예요. ‘죽다’라는 뜻의 속어인 ‘kick the bucket’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요, 교수형을 집행하거나 자살할 때 bucket(양동이)에 올라가서 목에 올가미를 건 다음에 kick을 하면 꼼짝없이 죽…. 아무튼 그렇게 양동이를 걷어차고 나면 온갖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갈 텐데 그중엔 뭔가를 이루지/해보지 못해서 아쉬운 것들의 목록도 분명 있을 거예요. 그 목록 중에서 존재론적(조금 더 착한 사람으로 살걸)이거나 추상적(더 많이 사랑하며 살걸)인 걸 빼고 직접적인 실행이 가능한 일의 목록을 가리켜 버킷리스트라고 불렀던 것 같아요. 피아노를 배워 볼걸, 같은 것들 말이에요. 그러니까 버킷리스트는 ‘하고 싶은’ 것들의 목록이라기보다 ‘하지 않아서 후회할지도 모르는’ 것들의 목록에 더 가까운 거죠. 물론 하고 싶은, 갖고 싶은 것의 목록이란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훨씬 많지만요.

 

치코는 먹을 걸 찾고 있는지..

 

어원에 가깝게 붙어서 버킷리스트란 단어를 살펴보면 희망보다는 욕망이 더 많이 반영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희망이 추상적인 개념이나 상태를 원하는 것이라면 욕망은 그보단 훨씬 구체적인 대상을 갈구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후회라는 요소는 버킷리스트가 선택이란 행위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아요. 모든 후회는 두 가지 패턴을 가지고 있어요. 첫째는 노력의 유무나 크기에 따른 후회예요. 노력하지 않았다거나 괜한 노력을 했다거나 조금 더 노력했으면 좋았을 걸 같은 후회들이죠. 부모님께 더 효도할걸,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할걸, 공부를 더 열심히 할걸 등 끝도 없는 후회의 목록이 존재하죠. 둘째는 어떤 선택에 대한 후회예요. 그때 비트코인으로 피자 두 판을 사 먹지 말걸, 이 인간이랑 결혼하지 말걸, 곱빼기를 시킬걸 같은 후회들이에요. 그리고 이 후회가 노력과 관련된 후회보다는 훨씬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 같아요. 다시 돌아간다고 해서 다른 걸 선택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어쨌거나 후회했던 선택의 대안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으니까요.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버킷리스트의 목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음 조건이 충족되어야 해요. 먼저,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어야 해요. 노력과 상관없이 운에 좌우되거나 임의로 결정되는 일들을 버킷리스트라고 부르는 건 이상하잖아요. 이를테면 누가 자신의 버킷리스트가 복권 1등에 당첨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이상하고 우습겠어요. 반면 언뜻 허황되고 거창해보이는 일이라도 노력해서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면 버킷리스트가 될 수 있어요. ‘고양이로 우주정복!’(느낌표가 반드시 있어야 해요) 같은 걸 예로 들 수 있겠네요. 다음은,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반드시 선택 가능한 일이어야 해요. 노력은 할 수 있지만 선택의 자유가 없거나 제한된 일은 버킷리스트가 아니라 인생의 목표, 간절한 희망, 평생의 소망 등으로 불러야 할 거예요. 노예제가 존재하던 시절에 노예가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건 충분히 노력해볼 만한 일이에요. 심지어 사전에 계획과 준비를 할 수 있을 만큼 구체적 사건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노예는 여행의 실행을 선택할 수 없어요. 주인의 허락을 구하거나 노예라는 조건을 탈출해야만 가능하죠. 타인이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거나 본인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을 버킷리스트라고 말하는 건, 복권 1등에 당첨되는 일만큼 우습진 않지만 그것보다 더 이상한 상황일 거예요.

 

왠지 날씬해 보이는 미노

 

그래서 버킷리스트는 인생의 보너스 같은 기분이 드는 일들로 채워지는 게 가장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이루지 못해도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고 잘 살 수도 있지만 가끔 아쉬움이나 후회의 감정과 함께 인생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일들 말이에요. 버킷리스트가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건 간절한 희망이나 절박한 목표가 맡아야 할 역할이죠.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 버킷리스트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국내에도 유명한 작가 다비드 칼리가 쓴 그림책 <인생은 지금>(세실리아 페리 그림, 정원정᛫박서영 옮김)에 나오는 것처럼요. “이제 여행도 갈 수 있어!” “외국어나 배울까?” “악기도 좋겠다.” “호수에 밤낚시 가자!” “요리를 배워볼까 봐.” “숨이 찰 때까지 달려서 강물에 뛰어들자.” “소리칠 거야. 당신을 사랑한다고.” 막 은퇴한 주인공 할아버지는 이제 마음대로 살 수 있게 됐다면서 마음만 먹으면 젊었을 때 언제라도 할 수 있었을 것 같은 일을 해보자며 할머니를 귀찮게 해요. 왜 자꾸 내일이냐며, 인생은 오늘, 지금이라고 말하면서 말이에요.

 

최근 몇 년 동안 뉴스에 재미난 사건이 소개된 적이 있어요. 경찰에 체포되는 것이 버킷리스트였던 99세, 102세, 104세의 할머니가 각각 네델란드, 미국, 영국에서 경찰의 예외적인 호의에 의해 (죄가 없음에도) 체포되어 수갑을 차보고 (잠깐이지만) 감옥에도 수감되는 경험을 했다는 기사였어요. 사진에 나오는 할머니들은 정말 즐거운 표정이었어요. 평생 생각만 해오던 일을 직접 경험했으니 얼마나 행복했겠어요.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경찰에 체포되는 것 정도야 그다지 난이도(?)가 높은 일이 아닐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마음 먹기가, 법을 어긴다는 선택을 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테죠. 저는 세 할머니의 소원이 버킷리스트의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해요. 이보다 진지하거나 무거울 경우엔 버킷리스트가 아니라 간절한 희망이라 부르는 게 나은 것 같아요. 만약 버킷리스트를 만든다면 삶의 보너스 같은 일들로 목록을 채워보세요. 작고 가벼운 마음으로요.

 

오즈야, 창밖엔 신기한 게 많아!

 

고양이는, 한참 만에 고양이 얘기로 돌아왔네요, 집에서 살아가건 길에서 살아가건 간에 삶의 보너스 같은 일이 없어요. 지루한 반복이거나 위험한 일탈이 있을 뿐이에요. 그래서 고양이에겐 버킷리스트가 있을 수 없어요. 창가를 응시하며 하고 싶은 일은 아무리 욕망해본다고 한들 본인의 노력이나 선택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물론 고양이가 버킷리스트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에요. 만약 고양이가 사람과 함께 안전하면서도 풍족하게 살아가는 그 집이 베르사유 궁전이나 자금성 정도 된다면, 얘기가 좀 달라질 수도 있죠. 그만큼 충분히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면 분명히 버킷리스트에 넣고 싶을 만한 일이 몇 개쯤 생겨날 거예요. 길고양이가 먹을 걸 걱정하지 않고 한겨울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된다면, 낯선 사람의 위협에 시달리지 않고 자동차 바퀴를 겁내지 않아도 된다면, 역시나 얘기가 달라질지 몰라요. 안전하다고만 한다면 도시의 곳곳이 흥미롭고 재미난 장소가 될 테니까요. 길고양이의 버킷리스트가 제법 길어질 수도 있을 거예요.

 

버킷리스트가 많은 사람일수록 즐겁고 충만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생의 곳곳에 보물찾기하듯 보너스를 감춰놓고 살아가는 거니까요. 또한 버킷리스트가 있다는 건 자유로운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자유롭게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이걸 안 하면 후회하지 않을까? 저걸 하고 나서 후회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거겠죠. 사람들이 버킷리스트를 만들며 즐겁고 자유롭게 살아가듯이 고양이도 행복하고 충만하게 살아가면 좋겠어요. 버킷리스트가 잔뜩인 채로, 삶의 보너스 같은 일을 기대하면서 자유롭게 말이에요. 특히 길고양이 모두가 안전하고 풍족한 조건 속에서 버킷리스트를 만들며 살아가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버킷리스트!

 

*삼삼이, 모카, 치코, 미노, 오즈는 베르사유 궁전에 전입신고 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시고.

 

마침.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구독하기

 

[이치코의 코스묘스]

시즌 1, 코스묘스의 오묘한 시작

Episode 1. 한낮의 작고 짙은 온기를 닮은 고양이, 오히루

① 반짝이는 삶   |   ② 막연한 기다림   |   ③ 기쁨의 크기

Episode 2. 잃어버린 시간에 관하여, 김삼삼

④ 각자의 자리   |   ⑤ 굴러온 돌   |   ⑥ 잃어버린 시간

Episode 3. 미래에서 온 카오스, 강모카

⑦ 빈 책상   |   ⑧ 혼돈의 카오스   |   ⑨ 오래된 미래

Episode 4. 이치코,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⑩ 화려한 시절   |   ⑪ 보내는 마음   |   ⑫ 이치코의 코스묘스   

Episode 5. 어느 날  갑자기 – 불쑥, 고미노

⑬ 뜻밖의 여정   |   ⑭ 회색의 미궁   |  ⑮ 약자의 마음 (1)   

Episode 6. D의 의지를 잇는 자, 송오즈

⑯ 소리치는 일   |   ⑰ 총체적 난국   |   ⑱ 엔드게임 and..

시즌 2,

길어질 게 뻔한 변명(1)   |   길어질 게 뻔한 변명(2)   |   길어질게 뻔한 변명(3) 

원래 그런 게 어딨나요? 

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1)   |   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2) 

고양이의 버킷리스트 

떨림이 멈추지 않는 세계에서(1)   |   떨림이 멈추지 않는 세계에서(2) 

시즌 1, Again

• Episode 7. 고양이, 장소, 환대, 시월이

⑲ 1, 2, 3, 4, 5, 6, 북적북적   |   ⑳ 혁명의 선봉   |   ㉑ 앙시앵 레짐    |   ㉒ 우정과 환대      

시즌 2, Again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고양이에게 배운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 고양이 책 #1 총, 균, 쇠 다정한 반복 치코의 일기 선물 같은 시간 마지막 겨울길고양이 돌봄 지침(가이드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