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박 열두 달이 지났네요. 작년 2월의 첫 편지 ‘생기’에 실렸던, 오후의 소묘의 로고가 된 히루 사진을 넣은 글을 시작으로 해서 어느새 열두 번째 편지에 담을 이야기까지 왔어요. 연재가 길어지다 보니 도대체 무슨 말을 했던가, 가물거릴 때가 많아졌지만 제 출생의 비밀(?)에 관해 말씀드렸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어요. 저는 말이에요, 어떻게 보자면 식상한 환경에서 태어났어요. 경상도 어느 시골이 고향인 남자이고요, 태어나 보니 증조할아버지도 장남, 할아버지도 장남, 아버지도 장남이었고 저도 장남이었어요. 두 해 뒤에 동생이 태어났는데 그 녀석은 장남은 될 수 없는 운명이었지만 역시나 아들이었어요. 끔찍하네요. 어쨌거나 그렇게 학교에 다니고 친구를 사귀었고, 시키지도 않은 짓을 잘도 하고 다녔지만 해야 할 일에서 막상 크게 벗어난 적은 없는 아이로 자랐어요. (나이는 고양이 식으로 셀게요) 열여덟 살이 지날 때까지는 그랬어요. 반전이라고는 없는 뻔한 세상에서 살았어요. 경상도라는 세상에서, 남자로, 장남으로 말이에요.

 

(웬만하면 누워서 꼼짝도 안 하는) 갱상도 싸나이, 이치코

 

열아홉 살 봄에 다른 세상을 처음 만났어요. 열아홉 어린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변화무쌍한 세상의 입구에서 가장 먼저 느꼈던 당혹감은 말이 다르다는 것이었어요. TV나 라디오를 통해서 표준어 혹은 서울말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경상도라는 세상에서 그 말은 현실의 말이 아니었어요. 주변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열아홉에 만난 세상에선 표준어라는 것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말이었어요. 게다가 상대적으로 훨씬 힘이 센 말이었어요. 제 사투리와 표준어가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고 해서 대등한 것은 아니었어요. 누구도 강요하진 않았음에도 암묵적으로 합의된 기준은 표준어와 서울말(1)이었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말은 놀림거리나 웃음거리가 되기 일쑤였어요. 어린이다운 적응력을 발휘해야 했어요. 빠르게 사투리를 버리기 시작했죠. 크게 문제 될 건 없었어요. 어차피 교육과정 내내 보았던 텍스트의 기준이 표준어였기 때문이에요. 정구지가 부추가 되고, 아래가 그저께가 되고, 행님이 형이 되고 밥 뭇습니꺼가 식사하셨어요가 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진짜 문제는 억양이었어요. 경상도 특유의 억양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어요. 단어와 문장이 표준어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억양은 서울말의 근처도 못 간 채 여전히 따뜻한 남쪽 나라에 머물러 있었어요. 마치 싸움을 연상케 하는 격렬한 악센트를 누그러뜨렸지만 그렇다고 서울말처럼 제대로 밋밋해지지는 않았어요. 독특한 음의 고저는 사라지지 않고 어떤 단어에도 어떤 문장에도 심지어 가끔은 어떤 노래에까지 달라붙어 있었어요. 이건 안 되는 거구나 싶었어요. 그래도 표준어 단어를 정확하게 구사하니까 그 정도면 됐지 뭐, 라고 생각했어요. 주변에 저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다들 경상도 사투리의 억양이 너무 강해서 고치기 힘들어, 라고 말하며 그냥 살고 있었어요. 그렇게 해서, 열아홉 어린이가 다시 태어나 열아홉에 새로운 세상을 또 만나고 거기다 국가의무교육과정을 한 바퀴 더 돌아도 자투리로 군 복무를 한 번 할 정도의 시간이 남을 만큼 나이(대체 몇 살이란 거죠..)를 먹었지만 여전히 제 말에는 한반도 동남 지방의 억양이 흐릿하게, 때론 진하게 배어 있어요.

 

넌 언제까지 의정부 사투리 쓸래?

 

경상도 사투리와 관련해 이런 말들이 오가면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비슷해요. 맞아, 다들 그렇더라고, 라며 맞장구를 치거나 경상도 억양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를 들어 이야기를 재미나게 풀어나가곤 하죠. 이를테면 22(2의 2승), 2e(2의 E승), e2(E의 2승), ee(E의 E승) 같은 것들 말이에요. 그런데 아주 드물게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어요. “경상도 여자들은 안 그렇던데?” 맞아요. 실제로 경상도에서 나고 자란 여성들은 빠르게 새 억양에 적응하기 때문에 따로 물어보지 않으면 고향을 알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일상의 사실을 담담하게 말했을 뿐이지만 저 말엔 진실이 숨어 있어요. 경상도 여자만 그런 게 아니에요. 서울에 살면서 전라도 사람의 억양, 충청도와 강원도 사람의 억양을 실제로 접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에요. 오직 경상도 남자의 사투리 억양만이 현실 세계에서 활개를 칠 뿐 다른 사투리의 억양은 특별한 상황에서나 접할 수 있을 뿐이에요. 왜 그럴까요? ‘경상도 남자’의 유전자에는 사투리 억양을 보호하려는 신비로운 염기서열이 숨겨져 있는 걸까요?

 

유전자는 도른 유전자가 최고지

 

세상에 원래부터 그런 건 없어요. 무슨 일이든 찬찬히 살펴보면 이유가 숨어 있기 마련이에요. 대개는 무심해서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죠. 무심함을 탓할 순 없을 거예요. 어떤 의도를 가진 행위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무관심의 결과가 때로는 비극적인 장면을 만들어 내기도 해요. 이를테면 사회생활을 할 때 어딜 가도 들리는 중년 남성 특유의 거만한 경상도 억양 같은 것 말이에요. 제겐 좀 참담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어요. 경상도 남자들만 스스럼없이 사투리 억양을 드러내는 걸 한때나마 당연하다고 여겼던 걸 후회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게 전라도나 다른 지방에 대한 어떤 편견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는 걸, 여성의 왜곡된 이미지(여성의 말투는 남성에 비해 개인의 평가 기준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훨씬 많죠)가 보편적으로 확산하는 데 기여하는 걸 몰랐다는 게 부끄러워요. 조금만 세심하게 살폈어도 주변의 눈치를 보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서울말의 낯선 억양을 익히고 따라야 했던 이들의 곤란함을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2)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에요. 출근길에 고양이가 죽어 있는 걸 발견했어요. 작은 아이였고 도로 한편에 그냥 방치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이른 시간이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출근 시간을 맞추는 것도 빠듯했던 터라 찜찜한 마음을 남겨둔 채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어요. 그날 퇴근길에 같은 방향으로 가던 친구와 아침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다가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어요. 그럴 경우에는 (서울이라면) 120번으로 문자를 보내서 주소와 위치 등을 남겨도 구청에 전화를 하는 것과 동일하게 고양이 사체를 처리해준다는 것이었어요. 처음 듣는 정보라 넌 어떻게 그런 걸 아니? 라고 되물었더니 자긴 이상하게 고양이 사체를 발견하는 상황을 많이 겪어서 어쩌다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제게 “형은 어떻게 그렇게 아깽이를 잘 발견하는지 신기해요. 나는 맨날 죽은 아이들만 눈에 띄던데 말이에요.”라고 말했어요. 그러게요. 생각해 보니 저도 이상했어요. 누군가의 도움이 꼭 필요한 아깽이들이 왜 저한테만 그렇게 잘 보이는 걸까요?

 

꼭꼭 숨어도 보임

 

그 친구의 말이 객관적 사실일 수도 있어요. 누군가는 우연히 죽어가는 아깽이를 연달아 발견하고 다른 누군가는 또 우연히 이미 죽은 고양이만 연달아 발견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니까요. 이 도시엔 수많은 길고양이가 있고 그중 상당수는 버림받거나 병에 걸린 아깽이들이고 또 많은 아이가 길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니까요. 그런데 한편으론 조금 이상하기도 해요. 왜냐면 저 역시 삼삼이를 길에서 만나기 전까지는, 치코를 구조하기 전까지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길고양이를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에요. 아무런 의심 없이 제 사투리 억양을 드러내고 살아오며 다른 이들의 곤란함을 놓쳤던 것처럼, 제가 길고양이의 세계에 무심했기 때문에 못 보고 지나쳤던 장면들이 있었던 건 아닐까 싶은 거죠. 아마도 우연이라는 요소가 가장 큰 작용을 하긴 했겠지만 그걸로 현실을 설명하기엔 확실히 무언가 부족한 것 같아요. 자꾸만 아깽이를 구하고 있다는 현실을요.

 

제 경우엔 삼삼이와 히루를 만나고 그다음에 2, 3, 4, 5번(3)과 인연을 넓혀가면서 분명히 변화된 부분이 있어요. 그전엔 길고양이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어쩌다 길고양이와 마주치는 일이 생긴다 해도 단호하게 경계를 짓곤 했어요. 길고양이에겐 길고양이의 세계가 있으니까, 하면서 말이에요. 또 부끄러움으로 낯이 뜨겁네요.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저 말이 절반은 엉터리고 절반은 틀렸다는 걸 알아요. 길고양이가 살아가는 장소는 스스로 선택한 세계가 아니에요.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세계에 갇혀버린 것에 가까워요. 게다가 살아가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태연하게 그들의 세계가 있다고, 마치 자연 다큐멘터리 속 야생 환경에서 살아가는 동물의 세계를 말하듯 하는 건 잘못된 거예요. 그 세계가 우리와 상관없는 세계인 것도 아니에요. 길고양이가 살아가는 세계는 곧 우리 세계의 일부예요. 사람이 사는 도시의 길 위에서 고양이가 생활하는 건 충분히 그럴 수 있고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들의 생명이 위협받거나 생존에 곤란을 겪는 일은 당연하지 않을뿐더러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에요. 만약 길고양이의 세계가 피폐하다면 그건 우리의 세계가 그보다 더 황폐하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이 아이들이 무사히 자라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고양이가 눈에 자주 띄는 건 어쩌면 제가 길고양이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어요. 길고양이와 관계된 작디작은 소리와 움직임, 변화도 놓치지 않을 만큼 항상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예외적 상황의 아깽이를 발견할 확률이 당연히 높은 게 아닐까 싶은 거죠. 제가 특별히 예민한 성격이라 그런 건 아니에요. 그저 길고양이의 세계가, 서울이라는 도시의 삭막한 환경이 너무나 이상해서 끊임없이 관찰하고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일 뿐이에요. 밥 먹을 곳도 없고 물 마실 곳도 없고 겨울이면 따뜻하게 숨어서 지낼 곳도 없는 세계가 원래 그런 세계일 리는 없잖아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외국의 도시에서 길고양이를 만난 적이 있으신가요? 길고양이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 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랬다면 한국과는 뭔가 다르다는 걸 느끼셨을 거예요. 외국의 도시라고 해서 길고양이의 밥과 물과 잠자리가 젖과 꿀처럼 흐르는 낙원인 건 아니에요. 길 위의 삶이 위태로워 보이는 건 얼핏 비슷하기도 해요.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어요. 그곳의 아이들은 한국의 길고양이만큼 사람을 피해 숨어들지 않아요. 낯선 존재에 대한 자연스러운 경계심을 드러내는 정도죠. 사람이 있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거나 오히려 친근하게 다가오는 아이들도 많이 있고요. 왜 그럴까요?

 

도쿄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고양이 마을

 

길고양이가 사람을 심하게 경계하고 피하는 건 원래 그런 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반응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고양이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으나) 서울의 골목을 오래 경험하다 보면 길고양이를 향해 아무런 이유 없이 욕을 하거나 윽박지르고, 발길질에 심지어 돌팔매질까지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놀라게 돼요. 애고 어른이고 젊은이고 늙은이고 할 거 없이, 남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데 다시 한번 놀라고요. 골목의 그 풍경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풍경과 똑같은 게 아닌가 싶어 서글퍼질 때가 많아요. 가만있었을 뿐인 길고양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굳이 위악을 부리고야 마는 그들이,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에게는 또 얼마나 이유 없는 행패를 부려댈지를 생각하면 말이에요. 그리고 그게 당연하다고, 원래 힘없으면 그렇게 당하며 사는 거라고, 억울하면 성공하라고 뻔뻔하게 말할 걸 생각하면 말이에요. 서글픔을 넘어 비참함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아요.

 

며칠 전, 동네 길냥이들 밥을 주던 곳이 치워져 있었어요. 근처 쓰레기가 쌓인 곳에 밥그릇과 (스티로폼 박스에 핫팩까지 깔아서 정성스럽게 준비한) 물그릇이 나뒹굴고 있었어요. 이후로 내내 마음이 좀 그렇더라고요. 거기다 새해라는 사건이 더해져 이번 글은 조금 딱딱하고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내친김에 마무리도 교훈적으로 할까 해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원래 그런 게 어딨나요?’ 라는 도발적인 질문이 더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해괴망측한 논리와 행동들이 당연한 것으로 둔갑해버리니까요. 2020년의 마지막 며칠 사이에,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여의도의 큰 빌딩에서 일하던 청소노동자들이 집단해고를 당했고(4), 포항에서는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사람이 목줄을 잡고 공중으로 빙글빙글 돌리는 일이 있었고(5), 외국에서는 흑인 소년이 아이폰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휴대폰 도둑으로 몰려 폭행을 당했어요(6). 그런 일들이 잘못됐다고 말하며 노동자의 편에 서고, 동물학대로 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부당한 폭행을 영상으로 찍어 SNS에 공유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은 채 가해자의 행위가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을 거예요. 그래선 안 되는 거잖아요.

 

도처에 만연해 있는 부조리함에 반대하며 용기 내어 말하는 이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그 용기에 모두가 박수칠 줄 아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힘없고 약한 이들이 최소한의 생존마저 위협받는 일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세상의 모든 길고양이가 잘 먹고 잘 싸고 잘 놀다가 늙어 죽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착한 사람들은 새해 복 많이 받고 나쁜 놈들은 한 해가 쫄딱 망했으면 좋겠어요. 2021년, 해피 뉴 이어.

 

새해에도 거리두기는 계속!

 

 

마침.

 

(1) 표준어의 정의가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기는 하지만 억양에서 드러나는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굳이 표준어와 서울말로 나눴어요. [본문으로]
(2) 사실은 모든 이가 획일적으로 표준어만 쓰는 것보단 방언이 함께 섞여서 풍부한 억양과 단어와 뉘앙스가 살아 있는 언어 환경이 더 낫다고 생각해요. [본문으로]
(3) 1, 2, 3, 4, 5번 : (순서대로) 삼삼이, 모카, 치코, 미노, 오즈를 편의상 부르는 이름이에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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