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카오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두 번이나 캐리어에 넣는 걸 실패한 터라 세 번째 시도에서는 정말 인정사정 안 보고 모카를 힘껏 붙들었어요. 모카가 다치지 않을까 걱정할 겨를이 없었어요. 지난번의 실패 이후로 일주일간 무럭무럭 자란 모카의 발버둥이 얼마나 강한지 제 힘이 부칠 지경이었거든요. 모카를 겨우 캐리어에 넣은 다음에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제 몸통으로 캐리어를 덮어 누르고 있어야만 했어요. 그다음에 더듬거리며 지퍼를 찾아서 마치 모비 딕과 사투를 벌이는 선원들처럼 조금씩 조금씩 하지만 끈질기게 지퍼를 채워나갔어요.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게 뭔지 알 것도 같았어요. 얼른 이 상황을 마무리하고 싶어 조급한 마음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손은 뜻대로 안 움직이고 지퍼는 자꾸만 뭔가에 걸려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 않았어요. 와중에 모카는 밖으로 나오려고 발톱을 한껏 세운 채 자신만의 격렬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요. 묠니르를 도둑맞은 토르라도 그렇게 난폭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기껏 몇 분이었을 테지만 제겐 한없이 길었던 시간을 견디며 마지막까지 지퍼를 채웠을 때 저절로 감탄이 나왔어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제 진짜로 마지막 하나만 남았어요. 원래대로라면 중성화수술을 하고 수술 부위가 아문 다음에 다시 병원에 가서 실밥을 뽑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까지 보셨다시피 모카를 또 붙잡아서 캐리어에 넣어 병원을 방문한다는 게…. 수의사에게 솔직하게 말했어요. 제가 이 아이를 다시 병원에 데려오기는 힘들 것 같으니까 녹아서 없어지는 봉합용 실을 사용해달라고요. 그리고 아직 캐리어 안에 웅크려 있는 모카에게 수술 잘 받으라는 인사를 건네고 병원을 나왔어요. 날짜는 10월 1일이었고 토요일이었어요. 병원을 나와 바라본 하늘은 무척이나 높아 보였어요. 아마 구름 한 점 없었을 거예요. 제 심정이 그랬어요. 모카의 중성화수술이 지난 세월의 어떤 성취보다 높고 귀해 보였어요.

 

어쨌거나 성공 😽 (우정출연 : 치코 왕발)

 

수술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모카는 캐리어의 지퍼를 열자마자 잽싸게 뛰어나와 구석으로 숨었어요. 저는 빈 캐리어를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어요. 지난 몇 주간 온갖 난리법석을 피우며 모카의 중성화수술을 무사히 마치기는 했으나 안도감보다는 앞으로 겪을 미래에 대한 걱정이 더 컸어요. 만약 이사를 가게 된다면? 혹시라도 모카가 아프게 된다면? 불현듯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종교를 믿지 않았지만 그날만은 간절히 빌고 또 빌었어요.

‘모카야, 앞으로 아프면 안 돼. 제발 아프지 마. 넌 절대 아프면 안 돼.’

 

/

 

모카를 들이기로 했을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가 흐릿함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하는 게 있어요. 입양할 생각이 없겠냐는 말과 함께 모카의 사진을 처음 받았을 때, 제가 아니면 이 아이를 데려갈 사람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마 카오스 무늬의 고양이를 자세히 본 건 처음이라 그랬던 것 같아요. 실제로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도 카오스 무늬의 고양이는 꺼려하거나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비슷했어요. 모카의 요란한 색깔이 왠지 공격적으로 느껴졌고 불규칙한 무늬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어요. 그래서 남들에게도 이 아이의 인상이 부정적일 거라 지레짐작하고 다른 곳으로는 입양 가기 힘들 것이라 생각해버렸던 것 같아요. 하지만 웬걸요! 실제로 모카를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해버렸지 뭐예요. 얼마나 예쁜지 말도 못 하겠더라고요.

 

임보하던 지인에게 받은 모카의 슈퍼 뽀시래기 시절 사진

 

“내가 미묘다!”

 

굳이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할까요? 고양이가 예뻐 보이는 데 번거로운 절차는 필요 없어요. (정말 간혹 예외도 있긴 하지만) 고양이는 모두 예뻐요. 저희 집 다섯 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삼삼이는 삼삼이라서 예쁘고, 치코는 치코처럼 예쁘고, 미노는 잘생긴 데다 예쁘고, 오즈는 ‘도른자’임에도 불구하고 예뻐요. 그렇지만 미묘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건 모카뿐이에요. 모카의 현란한 카오스 무늬와 살짝 경계하는 초롱초롱한 눈빛은 탄성을 자아낼 만큼 아름다워요. 보는 이마다 (물론 저희 집에 오더라도 모카를 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감탄을 하죠. 모카의 생일을 정해야 했을 때 문득 ‘사월이’란 애칭이 떠올랐어요. 새침하고 도도하고 예쁘고 매력적인 우리 사월이. 덕분에 모카의 생일은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어요. 마침 구조된 시기와 당시 몸무게 등으로 추산할 수 있는 날짜 역시 3월 말에서 4월 초 사이였기 때문에 딱 맞춘 것처럼 4월 2일이 모카의 생일이 되었어요.

 

모카의 첫 생일 케익 :)

 

병원을 다녀야 할 시기에 붙잡는 게 힘들었다는 것만 빼면 모카와의 생활은 아주 즐겁고 행복했어요. 삼삼이도 모카에게는 짜증을 조금만 내면서-삼삼이가 짜증을 안 낼 수는 없으니까요- 잘 챙겨주었고 모카도 삼삼이를 잘 따랐어요. 모카는 자기보다 한 달 늦게 들어온 동생 치코도 잘 돌봐줬어요. 여전히 툭하면 숨고 도망 다니느라 바쁘긴 했지만 수다가 엄청 늘었어요. 곁에 와서 제 몸에 부비는 시간도 많아졌고요. 그렇게 붙잡히는 걸 싫어하면서도 희한하게 배를 만지는 건 또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줬어요. 모카 배를 막 쓰다듬고 있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데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랄까요. 하지만 모카와의 관계에서 그 행복이 전부는 아니에요. 입 밖으로 내버리면 현실이 될까 봐 속으로만 삭이며 내색은 않지만 사실 매일매일의 행복함 뒤에는 걱정과 불안이 함께 있어요. 물론 나쁜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면 안 되니까요!

 

“이 언니 꼬리 재밌네-“

 

지난 편에 다 말하지 못한 혼돈의 카오스, 기-승-전-쨍그랑

 

이십 대 중반 즈음의 일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어떤 계기였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 당시에 함께 어울렸던 사람들과 시대적 상황에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겠죠. 자연과 환경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던 때였어요. 돌이켜 보면 맥락이 매끄럽진 않지만 아무튼, 집을 소유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집이 터를 잡고 있는 땅에 관해 생각했던 것 같아요. 땅을 돈으로 사고 팔아도 되는 것일까, 하는 물음이 생겼어요. 거창한 이론보단 직관적인 의문이었어요. 살아가는 데 땅이 필요한 건 사람뿐만이 아니잖아요. 풀도 나무도 벌레도 동물도 심지어 새도 땅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데 우리가 땅을 소유한다는 게 말이 안 돼 보였어요. 필요한 만큼 땅을 이용하는 것만 해도 우리가 생존하고 인생을 즐기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을까 싶었어요. 왜 땅을 재산으로 삼아야 하며 자손 대대로 소유권을 물려줘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집도 마찬가지고요.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집을 사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집을 소유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 같아요.(그땐 집을 소유할 돈이 없던 시기였기 때문에 아주 쉬운 결심이었어요!)

 

그 시절로부터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결심을 잊지 않고 잘 살고 있었어요. 어라, 과거형이네요. 모카 때문에 생각이 조금 바뀌게 되었어요. 고양이와 함께 살아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리의 털복숭이 친구들을 데리고 이사를 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주변 환경이 바뀌어서 고양이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이사를 하는 과정의 난이도가 상당히 높아지거든요. 이삿짐이 이동하는 과정과 별도로 고양이를 옮기는 일을 안전하고 섬세하게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아요. 이삿짐을 싸서 트럭에 싣는 동안 고양이를 어떻게 데리고 있을 건지, 새집에 이삿짐을 풀기 전에 고양이를 먼저 집에 데려다 놓아야 할지 아니면 짐을 다 정리하고 나서 데려가야 할지, 혼자 이사를 해야 한다면 고양이를 챙기는 일과 이사 과정을 지켜보는 일을 어떻게 동시에 할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등등. 고양이가 하나뿐이라고 해도 이사는 어려운 일이에요. 그런데 만약 고양이가 여럿이라면? 게다가 그 여럿 중에 하나가 모카라면?

 

요 상태 그대로 순간이동이라도 시킬 수 있다면…

 

조만간 이사를 가야 하는 처지이지만 아직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못했어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카에 대한 계획이 없는 상태예요. 더 구체적으로는 모카를 캐리어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어요. 다행인 건 지난 4년간의 끈질긴 노력 끝에 모카를 안을 수 있게 되었다는 거예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안아서 딱 5초 동안 2~3미터 정도 옮길 수 있는 게 전부예요. 여전히 발버둥이 심하고 안긴 지 5초만 지나면 급격하게 격렬해지기 때문에 피투성이 상처를 면하려면 얼른 내려놓을 수밖에 없어요. 캐리어에 넣기엔 어림도 없는 상황이죠. 그래도 막연한 희망으로 한 번의 이사 정도는, 방법도 대책도 없긴 하지만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어요. 약간의 기적이 저를 도와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이사를 여러 번 다닌다는 건 꿈에라도 바라기 힘든 일이에요. 이사에 대한 걱정을 벗어나는 길은 하나밖에 없는 듯해요. 옮겨 다니지 않아도 되는 집에 사는 것. 그리고 이사를 안 다녀도 되는 집을 구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집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젊은 날의 결심 따위는 접고 집을 소유하는 걸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어요. 여전히 그럴 돈일랑은 없지만요.

 

저희 집 다섯 아이 중에서 모카는 건강한 편에 속해요. 아직까지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어요.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해요. 그렇지만 아픈 적이 없다고 해서 걱정까지 없는 건 아니에요. 흔히들 아무 탈 없고 아프지 않을 때는 건강의 소중함을 잘 모른다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모카에 관해서라면 전혀 그렇지 않아요. 늘 날렵하고 기력이 넘치며 (저울에 올려 몸무게를 잴 순 없지만 눈대중, 손대중으로 짐작건대) 몸무게도 일정한 편인데다 (양치를 하거나 입을 벌려 치아나 잇몸의 상태를 볼 순 없지만 구취로 판단컨대) 구강 상태도 양호한 편이에요.(그렇게 믿고 싶은 건지도 모르지만요…) 화장실에 뭉쳐 있는 소변의 크기나 물을 마시는 빈도 등을 유심히 살펴보지만 방광염이나 신장 질환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여요. 하지만 모카를 볼 때면 ‘갑자기 아프면 어떡하지?’란 생각이 저도 모르게 떠오르곤 해요. 건강한 모카를 보며 건강의 소중함에 대해 매일 감사하며 살고 있어요. 그런데 그 감사는 한편으로 걱정의 다른 이름이에요. 정기적인 검진을 받을 수 없어 병에 걸려도 조기에 발견할 수 없고 만약 아픈 증상을 보인다고 해도 (모카가 기력을 잃어 쓰러지기 전에는) 붙잡아서 병원에 데려갈 수가 없을 거란 생각은 어쩌면 불안이나 공포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걸 매일 견디며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아요.

 

걱정은 내가 할 테니 인상 펴, 모카야 😉

 

(다른 아이들에 대한 걱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모카에 대해 유독 더하게) 늘 걱정을 안고 살아가는 저에게 현재란 미래를 당겨 쓰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이때 현재의 삶이란 끌어당긴 미래에 아무 일도 없음을 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해요. 만약 미래에 어떤 사고가 기다리고 있다면 그 미래를 당겨 쓴 현재가 온전히 존재하지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어 불안한 미래와는 다른 것 같아요. 그보다는 과거를 통해 미래가 예상 가능한 일종의 결정론적 두려움에 가깝지 않을까 해요. 모카에 관해서라면, 저는 미래를 오랫동안 ‘경험’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어요. 중성화수술 예약을 두 번이나 연기하게 만든 과거의 모카는 아마도 그대로 미래의 모카일 거예요.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붙잡는 것도 안는 것도 쉽지 않은 모카를 보고 있으면 미래의 모카를 미리 당겨서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을 때가, 그래서 걱정일 때가 많아요. 저에게 모카는 익숙하고 오래된, 불안한 미래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익숙함과 불안에 균열이 생기길 늘 바라고 있어요. 미래에는 낯선, 이를테면 제 품에 안겨 골골거리다 잠든, 모카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혹시 이미 정해진 미래로 향하게 되더라도 모카가 아픈 일만은 절대 없기를 빌면서요.

 

“모카야, 이리 와보렴.”

 

_

세 번째 에피소드, 마침.

 

P.S. 글의 제목을 ‘오래된 미래’로 정하긴 했지만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와는 내용상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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