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날이 무덥기 전의 일입니다만 나는 이번 여름에 고양이를 잃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매일을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고양이와 시간을 보내세요. 병원에서 느닷없이 그런 조언을 받고 돌아와 보름도 되지 않아 겪은 일입니다. ”

 

<채널예스> 100호 특집에 실린 황정은 선생님의 글*을 읽다가 이 문단에서 더 나가지 못하고 한참을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떻게 견디고 계실까? 보탤 수 있는 말이 없었습니다. 다만 함께했던 그 15년 동안 사람도 고양이도 행복했으리라 믿어볼 따름입니다.

 

* * *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 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 강승원 작사/작곡, 김광석 노래, <서른 즈음에>

 

상황은 다르지만 선물 같은 시간을 산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서른 즈음, 오래전 일입니다. 질풍노도의 이십 대를 지나고 첫 번째 직장 생활을 짧게 마친 뒤였을 거예요. 어느 날 갑자기 사는 게 별거 없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왔습니다. 이제부턴 지루한 반복이겠구나 싶었습니다. 도전 정신이나 성취욕이라도 있어야 일상의 그 나른함을 깨고 삶을 역동적으로 설계해 볼 수 있었을 텐데, 한참 심장이 뜨거울 나이였음에도 그런 에너지는 없었고요. 그렇게 흐물거리다가 또 어느 날 갑자기 결심했습니다. 그래, 그냥 뽀나스라고 생각하자. 남은 인생은 선물인 셈 치지 뭐. 돌이켜보면 참 이상한 결론이었고 약간은 건방진 태도였지만 덕분에 잘 살았습니다. 욕심 없이 적당히, 대충, 무난하게 말이죠.

 

1, 2, 3, 4, 5, 6, +@

 

그러다 지금은 진짜 선물 같은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삼삼, 모카, 치코, 미노, 오즈, 시월 여섯 고양이와 함께 지내는 시간을 선물 말고 어떻게 달리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존재들이 어떻게 내 삶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믿기지 않을 때도 있고, 손수 부지런히 주워 온 결과지요, 육묘가 편안하고 자유롭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꿈인가 싶을 때도 있고, 이불에 오줌을 싸고 새벽에 밥 달라고 괴성을 지르고 거실에서 똥으로 축구를 하고 등등의 사건도 있지만요, 아이들의 새근대는 숨소리를 들으며 이 녀석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것도 인생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싶어 안도하곤 합니다. 뽀나스 같은 인생이란 생각은 진작에 내다 버렸습니다. 선물인 셈치고 대충 살아갈 때가 아니더라고요. 이 선물 같은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 매일 다짐합니다. 오래 살자! 우리 막둥이 시월이보다 오래 살아야지! 요절(아니지만) 금지!

 

* * *

 

“행복과 기쁨의 차이는 중요하다. 행복은 끝없는 햇살처럼 지속적인 상태로 상상되는 데 비해, 기쁨은 번개처럼 번득이는 것이다. 행복은 난관이나 불화를 피하는 질서 잡힌 삶을 요구하는 듯한 데 비해 기쁨은 어디서든 불현듯 나타날 수 있다.”

– 리베카 솔닛, <오웰의 장미>

 

행복은 시간의 누적으로만 인식할 수 있습니다. 당장 지금의 순간이 행복한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만약 행복한 순간이라고 느낀다면 그건 기쁨의 번득임을 행복으로 오인한 것이거나, 오래도록 축적된 행복의 충만감을 지금 발생한 기분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반면에 기쁨은 즉각적입니다. 준비된 순간이라면 기다림 없이 발현됩니다. 번개처럼, 불현듯 말이죠. 기쁨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야 행복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기쁨 없는 행복이 존재할 수 있는지도요.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기쁨보다는 행복이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선물 같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행복보다는 기쁨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선물 같은 시간이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안한 시간과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고양이와(개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함께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선물 같은 시간입니다. ‘이제부터는 매일을 선물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가슴 아픈 상황이 아니더라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나보다 늦게 세상에 왔다가 먼저 소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렇지 않죠. 타고난 수명의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대체로 먼저 세상에 나온 사람부터 차례로 소멸해 가는 순서를 지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늦게 태어난 사람이 먼저 죽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그런 상황을 예외로 규정하고 더 많이 슬퍼하거나 애도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어떨 땐 장례의 절차마저 다른 경우도 있고요. 하지만 내 나이가 평균 수명에서 20을 뺀 것보다 적다면, 세상의 (거의) 모든 고양이는 나보다 늦게 태어나서 먼저 그들의 별로 돌아갑니다.

 

이거 놔라, 마!

 

또한 고양이란 행복을 허용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난관이나 불화를 피하는 질서 잡힌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합니다. 고양이는 관계를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들은 몇 년을 떨어져 있어도 사람을 기억하는 데 반해 고양이는 아마 몇 달이면 그가 누구인지 잊어버릴 게 확실합니다. 사람과 관계 맺는 방식이 달라서 그렇겠지요. 개와 달리 고양이는 독립적이다, 라고 할 때의 그 특징 말입니다. 만약 고양이와 사람 사이에 행복이 있다면 그건 사람 혼자의 것이지 고양이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고양이와 산다는 건, 15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이 아니라 하루를 오천사백일흔다섯 번 반복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거기에 행복이 들어설 자리는 없습니다. 오직 기쁨의 분출만이 있습니다. 고양이란 이처럼 모질게도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삼삼, 모카, 치코, 미노, 오즈, 시월 봉산육묘들도 당연히 지극한 쾌락을 추구하는 녀석들입니다. 또한 각자의 기대 수명대로 산다면 모두 제가 잃어야 할 아이들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미리부터 슬픔에 빠질 겨를이 없습니다. 이 선물 같은 시간을 기쁨으로 채우는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상을 기쁨으로 채우는 일에 특별한 비법이 있는 건 아닙니다. 고양이를 반려하는 모두가 하는 일에 좀 더 부지런하려고 애쓸 뿐입니다. 아이들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조금이라도 더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게 많이 쓰다듬고 많이 부비고 많이 찍히고 많이 밟히고, 자주 눈을 맞추고 자주 놀아주고 자주 이름을 불러주며..

 

할 말이 좀 있는데…

 

참, 쉴 새 없이 아이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게 어쩌면 봉산아랫집의 조금 다른 모습일 수 있겠네요. 시월이 빼고 1번부터 5번까지 모두 말이 많은 편입니다. 대체 누굴 닮았는지, 어디서 배웠는지.. 애들이 야옹, 애옹, 아웅, 먕, 밍, 낑 하며 말을 걸어올 때마다 친절하게 대답을 해줍니다. 왜? 뭐? 밥 먹을래? 화장실 갈래? 졸려? 놀자고? 지금은 대화의 수준이 꽤 높아졌습니다. 치코야 설거지 하자. 오즈야 빨래 걷어야지. 삼삼아 오늘 쓰레기 내놓는 날인데. 모카야, 모카는 열외입니다. 미노야 나가서 담배 좀 사와라. 시월아, 밥(?!). 그러면 애들이 대답은 참 잘하는데.. 아무튼 가끔은 사람 식구 여섯과 함께 사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종종 있습니다. 다들 개성이 뚜렷하고 자기주장도 강해서 알콩달콩 시트콤 같은 재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매 순간 기쁨을 누리며 지낼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속도가 더욱 빠르게 느껴져서

소중한 이들과 언제고 마주할 이별의 순간을 더욱 자주 생각하게 돼요.

그렇기에 함께하는 시간들에 더 집중하고,

애틋한 기억들을 잘 간직하며,

오늘도 그 소중함을 찾는 여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 같아요.”

– Grace J, <호찌냥찌 새로운 이야기 3>, ‘작가의 말’에서

 

선물 같은 시간이란, 다시 말하지만 끝이 정해져 있는 불안한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슬픔의 시간입니다. 선물인데 슬프다니, 어디 항의라도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도 기왕이면 기쁨으로 가득한 슬픔의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고양이와(개와 다른 반려동물들도) 함께하는 모든 이들의 선물 같은 시간에 기쁨이 가득하기를.

글이 멜랑꼴리한 것을 보니, 가을인가 봅니다.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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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코의 코스묘스]

시즌 1, 코스묘스의 오묘한 시작

Episode 1. 한낮의 작고 짙은 온기를 닮은 고양이, 오히루

① 반짝이는 삶   |   ② 막연한 기다림   |   ③ 기쁨의 크기

Episode 2. 잃어버린 시간에 관하여, 김삼삼

④ 각자의 자리   |   ⑤ 굴러온 돌   |   ⑥ 잃어버린 시간

Episode 3. 미래에서 온 카오스, 강모카

⑦ 빈 책상   |   ⑧ 혼돈의 카오스   |   ⑨ 오래된 미래

Episode 4. 이치코,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⑩ 화려한 시절   |   ⑪ 보내는 마음   |   ⑫ 이치코의 코스묘스   

Episode 5. 어느 날  갑자기 – 불쑥, 고미노

⑬ 뜻밖의 여정   |   ⑭ 회색의 미궁   |  ⑮ 약자의 마음 (1)   

Episode 6. D의 의지를 잇는 자, 송오즈

⑯ 소리치는 일   |   ⑰ 총체적 난국   |   ⑱ 엔드게임 and..

시즌 2,

길어질 게 뻔한 변명(1)   |   길어질 게 뻔한 변명(2)   |   길어질게 뻔한 변명(3) 

원래 그런 게 어딨나요? 

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1)   |   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2) 

고양이의 버킷리스트 

떨림이 멈추지 않는 세계에서(1)   |   떨림이 멈추지 않는 세계에서(2) 

시즌 1, Again

• Episode 7. 고양이, 장소, 환대, 시월이

⑲ 1, 2, 3, 4, 5, 6, 북적북적   |   ⑳ 혁명의 선봉   |   ㉑ 앙시앵 레짐    |   ㉒ 우정과 환대      

시즌 2, Again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고양이에게 배운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 고양이 책 #1 총, 균, 쇠 다정한 반복 치코의 일기 선물 같은 시간 마지막 겨울길고양이 돌봄 지침(가이드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