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식 책방: 리브레리아Q 서점원 노트

오후의 소묘 ‘작가노트 시리즈’ 중 한 권으로 예정되어 있는 <가정식 책방: 리브레리아Q 서점원 노트>의 레터 연재를 시작합니다. 리브레리아Q는 경기도 용인에 있는 큐레이션 책방입니다. 노란 불빛이 아름다운 이 서점에 대해서는 ‘소소한 산-책’ 코너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으니 궁금하신 분은 살펴주세요. [소소한 산-책: 용인, 리브레리아Q] 물론 이번 연재글을 통해 알아가셔도 좋을 거예요. “미지의 세계에서 나만의 공간이 되는 경험” 함께해요 :)

[가정식 책방] 서점원Q가 보내는 11월의 편지

글: 정한샘   서울에 나올 일이 많지는 않은데요, 기꺼이 게으른 발걸음을 옮기는 때가 있다면 오랜 친구를 만나 마음에 있는 짐을 모두 털어놓는 날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고요. 지금 저는 친구가 자신을 기다리라고 지정해 준, 친구가 사는 동네에 있는 빵집에 앉아 작은 종이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제 손에는 세 번째 읽는 11월의 책이 들려 있고요.)   이 빵집은 매일 8시에 그날 새벽에 준비한 빵을 진열해 두고 문을 연대요. 8시에 모든 준비를 마치려면 몇 시에 나와서 하루치의 빵을 준비하시는 걸까요. 제빵사는 해가 뜨 ...

[가정식 책방] 작은 일렁임이 파도가 될 때까지

글: 정한샘   어릴 때는 책을 참 좋아했어요. 좋아해서 많이 읽었던 것 같은데, 모르겠어요. 언제부터 안 읽었는지. 고등학교 이후로는 읽은 책이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런데 다시 읽고 싶어요.   처음 책을 사러 와 말하던 ㅅ의 눈빛이 기억난다. 저 말을 건네기 전 꼼꼼하게 서가를 둘러보던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다시 책을 읽겠구나. 좋아하게 되겠구나. 그 세계로 다시 들어갈 책을 추천해 주고 싶었다. ㅅ의 일터와 나의 일터가 열 걸음도 되지 않게 바로 곁하고 있지만 마스크 아래 얼굴은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202 ...

[가정식 책방] 오늘은 대목

글: 정한샘   큰 명절이다.* 퍼지고 있는 바이러스로 인해 민족 대이동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 이미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영화가 나오는 화면을 틀어놓고 스마트폰에 눈을 고정한 채 무료한 연휴를 보내지 않으려나. 그렇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명절 당일만 쉬고 명절 다음날에는 문을 열어야겠다. 요즘은 세배도 원격으로 하고, 세뱃돈도 온라인 송금으로 받는 시대가 아닌가. 그러니 넉넉해진 마음으로 책방에 와서 책을 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 심심한데 책방이나 갈까? 보내주신 용돈으로 책을 사는 게 어떠니? 거 참 책 ...

[가정식 책방] 밤과 밤

글: 정한샘   어렸을 때 엄마는 자주 밤을 삶았다. 이 작업은 주로 해가 진 후 방 안에서 이루어졌다. 삶은 밤의 두꺼운 겉껍질을 까는 건 나와 언니의 몫이었다. 푹 삶은 밤의 겉껍질은 두껍긴 해도 전혀 딱딱하지 않아, 갈라져 있는 뾰족한 끝을 잡고 엄마가 미리 내어둔 칼집 방향을 따라 아래로 죽 당기면 쉽게 벗겨졌다. 벗긴 밤을 엄마 앞에 놓인 나무 도마 위에 쌓아 놓으면 엄마는 작은 칼로 속껍질을 벗겨 양푼에 담았다. 양푼 안에 밤이 수북하게 모이면 숟가락을 세워 밤을 써는 것처럼 부순 후 꾹꾹 눌러 으깨는 작업이 이 ...

[가정식 책방] 기다리는 일

글: 정한샘   출근하기 싫은 날이 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이 아닌, 책이라는 물건을 파는 삶이 나를 온통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아침이 가끔 찾아온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곳으로 들어가 내 정신이 수용할 수 있는 양을 넘어선 책들을 상대하는 매일의 삶이 갑자기 버겁게 느껴지는 날. 그런 날이면 책방을 하겠다는 사람은 말리고 싶다던 수많은 책방 선배님들의 글과 말이 손에 손을 잡고 나를 감싸고 돌며 강강술래를 한다. 정신이 혼미해지도록 빙글빙글 도는 그 원을 간신히 끊고 기어 나와 나의 작고 노란 책방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