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코의 코스묘스] 마지막 겨울

어느 계절을 가장 좋아하시나요? 아무래도 봄을 손에 꼽는 분들이 제일 많으시려나요. 인간이 생명체로서 가진 본성을 고려하면 그게 맞을 것도 같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끝없이 탄생하고 성장하며 번성하기 위해 분투하는 존재니까요. 땅속에 잠들어 있던 씨앗들부터 새로 돋아나는 나뭇잎까지, 식물은 말할 것도 없고 따뜻한 햇살 아래 기지개를 켜고 활동을 시작하는 동물들까지 폭발하듯 뿜어내는 거대한 생명 에너지에 인간이 감응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계절의 변화에 대한 의식의 자각과 판단 이전에 신체가 먼저 반응하는 걸 무슨 수로 막나요. 사계절 ...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첫눈 오던 날

글: 신유진   눈이 왔다. 이른 아침에 하얗게 눈 덮인 동네를 산책하다가 새끼를 낳은 개를 봤다. 빈집에서 어미 개가 새끼 강아지들을 품고 있었다. 유기견 센터에 신고는 하지 않았고(보호소에 데려다줬던 강아지가 안락사 대상이 된 이후로 절대 신고하지 않는다), 대신 어미 개가 누운 곳에 반려견이 먹던 사료를 놓아뒀다. 어미 개는 새끼들을 두고 혼자 나와 밥을 먹었고,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리를 떴다. 한참을 걷다가 뒤돌아보니 그 개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배웅인 듯했다. 오전에 엄마를 만나서 아침에 있었던 일을 ...

[소소한 산-책] 부산, 스테레오북스/비온후책방

글: 이치코   구독 중인 뉴스레터(마이 마인드풀 다이어리)의 글을 읽다가 신기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정부24에서 초중고 시절 생활기록부를 다시 볼 수 있다길래 다운 받아보았다.” 오잉! 정부24 사이트에서 저런 것까지 서비스한다고? 부랴부랴 잊었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찾아서 로그인해 보았습니다. 정말로 ‘유치원 및 초중등학교 학교(유치원) 생활기록부 증명’이라는 이름의 메뉴가 있더군요. 학교 이름을 바로 검색할 수 있길래 (학교 이름 검색하는 데 왜 개인 인증을 요구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졸업한 국민학교(!) 이름을 찾아서 ...

[가정식 책방] 작은 일렁임이 파도가 될 때까지

글: 정한샘 어릴 때는 책을 참 좋아했어요. 좋아해서 많이 읽었던 것 같은데, 모르겠어요. 언제부터 안 읽었는지. 고등학교 이후로는 읽은 책이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런데 다시 읽고 싶어요.   처음 책을 사러 와 말하던 ㅅ의 눈빛이 기억난다. 저 말을 건네기 전 꼼꼼하게 서가를 둘러보던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다시 책을 읽겠구나. 좋아하게 되겠구나. 그 세계로 다시 들어갈 책을 추천해 주고 싶었다. ㅅ의 일터와 나의 일터가 열 걸음도 되지 않게 바로 곁하고 있지만 마스크 아래 얼굴은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2020년 ...

[이치코의 코스묘스] 선물 같은 시간

“이렇게 날이 무덥기 전의 일입니다만 나는 이번 여름에 고양이를 잃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매일을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고양이와 시간을 보내세요. 병원에서 느닷없이 그런 조언을 받고 돌아와 보름도 되지 않아 겪은 일입니다. ”   <채널예스> 100호 특집에 실린 황정은 선생님의 글*을 읽다가 이 문단에서 더 나가지 못하고 한참을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떻게 견디고 계실까? 보탤 수 있는 말이 없었습니다. 다만 함께했던 그 15년 동안 사람도 고양이도 행복했으리라 믿어볼 따름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