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책장으로부터

신유진 작가님의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연재를 시작합니다. 엄마의 책 속에서 만난 언어, “가장 연약한 순간에 가장 용감하게 나아갔던 사람에게 배운 언어”에서 시작된, 혹은 그곳으로 향하는 “하나밖에 없는 오솔길”을 걸어요. 이번 글은 그 길을 향해 문을 여는 서막이고요. 뒤따라 걷다 보면 또 다른 제 건넌방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런 희망 품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첫눈 오던 날

글: 신유진   눈이 왔다. 이른 아침에 하얗게 눈 덮인 동네를 산책하다가 새끼를 낳은 개를 봤다. 빈집에서 어미 개가 새끼 강아지들을 품고 있었다. 유기견 센터에 신고는 하지 않았고(보호소에 데려다줬던 강아지가 안락사 대상이 된 이후로 절대 신고하지 않는다), 대신 어미 개가 누운 곳에 반려견이 먹던 사료를 놓아뒀다. 어미 개는 새끼들을 두고 혼자 나와 밥을 먹었고,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리를 떴다. 한참을 걷다가 뒤돌아보니 그 개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배웅인 듯했다. 오전에 엄마를 만나서 아침에 있었던 일을 ...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나와 엄마와 마릴린 먼로 2

글: 신유진   금발머리 여자가 수술대 위에 누워 있다. 세상에 나오지 못한 아기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자의 모든 결핍에는 아버지의 부재가, 불행의 근원에는 임신중지 수술이 있다. 여자는 현실이 컷 없는 영화 같다고 느낀다. 금발의 여자는 두 개의 이름, 노마 진과 마릴린 먼로 사이에서 갈등한다. 조이스 캐럴 오츠의 《블론드》를 각색한 영화, 〈블론드〉의 이야기이다.   그 영화를 보는 내내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불 꺼진 강당. 하얀 커튼 뒤에서 손전등의 불빛이 움직였다. 손전등을 쥐고 있었던 것은 폴란드 여자애였다. 나는 마리 ...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나와 엄마와 마릴린 먼로 1

글: 신유진   나는 ‘여성의 텍스트’라 불리는 글들을 편애한다. 그런 글들은 기억이나 장소, 몸이나 질병, 하다못해 개를 이야기할 때도 언제나 여성의 이야기로 되돌아온다. 내가 여성이기에 동병상련의 입장으로 그런 책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서사가 더 특별하다 여겨서도 아니다. 그저 그런 이야기들이 글로 쓰이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할 뿐. 말로 다 하지 못한 것, 말에 갇힐 수 있는 것, 그런 것이 글이 되지 않으면 무엇이 글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내가 아는 모든 여자는 자기만의 서사를 썼다. 밥 짓는 동안에, 어른 ...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맨발로 걷는다

글: 신유진   엄마는 사계절 내내 맨발로 다닌다. 겨울에도 양말 신은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엄마의 발은 햇빛과 흙과 굳은살로 누런빛이 돈다. 그 발로 여름에는 슬리퍼를 겨울에는 운동화를 구겨 신고, 집에서 시장을 통과해 몇십 년째 일하는 가게까지 딱 5분 거리를 걷는다. 사람의 일평생이 그 5분 거리에 다 있는 것처럼. 느리고 무거운 걸음으로. 시장에 있는 가게가 엄마의 일터가 된 것은 아빠의 사업 실패 때문이었다. 엄마는 그곳에서 옷, 액세서리, 화장품을 팔았고, 말과 시간을 팔아서 가족을 부양하며 아빠가 잃은 것을 ...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갈망 혹은 비명

글: 신유진   “제가 원하는 것은 생명이 유동하는 것, 매일매일 변하는 것, 어떤 새로운 것, 습관적인 것인데! 미칠 듯한 순간, 세계와 자아가 합일되는 느낌을 주는 찰나, 충만한 가득 찬 순간 등 손에 영원히 안 잡히는 것들이 나의 갈망의 대상입니다.”*   전혜린의 편지다. 엄마의 책에도 내 책에도 이 구절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우리는 각자의 장소에서 전혜린을 읽었다. 엄마는 건넌방 이불 속에서, 나는 파리의 다락방에서. 엄마가 전혜린의 책,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완독한 것은 1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