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식 책방]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글: 정한샘   어두운 공간을 목소리가 채운다. 단어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꽂혀 와 숨을 쉴 타이밍을 자꾸 놓친다. 이어지는 첼로와 기타의 선율에 참았던 숨을 뱉는다. 낭독과 클래식 음악이 함께 하는 이 시간을 위해 책방 문을 닫자마자 고속도로를 달렸다. 낭독이 이루어질 책은 포르투갈의 극작가이자 연극 연출가인 티아구 호드리게스가 쓴 희곡집 《소프루》이고 그에 맞는 음악을 첼로와 클래식 기타가 연주해 줄 것이었다. 《소프루》는 무대 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배우에게 대사와 동선을 알려주는 ‘프롬프터’를 주인공으로 이끌어낸 희곡집이다. ...

[이치코의 코스묘스] 마지막 겨울

어느 계절을 가장 좋아하시나요? 아무래도 봄을 손에 꼽는 분들이 제일 많으시려나요. 인간이 생명체로서 가진 본성을 고려하면 그게 맞을 것도 같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끝없이 탄생하고 성장하며 번성하기 위해 분투하는 존재니까요. 땅속에 잠들어 있던 씨앗들부터 새로 돋아나는 나뭇잎까지, 식물은 말할 것도 없고 따뜻한 햇살 아래 기지개를 켜고 활동을 시작하는 동물들까지 폭발하듯 뿜어내는 거대한 생명 에너지에 인간이 감응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계절의 변화에 대한 의식의 자각과 판단 이전에 신체가 먼저 반응하는 걸 무슨 수로 막나요. 사계절 ...

[가정식 책방] 서점원Q가 보내는 11월의 편지

글: 정한샘   서울에 나올 일이 많지는 않은데요, 기꺼이 게으른 발걸음을 옮기는 때가 있다면 오랜 친구를 만나 마음에 있는 짐을 모두 털어놓는 날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고요. 지금 저는 친구가 자신을 기다리라고 지정해 준, 친구가 사는 동네에 있는 빵집에 앉아 작은 종이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제 손에는 세 번째 읽는 11월의 책이 들려 있고요.)   이 빵집은 매일 8시에 그날 새벽에 준비한 빵을 진열해 두고 문을 연대요. 8시에 모든 준비를 마치려면 몇 시에 나와서 하루치의 빵을 준비하시는 걸까요. 제빵사는 해가 뜨 ...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첫눈 오던 날

글: 신유진   눈이 왔다. 이른 아침에 하얗게 눈 덮인 동네를 산책하다가 새끼를 낳은 개를 봤다. 빈집에서 어미 개가 새끼 강아지들을 품고 있었다. 유기견 센터에 신고는 하지 않았고(보호소에 데려다줬던 강아지가 안락사 대상이 된 이후로 절대 신고하지 않는다), 대신 어미 개가 누운 곳에 반려견이 먹던 사료를 놓아뒀다. 어미 개는 새끼들을 두고 혼자 나와 밥을 먹었고,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리를 떴다. 한참을 걷다가 뒤돌아보니 그 개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배웅인 듯했다. 오전에 엄마를 만나서 아침에 있었던 일을 ...

[소소한 산-책] 부산, 스테레오북스/비온후책방

글: 이치코   구독 중인 뉴스레터(마이 마인드풀 다이어리)의 글을 읽다가 신기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정부24에서 초중고 시절 생활기록부를 다시 볼 수 있다길래 다운 받아보았다.” 오잉! 정부24 사이트에서 저런 것까지 서비스한다고? 부랴부랴 잊었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찾아서 로그인해 보았습니다. 정말로 ‘유치원 및 초중등학교 학교(유치원) 생활기록부 증명’이라는 이름의 메뉴가 있더군요. 학교 이름을 바로 검색할 수 있길래 (학교 이름 검색하는 데 왜 개인 인증을 요구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졸업한 국민학교(!) 이름을 찾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