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지혜의 서재)

 

 

흰 눈으로 덮인 벌판 위에 두 개의 의자가 마주 보고 있다. 의자 뒤로 보이는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 서 있다. 어슴푸레한 하늘 때문에 더욱 한기가 느껴진다. 그곳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한다. 어둡고 추워 힘들지만 들어야 할, 해야 할 말들이 있기에 그 의자에 앉은 두 사람을. 책 표지를 보며 잠시 숨을 고르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 여성의 목소리는 언제나 모든 여성을 위한 목소리가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당신의 말을 내가 들었다>의 저자인 안미선 작가는 그동안 여성들을 인터뷰해왔다. 어떤 이가 이유를 물었다. 왜 여성들을 주로 인터뷰했느냐고. 그녀의 대답은 ‘자연스럽게 여성으로서 여성의 이야기가 궁금했다’였다. 궁금했기에 자연스럽게 질문들이 떠올랐고 대답을 듣기 위해 여성들을 만나온 것이다. 오랜 시간 다양한 상황에 부닥친 여성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가 배운 것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배운 것들을 통해 또 배웠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성과 나는 이렇게 연결되었다.

 

책의 표지에 적힌 대로 이 책은 인터뷰에 관한 이야기이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인터뷰만큼 힘든 일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몇 가지 기술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궁금한 것을 상대로부터 빼내는 것이 아닌 모두를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목소리를 만나기 위한 인터뷰 말이다. 인터뷰의 기술, 말 잘하는 법 같은 실용적인 내용은 없다. 저자는 오로지 잘 듣기 위한, 앞에서 말하는 이의 이야기를 잘 담아내고 전달하기 위한 마음가짐과 자세에 집중한다.

 

노크, 공간, 녹음, 말, 눈물, 침묵, 어긋남, 표정, 청중, 경계, 독백, 진실, 광장 이렇게 총 13장에 그것들이 담겨 있다. 그녀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느낀 감정과 경험들이 진하게 배어 있는 농축액 같다. 인터뷰뿐만 아니라 평소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꼭 필요하고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다른 이의 진심과 만나고 함께하기 위해 어떻게 말 걸고 들어야 하는지, 새로운 질문 앞에서 어떻게 다시 말해야 하는지 이 책이 작은 귀띔이 되면 좋겠다.”

 

가장 첫 번째 장인 ‘노크’에서부터 나는 이 책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터뷰에 앞서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내가 만날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하고 묻는다는 문장을 읽고 이런 사람이 하는 인터뷰라면 내게 어떤 일이 벌어졌다 해도 털어놓을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얼굴도 모르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람인데도 말이다.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는 것부터가 인터뷰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인터뷰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기 전 노크하듯 말이다.

 

인터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여는 것이다. 마음을 열어야 대화를 할 수 있고 그래야 질문과 답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저자가 인터뷰한 사람들은 어려움을 겪었거나 현재 겪고 있는 여성들이었기에 그들의 마음의 벽을 통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때 그녀는 먼저 스스로 질문을 해 자신이 가진 선입견과 고정관념이라는 벽을 확인하고 허물었다. 그런 다음 인터뷰이에게 다가가 노크했다.

 

“인터뷰는 과감한 ‘노크’다. 다른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노크. 그전에 먼저 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응답을 기다리다 마침내 들어와도 된다는 신호를 받고 문을 열듯 책을 본격적으로 읽어나가자 숨겨져 있던 수많은 목소리가 큰 광장에 서 있었다. 저자가 만난 여성들의 목소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분명 다른 상황 속에 놓여 있던 사람들인데, 어쩌면 훨씬 더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통받던 사람들인데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또 어떤 이야기는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 참담해지기도 했다. 공감하기도 하고 몰랐던, 외면했던 사실들을 직면하기도 하면서 나의 숨겨진 말들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 책을 통해 어느새 나도 저자의 인터뷰이가 된 것이다.

 

말하지 못한 채 흘리는 눈물에 담긴 의미까지 읽어내려는, 침묵 속에 갇혀 있는 이야기를 어루만지는 안미선 작가의 마음이 나에게까지 전해진 것일까. 그녀가 말했듯 내 작은 목소리도 모든 여성을 위한 목소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지도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용기가 문득문득 생겨났다. 잠시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원고를 만지작거렸다. 결국 책 표지 속 두 개의 의자 중 하나에 내가 앉게 된 것이다.

 

“진실은 변화를 일으킨다. 진실을 말하고 나면 지금과 똑같은 삶이 이어지지 않는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힘들지만, 한번 발화된 진실은 세상의 또 다른 진실을 건드리고 일깨운다.”

 

 

 

[쓰기살롱 노트]는 오후의 소묘가 진행하는 글쓰기 모임 ‘쓰기살롱’ 멤버들의 글을 소개합니다.

[월간소묘: 레터]에 비정기적으로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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