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우

 

초가을 아침 공기가 콧속으로 차갑게 들어온다. 옷소매를 여미며 종종걸음 빌딩 안으로 들어선다. 화실에 도착해 빈방의 전기등을 켠다.

청색 앞치마 끈을 둘러매며 넓게 빈 교실을 살펴본다. 아직 아무도 없는 빈 공간. 연필을 열 자루 정도 손에 쉬어 스테인리스 통으로 향한다.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무릎을 단단하게 고정하고 팔꿈치를 얹은 채 자세를 잡는다. 20여 분이 흐르자 엇비슷한 형상의 사람들이 화실을 메우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무심하고 날카롭게 흑심을 감싼 나무껍질을 칼질해 나간다. 특유의 흑연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잘려 나간 나무껍질들은 가벼운 새의 깃털처럼 소복하게 내려앉았다. 누군가의 무릎에도 눈치 없이 날아가 붙는다. 이리저리 제멋대로 날리는 탓에 주변 바닥을 빗질로 대강 쓸어준다.

새벽 공기를 품은 오랜 화실 벽들이 사람의 온기로 채워진다.

모두 부지런히 화판을 정렬로 맞추어 흰 도화지에 형태를 잡아간다. 그림을 막 그리기 시작한 사람을 보면 허공을 지휘하듯 손목을 풀어내는 걸 볼 수 있다. 큰 선을 잡기 위한 능숙한 화가들의 부드러운 몸짓이다. 이때부터 소란스럽던 웅성거림은 사라지고 종이 표면과 검은 흑연의 마찰음만이 기묘하게 공간을 채운다. 종이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오롯이 각자의 그림을 계획한다.

모두 조용히, 신중하게 나직한 소리만이 화판을 넘어 들려온다.

 

미술학원의 조명은 특히나 조도가 높다. 그 빛에 반사된 하얀 도화지를 보고 있자니 눈이 부시다. 아직 교실 안을 메운 공기가 차가워 잠시 현기증이 인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림 위에 선을 덧대어 형태를 더 진하게 잡아간다. 앞에 보이는 정물과 비교하니 가늘게 그린 대파가 사실은 통통하다는 걸 깨닫는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쓴 남자 선생님이 학생들의 뒤를 걸으며 세심하게 고칠 점을 짚어준다. 선생님이 다가올수록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인다. 선생님은 나의 뒤로 와서는, 종이에 붙은 지우개 가루를 손수 떼주었다. 창문 밖은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었다. 노란 햇빛을 받은 나무들이 반짝거린다. 사람들의 도란도란한 소리가 1층 너머로 흘러들어 온다.

어느새 집중력이 흩어지고 관념적으로 그림을 바라본다. 분명 어젯밤 설레는 마음으로 잠이 들었는데, 역시 모든 일의 과정은 지루함이 더 크다. 연한 회색빛을 띤 사과. 완성이 되려면 멀었다. 차츰 연필 선을 좁혀가며 부드러운 선을 쌓아간다. 그러다 엉기는 부분이 생기면 지우개의 넓은 면을 사용해 가볍게 털어낸다. 섬세한 부분을 묘사할 땐 지우개의 끄트머리 뾰족한 각을 이용한다.

지우개는 하얀 연필이라고 불린다. 말랑말랑한 지우개의 사용감이 좋아, 그 물건이 닳아버리면 덩달아 나도 안타까워진다. 점심시간이 오기 전에 계획했던 양감을 잡아 두려 한다. 오른손에 속도감이 붙고 큰 그림을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갔다 오기를 반복한다.

 

12시가 채 되기 전 사람들이 기지개를 켜거나 느긋하게 자리를 정리한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소묘 과정을 살핀다. 아쉬운 부분이 커 눈길을 돌린다. 벽에 붙어 있는 인체 수채화를 천천히 구경한다.

추상화보다 사람을 그린 인물화를 좋아한다. 주관적이지만 힘 있고 더 진지해 보인다. 그중 빛이 잘 조율된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림에 대한 열정에 힘을 얻는다.

학원에 하루 종일 엉덩일 붙이고 경쟁을 한다는 건 인생에 있어서 능률적이지 않다. 자신을 생생하고 건강하게 단련시키기보단 홀로서기의 고립감을 배운다. 세상과 호흡하며 예술하는 것과 내 몸 안의 어두운 괴로움을 뿜어내며 창작하는 것은 다르다. 괴로움만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엔 별로 기대하지 않는 편이다.

 

시계를 보니, 하루의 고작 삼 분의 일이 지나간 시간이다. 점심시간이 끝나자 아이들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퀴퀴한 냄새를 빼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고 이어폰을 꽂는다. 신나는 리듬이 돋보이는 최신 유행곡을 튼다.

수업이 시작되었고, 학생들은 자리에 앉아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어떤 아이는 창밖을 보며, 어떤 아이는 초콜릿을 베어 물며, 어떤 아이는 작은 천으로 안경을 닦는다. 방과 후 활동에 늦장을 부리는 어린 애들 같다. 다들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며 공상한다.

선생님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이들이 눈치껏 연필을 손에 쥔다.

 

 

[쓰기살롱 노트]는 오후의 소묘가 진행하는 글쓰기 모임 ‘쓰기살롱’ 멤버들의 글을 소개합니다.

[월간소묘: 레터]에 비정기적으로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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