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

 

<현대시인론> 첫 시간, 교수님은 화이트보드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 동그라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고 생각해봐요.” 그러고는 검은 가장자리의 한쪽을 오돌토돌하게 고쳐 그렸다. “문학은 이렇게 조금씩 동그라미의 가장자리를 넓혀요. 우리는 그런 이야기들을 만날 겁니다.” 바로 그 순간 <현대시인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수업이 되었고 나는 문학과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지금 문학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만난 지 6년째 되던 해 J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 J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원하던 회사에 정직원으로 뽑힌 첫해였다. 오래전부터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가는 통증을 느꼈지만 그것이 어떤 징후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원인이 불분명한 신경 문제이며 완벽한 치료법이 없다고 했다. 고관절에 구멍을 내는 수술을 하면 통증이 약해지길 기대할 수는 있는데 효과를 장담할 순 없다는 말과 함께.

 

아프다는 건 뭘까. 나는 자라면서 아픔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어르신들은 아프다는 걸 눈치채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와 그분들이 없는 명절을 지냈다. 아버지가 심장 수술을 받으셨을 때는 병실에서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이 놀이였다. 어디가 아프고 얼마나 위험한지 설명을 들은 적도 없고 들었다고 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러 날을 입원한 끝에 아버지는 예전의 일상을 되찾았다. 나에게 아픔은 ‘사라지는 것’ 또는 ‘돌아오는 것’이었다.

 

J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리고 수술에 대해 설명할 때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그려지지 않았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돌아오는 것일 거라 생각했다. 그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 얼마나 오래 아픔을 참았을지 짐작하지 못했다. 몸속의 뼈에 구멍을 내기로 결정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고민했는지도. J는 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수술을 해보겠다고 했다. 며칠 뒤 예정대로 수술을 받았고 그 뒤로 얼마간 재활을 했지만 통증은 여전히 남았다.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나는 ‘아프지 않음’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걸 배웠다. ‘아프지 않음’에서 ‘아픔’으로 변하는 것은 스위치를 껐다 켜는 것처럼 간단했다.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는 일이었다. 내일 아침 눈을 뜰 때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 그래서 지금 아프지 않은 내가 J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함께 있을 때 계단을 이용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대중교통에서 빈자리가 보이면 J가 앉고 내가 섰다. 원래도 걸음이 느린 나와 J는 속도가 맞았고 천천히 걸으며 더 많은 것을 관찰했다. 스위치가 어느 쪽을 가리키고 있더라도 나에겐 똑같은 J였다.

 

그러나 주변의 시선은 달랐다. 부모님은 갑자기 전화를 걸어 J의 다리에 대해 물었다. 동생 결혼식 때 눈썰미 좋은 친척들이 관찰해 알려줬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그간의 과정을 간단히 덧붙였다. 설명이 끝난 뒤에도 전화기 너머에서는 아무 말이 들리지 않았다. 대중교통에서 시비를 거는 사람을 만나는 건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J가 노약자석에 앉고 내가 옆에 서 있을 때는 조용히 눈치만 보다가도 J가 혼자 있을 때는 새파랗게 젊은 놈을 훈계하는 사람이 꼭 나타났다. 그럴 때마다 아프다는 걸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아니 증명해야 하는 것이 옳은지 깊은 회의에 빠졌다.

 

그즈음 지하철 임산부석과 관련된 사회적 논쟁이 치열했다. 이미 도입된 임산부석을 없애자는 주장부터 임신을 증명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누군가는 인형을 걸고 다니라고 했고 다른 누군가는 스티커를 붙이라고 했다. 편리한 방법이었다. 나는 몇 주 전 임신 초기에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기절한 친구를 알고 있었다. 눈앞이 핑그르르 돌고 다시 눈을 떠보니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진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고 말하는 친구의 목소리가 너무나 담담해서 내가 친구의 몫까지 놀랐다.

 

나는 지하철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각자의 스티커를 붙이고 있는 상상을 했다. 쳐다만 봐도 알 수 있게. 키가 큰 사람은 키가 크다고, 뚱뚱한 사람은 뚱뚱하다고 스티커를 붙인다. 우울한 사람은 우울하다고, 자주 흥분하는 사람은 감정 조절이 안 된다고 스티커를 붙인다. 알레르기 유무 같은 병력부터 범죄 경력, 출신 지역, 가족 관계, 소득 수준, 신체적 특징, 종교, 정치적 성향까지. 누구나 그 사람을 설명할 특이사항은 있으니까. 편리하다는 건 반드시 기준을 포함하고 있다.

 

지금 어떤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커다란 동그라미를 떠올린다. 화이트보드에 덩그러니 남은 동그라미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나는 지금 동그라미의 가장자리를 우둘투둘하게 만들고 있는가. 혹은 지나치게 매끄럽지는 않은가.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면 질문은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우리는 함께일 수 있는가.

 

 

 

[쓰기살롱 노트]는 오후의 소묘가 진행하는 글쓰기 모임 ‘쓰기살롱’ 멤버들의 글을 소개합니다.

[월간소묘: 레터]에 비정기적으로 연재되고 있습니다.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