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유진

 

집에 있을 때면 떠올리는 글*이 있다. 빨래를 개면서, 음식을 만들면서, 반려인과 반려견이 지나간 흔적을 정리하면서 ‘유토피아는 바로 여자가 짓는 집이고, 여자는 가족 구성원들이 행복 자체보다 행복의 탐색에 더 관심을 갖도록 하려는 시도를 참지 못한다’는 내용을 곱씹는다.

‘유토피아를 짓고 있는가?’

집안일을 할 때는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한다. 내가 아는 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어릴 때, 여자들은 모두 약간의 광기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자들이 가끔 허공에 내뱉었던 혼잣말 때문이다. 나는 집을 무대로 하는 그 독백의 유일한 관객이었고, 그 대사가 외로움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했다. 대화 상대의 부재나 텅 빈 무대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쓸쓸함에서 오는 고독 말이다. 지금은 결코 외로움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한 가지 감정이나 특정 상황을 가리키는 납작한 언어가 아니다. 그 독백의 언어를 가져보니 알 것 같다. 나는 혼잣말을 할 때, 오래전에 누군가 내 안에 들려준 노래를 따라 부르듯이 말한다. 아니, 어쩌면 여럿이 함께 부르고 있는 걸까. 내가 말할 때, 여자들이 함께 말하는 것 같다. 나의 말은 내 말이면서 동시에 여자들의 말이고, 그것은 내 것이지만 완전히 내 것만은 아니라는 관점에서 집으로 유토피아를 지으려는 시도와 닮았다. 어쩌면 나는 여자들에게서 그런 욕망을 학습했을지도 모른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살림살이》에 수록된 〈집〉이라는 글이다. 국내에는 《물질적 삶》으로 번역되었다.

 

스무 살 때, 내게 연애는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상대가 아니라 상대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을 통해 내가 아름답다고 믿는 감정과 장면의 주인공이 되어 살고 싶었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봤던 것, 유행가 가사가 말하는 달콤하고 절절한 그런 것. 그 연애가 잘됐냐고? 그럴 리가 있겠는가. 내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내 것이 아닌 것을 욕망하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 연애가 망한 것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사랑을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스무 살의 헛된 연애의 꿈이 끝나고 서른 살이 넘어서는 ‘집’을 꿈꿨다. 백마 탄 왕자는 아니지만, 훈훈한 외모에 유머러스하며, 예술을 조금 알지만 예술을 하지 않는 남자를 기다렸듯이, 궁궐은 아니지만 집다운 집, 그러니까 깨끗한 주방이 있고, 햇빛이 잘 들고, 방음이 잘 되고, 벌레나 곰팡이 따위가 없는 쾌적한 집을 원했다. 나는 집에 집착했다. 열일곱 번씩이나 이사를 하며 내가 원했던 것은 나의 유토피아를 찾는 것이었다. 나의 집, 그 안에서 내가 탐색하려던 행복은 무엇이었을까.

내게 행복은 언제나 이미지였고, 나는 매번 그 이미지를 언어화하는 데 실패했다. 그 장면들이 언제 어떻게 내게 왔는지, 그것이 정말 내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그 말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집’이 먼저 떠올렸다. 물론 내가 살았던, 살고 있는 집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현실과 거리가 먼 궁전도 아니었다. 그곳은 꿈과 현실 사이에 있었다. 어쩌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은 사이에 있을지도 모른다. 꿈의 매끈한 포장지와 현실의 뾰족한 가시를 거두고 틈을 파고들면, 거기에 내가 찾는 게 있지 않을까. 틈을 내야 한다. 균열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심과 질문이 필요하다.

행복, 그게 뭘까?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행복이라는 말, 그것이 내 안에 박히게 된 계기는 뭐였을까? 행복을 외쳐대던 티브이 속 광고였을까?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집어 들었던 책이었을까? 아니, 시작은 엄마였다. 계절마다 집의 인테리어를 바꾸던 엄마. 깨끗한 커튼, 이불, 카펫, 수시로 위치가 바뀌던 가구들. 행복을 탐색하는 사람처럼 집을 꾸몄던 엄마는 내게 물었다.

“어때? 좋아? 우리 딸, 행복하니?”

 

‘행복이 뭐예요?’

나는 나눌 수 없는 비밀처럼 늘 혼잣말로 행복을 물었고, 엄마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던 어릴 적 내 작은 방에 돌아가는 상상을 하면 나의 혼잣말에 엄마의 목소리가 더해졌다.

‘행복하니?’

 

행복한가? 그런 것을 묻는 순간 내 행복은 이미 모두 과거가 되어버리고, 현재의 나는 그 과거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아서 나는 줄곧 그 말에 인색했다. 그런데 요즘 내가 엄마처럼 행복을 말한다. 계절에 따라 인테리어를 소소하게 바꾸고,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맛있는 음식을 해놓고 반려인과 반려견에게 묻는다.

“행복해?”

반려인은 집안의 무엇이 바뀌었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고개를 끄덕인다. 습관성 긍정이다. 강아지는 배를 내놓으며 눕는다. 습관성 애교다. 이 모든 것은 습관성 행복 탐색일까. 아니면 내가 마침내 행복을 포착해 낸 것일까. 또 행복을 묻는다. 묻는 순간 사라질 것 같은 행복을 염려하며, 행복을 붙드는 데 부족한 게 무엇인지 주위를 살피며. 그러다 잠재적 훼방꾼들과 눈이 마주친다! 계절에 맞지 않는 카펫과 시든 꽃이 거기 있다.

 

“카펫이 더워 보이잖아. 꽃이 시든 것도 몰랐다니.”

혼잣말이다. 듣는 사람은 없다. 반려인이 옆에 있지만 그에게는 들리지 않는 말이다. 그는 계절에 맞게 카펫을 바꾸는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반려인과 나는 집안일을 비교적 공평하게 나누지만, 그에게 그 일들은 어디까지나 나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집안의 평화를 위해 혹은 나를 돕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일 뿐이다. 언젠가 집이란 무엇인지 묻는 내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네가 있는 곳.”

그가 집으로 돌아간다고 말할 때, 그곳은 내가 있는 곳이다. 그에게 집은 내가 있는 곳이자 곧 나이기도 하다. 나는 나에게 돌아오는 그의 회귀본능에 안심하고, 감사하고, 내가 그것에 안도하고 고마워한다는 사실에 놀란다. 아니, 놀란다는 표현이 과연 적확할까?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꿈꾸던 가정을 이룬 사람의 성취감일까, 집이 되어버린 사람의 당혹감일까, 아니면 거부하고 싶었던 삶을 되풀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일까. 복잡한 문제이고, 복잡한 마음이다. 이 모든 것이 정말 나인가, 나다운 것인가. 내가 원한다고 믿는 이상적인 집과 삶, 그것을 정말로 원한 게 나였는지, 오랫동안 수많은 여성이 ‘여성의 삶과 행복’이라고 믿었던, 아니 믿게 했던 어떤 것이 내 안에 남긴 흔적인지 잘 모르겠다.

 

시든 꽃을 치운다. 집에 시든 꽃을 두는 게 아니라고 배웠다. 엄마는 내게 그걸 가르쳤다.

꽃을 버리면서 또 한 번 떠올린 그 〈집〉이라는 글에는 ‘나의 첫 번째 학교(La première école)는 어머니 그 자체였다’라는 문장이 있다. ‘학교’라는 단어는 배움, 수업으로 바꿔도 의미가 같을 것이나, 나는 직역 그대로 ‘학교’로 읽고 싶다. 엄마는 내게 하나의 장소니까. 반려인이 나를 집으로 생각할 때, 나는 엄마를 생각한다. 내가 돌아갈 수 있는 내 배움의 장소. 나는 그곳으로 돌아가 내가 반복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묻는다. 엄마, 여자, 한계, 사랑, 장소, 나… 아직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 너무 많다.

 

비올레타 로피스, <고양이와 결혼한 쥐에게 일어난 일> 메이킹 노트에서

 

〈집〉이라는 글에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작가는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여자가 해야 할 일을 전쟁에 비유하고, 여자가 보내는 하루가 힘든 이유는 늘 남들의 시간표에 맞춰 자기 시간표를 짜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입히고, 그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을 맞이하고, 식구들의 식사를 챙기고. 이 모든 것을 노동이 아니라 삶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여자들의 이야기. 그 여자들 중에 엄마가 있다. 엄마의 모든 시간은 타인의 시간에 맞춰져 있었다. 엄마는 여전히 시간을 아이들이 자라난 시간과 아이들이 떠나버린 시간으로 구분한다. 여자들은 타인에 맞춰 사는 동안 자신만의 절망을 분비한다고 한다. 〈집〉이라는 글을 쓴 여성은 여자들은 매일 절망하며 자신의 왕국을 잃는다고 했다. 나는 절망하는 여자들에게서 그 글을 쓴 여성과 엄마를 본다. 그 여자들과 글을 쓴 여성과 엄마가 다르지 않음을 안다. 지금의 나와 엄마가 다르지 않다는 것도.

 

‘무엇을 잃고 있는가?’

 

이 질문은 누구의 것일까? 엄마일까? 그 여자들일까? 아니면 정말 나만의 혼잣말일까? 복잡한 질문이고 복잡한 마음이다. 나는 주방을 점령할 때, 반려인의 옷에 묻은 얼룩이 견딜 수 없을 때, 이불과 수건을 깨끗하게 빨고 기뻐할 때, 이 모든 일을 오래 해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할 때, 내가 집이 된 것만 같다. 수많은 여자가 살고 간 집. 닦고, 쓸고, 꾸미고 어루만지며, 여자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동시에 여자 자신은 사라지고 집만 남는 게 아닐지 두려워하던 그 장소 말이다. 나는 장소가 되어 자부심과 수치심, 환희와 분노, 희망과 절망을 고루 느끼며 묻는다. 나는 무엇을 잃고 있는 걸까? 여자들이 잃었던 그것을 나도 잃고 있을까? 내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집일까? 그렇다면 그 집은 누굴 위한 장소일까? 복잡한 질문이고 복잡한 마음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가 있다. 이 복잡함 속에 진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이 질문만큼은 온전히 내 것이라는 것.

엄마처럼 내가 하나의 장소가 되는 것을 ‘여자는 다 그래’ 또는 ‘여자라고 그래서는 안 돼’라는 태도로 가만히 수용하거나 무작정 거부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알고 싶을 뿐이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나의 욕망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어떤 여성들의 목소리를, 욕망을 안고 있는지. 내 안에 새겨진 여자들의 역사를 헤아리고 싶은 것이다. 오직 질문으로. 답이 없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질문으로. 나를 만드는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임을 알기에. 오직 질문만이 나의 목소리이고, 나는 그 질문을 엄마와 글 속의 여자들과 〈집〉이라는 글을 쓴 여자에게서 찾는다.
여자들은 내게 질문의 근원이고 여자인 나는 질문하며 산다. 아니 질문을 산다. 질문을 살면 답이 된다는 것을 아니까. 답이 된 내 삶이 또 다른 여자의 질문이 되리라는 것을 믿으니까.

 

─✲─

 

신유진

엄마의 책장 앞을 서성이고, 파리의 오래된 극장을 돌아다니며 언어를 배우고 이야기를 꿈꿨다. 산문집 <창문 너머 어렴풋이>, <몽카페>, <열다섯 번의 낮>과 <열다섯 번의 밤>을 썼고, 아니 에르노의 <세월>, <진정한 장소>를 비롯한 여러 책을 옮겼다.

@malletshin_

 

 

 

 

‘엄마의 책장으로부터’는 2023년 6월부터 2024년 6월까지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었습니다. 더 풍성한 이야기들을 모으고 엮어 멀지 않은 때 책으로 찾아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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