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틴 소설을 사랑한 여자아이가 중요한 무언가를 잊어버린, 잃어버린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글: 신유진

 

여름 저녁에는 엄마랑 자두 한 알을 손에 쥐고 서점까지 걸었다. 동네서점은 사계절 내내 자주 다니던 곳이었는데, 그 길을 생각하면 유독 여름 풍경이 떠오른다. 일몰 때문이었을까.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면 온통 오렌지빛이었다. 그걸 보면 엄마는 마음이 이상하다고 했다. 마음이 이상한 것은 기쁘다는 뜻일까, 슬프다는 뜻일까. 좋다는 걸까, 싫다는 걸까. 나는 엄마가 자주 쓰던 그 말을 완벽하게 해독하기 위해 애썼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언어를 공부할수록 내가 모든 언어를 근사치로 이해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라, 지역, 사람, 동물, 모든 장소와 생물마다 저마다의 언어가 있고, 우리는 자신의 경험과 자기만의 언어를 토대로 짐작하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게 전부인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보면 모두가 서로의 이방인일 테고.

 

나의 첫 번째 이방인, 엄마. 나는 늘 엄마의 말과 속이 궁금했다. 나를 사랑한다는데 불행한 것 같았고, 사랑과 불행이 어떻게 함께 있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번역자가 되고 싶었다. 사랑하는 이의 말을 내 것으로 옮겨보고 싶었고, 잦은 실패에 절망했지만, 나와 그의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난 후에는 관계 속에서 내가 느꼈던 실망이나 절망이 더는 불행이 되지 않았다. 그게 엄마와 나의 다른 점이지 않았을까. 엄마는 모두 같은 언어를 쓴다고 믿었고,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되지 않음을 힘들어했다. 무엇보다 이해받고 싶었을 것이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잘 보이는 곳에 펼쳐져 있던 일기장도, 서점에 갈 때마다 엄마가 들려줬던 책 이야기도 모두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엄마가 들려줬던 책 이야기 중에 제일 재미있었던 것은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이었다. 두 작가가 자매라는 사실도 신기했고, 특히 《폭풍의 언덕》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심장이 쿵쾅거렸다. 요크셔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풍경이 눈앞에 그려졌고, 황량한 들판에 바람 부는 언덕에서 말하는 ‘사랑’이 내가 아는 사랑과 너무도 달라서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사납지만 순수한 맹수 같다고 해야 할까. 나는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내 안에 언덕을 그리고 그곳에 올랐다. 거기서는 이야기가 폭풍처럼 달려왔고 그러면 엄마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래서 서점에 가는 길이 좋았을까. 읽어본 적 없는 책 이야기를 들으면 내 앞에 엄청난 세상이 펼쳐질 것만 같아서. 하지만 제일 좋았던 건 역시 엄마 손을 잡고 걷는 일이었다. 그 손을 잡으면 어떤 언덕을 올라도 안전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안전하다는 감각이 좋았고, 오랫동안 그 느낌을 찾아 헤맸다. 누군가의 손을 잡았고, 놓았고, 몇 번의 실패를 겪고 나니 그 감각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지금 내게는 하나씩 쌓아 올리는 행복에 가까운 감정이 있다. 말하자면 반려견의 목줄을 잡고 있을 때, 나는 그 목줄이 언젠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그 줄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행복하다. 불안할수록 내 악력이 강해지는 것도 좋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엄마 역시 불행했던 게 아니라 불안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추측일 뿐이고, 진실은 그 시절의 엄마만이 알고 있겠지만. 엄마의 과거, 지나간 물음을 붙잡고 있는 것은 내 방식의 돌봄이다. 나는 과거의 엄마에게 잘해주고 싶다. 그건 나의 근원지를 돌보는 일이니까. 과거의 엄마에게 대답해 주고 싶다. 그건 지금 내게 필요한 질문을 찾는 일이니까.

 

“나는 뭘까?”

어느 날 서점에서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물었다.

“엄마는 엄마, 우리 엄마.”

나는 대답했다.

엄마는 내 대답에 웃었던 것 같다.

언젠가 내가 물은 적도 있었다.

“엄마, 나는 뭘까?”

“그 답을 찾아가는 게 인생이지. 살다 보면 알지 않겠니?”

엄마가 말했다.

 

그때도 엄마는 엄마가 무엇인지 잘 몰랐던 것 같다. 엄마가 알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 있으리라 믿었던 것 같다. 아니면 그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지도. 그런 건 없다고 말한다면 실망할까. 그래도 내가 찾은 답을 말해주고 싶다. 20년 전 여자아이의 손을 꼭 쥐고 서점을 향해 걷던 여자에게, 자기 안에 중요한 무언가를 잊은 것 같다고, 잃어버린 것 같다고 일기장에 썼던 엄마에게 말이다.

 

이야기는 우리가 자주 갔던 그 서점에서 산 하이틴 로맨스 소설로 시작된다. 물론 내가 한때 하이틴 소설 마니아였다는 사실도 고백도 해야겠지. 제목을 ‘하이틴 소설을 사랑한 여자아이’라고 붙인다면 누군가는 진부하다고 생각할까? 그렇다면 되묻고 싶다. 무엇이 진부한가? 하이틴 소설, 여자아이, 사랑. 이 세 단어에서 진부한 것을 발견하는 사람은 아직 하이틴 소설을, 여자아이를, 사랑을 모르는 것이다. 아니, 잊은 것이다. 잃은 것이다.

 

*

 

제목: <하이틴 소설을 사랑한 여자아이가 중요한 무언가를 잊어버린, 잃어버린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좋아했던 소설의 몇몇 장면들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줄거리는 잊었어도 어떤 장면들의 디테일한 묘사는 기억하고 있어요. 사실 내가 좋아했던 것은 줄거리가 아니라 디테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연애 이야기에도 디테일이 더해지면 모든 게 달라지거든요. 비버리 클리어리의 《오렌지향은 바람을 타고》가 그래요. 정말이지 그 책은 디테일이 전부였습니다. 일 년 내내 비가 오는 오리건주에 살던 10대 여자아이, 셸리가 일 년 동안 캘리포니아의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일어난 일을 다룬 그 하이틴 로맨스 소설은 자칫 진부할 수 있는 로맨스를 어디선가 오렌지 향기가 날 것 같은 디테일한 표현들로 구원합니다. 나는 그 소설을 약 30년 전에 읽었고, 사실 주인공, 셸리가 어떻게 사랑을 만나고 헤어졌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내 사랑은 오렌지와 캘리포니아와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주인공 셸리의 첫사랑, 필립의 코입니다. 정확히는 그 문장을 기억하는 것이지요. 캘리포니아 태양에 그을린 필립의 코와 처음으로 필립의 코를 가까이 바라보게 된 셸리와 오렌지 향기로 뒤덮인 밤공기를요. 소설의 그 사소한 장면이 내 삶과 가치관에 어떤 도움을 줬는지 묻는다면, 딱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물론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났을 때, 코를 유심히 살펴본 적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중요한 것 하나는 얻었지요. 소중한 순간을 무심히 흘려보내지 않고 붙드는 방법이요. 하이틴 로맨스 소설은 다시 오지 않는 삶의 마법 같은 순간을 내 안의 보물 상자에 담아 간직하는 법을 알려줬습니다. 그 상자를 열면 필립의 코와 오렌지 향기가 나는 밤거리를 상상하던 내가 있습니다. 내가 아는 필립은 필립모리스 담배가 전부이고, 캘리포니아에는 가본 적도 없지만, 어떤 코와 나만의 장소를 그리워합니다. 그걸 온몸으로 감각하던 내가 제일 그립고요. 아마 40년 후에도 그 상자를 열면 뜨거운 태양과 오렌지 향기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건 분명 후회의 반대말이겠지요.

 

지금부터 40년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아니, 상상할 것도 없습니다. 나는 이미 잘 알고 있거든요. 너무 선명해서 그릴 수도 있습니다. 어느 여름일 거예요. 나는 얼굴이 칙칙해 보이는 게 싫어서 색이 환한 옷을 입고 있을 겁니다. 당신이 말했잖아요. 내가 환한 색이 잘 어울린다고. 나는 80세가 되어서도 당신의 말을 떠올리며 환한 옷을 고를 겁니다. 환한 옷. 그건 내 곁에 없을 당신을 향한 환한 그리움이겠지요. 그런 그리움이 찾아오면 뭘 할 수 있겠어요? 샴페인을 마셔야죠. 나는 샴페인을 좋아하고, 80세쯤 되면 꼭 생일이 아니어도 그런 비싼 술을 마셔도 되지 않을까요? 꼭 샴페인이면 좋겠습니다. 혼자 건배해도 즐거울 수 있는 술이니까. 네, 나는 자주 혼자일 거예요. 노년이란 그런 것이잖아요. 그렇지만 나는 그을린 코와 오렌지 향기, 이제 내 곁을 떠난 사랑하는 이들, 그들과 함께 살아온 인생을 위해서 건배할 겁니다. 물론 샴페인은 플뤼트 글라스에 따라 마실 거예요. 내가 말했잖아요, 디테일은 전부라고. 그럼, 이제 건배. 살아온 인생을 위해 건배. 그런데 인생이란 뭘까요? 낮잠 한숨 자다가 일어났는데, 어느새 많은 것들이 떠나고 덩그러니 나만 남겨지는 그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맞아요. 당신이 그랬듯이 내게도 그런 질문들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나는 답을 이미 알고 있어요. 인생이 뭐냐고요? 그건 여름 저녁의 일몰입니다. 당신이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동안 당신의 머리 위에 있던 그 오렌지빛 하늘이요. 당신이 신었던 슬리퍼, 뒤로 묶은 머리카락, 헐렁한 치마, 걸음걸이, 우리 앞에 자동차가 지나갈 때 내 손이 아플 정도로 힘을 줬던 당신의 손, 잘 깨지고 부서지던 당신의 손톱, 나와 똑같은 그 손톱. 나는 그런 게 인생이라고 말할 겁니다. 매일 반복했던 것, 자주 함께했던 것, 손에 쥐었던 것, 걸었던 곳, 나눴던 말, 그런 것이요. 어때요? 당신이 지금 품고 있는 질문에 작은 힌트가 되었나요?

 

에두아르 뷔야르, <해 질 녘 바다, 해안의 여자들>, 1914.

 

당신이 뭐냐고요?

나도 가끔 같은 질문을 합니다.

우리는 뭘까요?

언젠가 당신은 내게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선물했어요. 아마도 우리 안에 있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찾고 싶었던 거겠죠. 당신은 하나의 존재 안에 대립이자 보완되는 두 존재가 있고, 둘 중 누구를 깨워 사느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당신이 내게 이렇게 물었거든요.

“너는 누구야? 너는 누가 되고 싶어? 나르치스야? 골드문트야?”

그때 나는 골드문트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유로워 보였거든요. 자유가 뭔지 모르면서. 지금 누군가 내게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내 대답은 조금 다를 겁니다.

 

내가 누구냐고요? 나는 서점에 가는 길에 《폭풍의 언덕》과 《제인 에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이야기하며 노을을 보고 자두를 먹었던 사람입니다. 한때 당신의 손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 그게 나예요. 여름 저녁, 노을, 자두, 서점. 당신의 손, 당신과 내가 나눴던 모든 것이요.

 

내가 인생의 마지막 건배를 한다면, 그때 내게 남은 건 브론테 자매나 헤세의 문장이 아닌 당신의 말일 겁니다. ‘엄마가’로 시작하는 말, 그 모든 말이요.

당신, 지금 집으로 돌아가고 있나요?

손에는 어떤 책을 들고 있나요? 그 책을 읽고 여자아이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 건가요? 그런데 어쩌죠? 여자아이의 마음은 이미 오렌지 향기가 날리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것 같은데. 그것도 모르는 당신은 방금 “하늘이 오렌지빛이다”라고 말했어요. 정말인가요? 지금 하늘이 오렌지빛인가요? 여자아이의 손은 얼마나 작나요? 그러고 보니 여자아이와 당신은 손톱이 똑같아요. 작은 것도 놓치지 말고 자세히 봐야 해요. 당신이 말했잖아요. 디테일은 모든 것이라고. 정말 그래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게 전부예요.

 

*

 

하이틴 로맨스를 사랑한 여자아이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물론 완전한 결말은 아니다. 질문은 또다시 찾아올 테니까. 어쩌면 나의 언어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물음과 이야기들이 나를 좌절시킬지도 모르지만, 그런 날에는 서점에 들러볼 생각이다. 읽고 쓰는 것이 마냥 좋은 어떤 여자아이들이 또 거기서 어떤 놀라운 세계를 짓고 있지 않겠는가. 그 애들이 써줄 이야기를 기다린다. 그 애들은 내가 가닿지 못한 곳을 갈 수 있겠지. 내가 놓친 말들을 옮길 수 있겠지. 그건 아마도 새로운 여성 서사일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처음으로 느낀다. 그래, 좋은 것이구나. 이건 정말 샴페인을 터뜨릴 일이다.

 

─✲─

 

신유진

엄마의 책장 앞을 서성이고, 파리의 오래된 극장을 돌아다니며 언어를 배우고 이야기를 꿈꿨다. 산문집 <창문 너머 어렴풋이>, <몽카페>, <열다섯 번의 낮>과 <열다섯 번의 밤>을 썼고, 아니 에르노의 <세월>, <진정한 장소>를 비롯한 여러 책을 옮겼다.

@malletshin_

 

 

 

 

‘엄마의 책장으로부터’는 2023년 6월부터 2024년 6월까지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었습니다. 더 풍성한 이야기들을 모으고 엮어 멀지 않은 때 책으로 찾아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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