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소묘: 레터] 시월의 편지 ‘일의 슬픔과 기쁨’

2022-03-11T16:38:40+09:002021-11-6|

  일이 의미 있게 느껴지는 건 언제일까? 우리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자아내거나 고통을 줄여줄 때가 아닐까? — 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   저 유명한 책의 제목은 ‘슬픔’으로 끝납니다. 알랭 드 보통은 일이 충족감을 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다만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준다고 썼습니다. ‘가없는 불안’ 대신 ‘품위 있는 피로’를 안겨줄 것이라고요 ...

[월간소묘: 레터] 9월의 편지 ‘이름하는 일’

2022-03-11T16:39:00+09:002021-10-1|

  “이름을 지어줘.” 어느 날 메시지로 아기 사진이 날아왔습니다. 친구가 아이를 낳은 것이에요. 아가 얼굴을 보자 이 존재는 뭐라고 불러줘야 하는지 궁금해졌어요. 이름 뭐야? 물었더니 이름을 지어달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저는 노트를 펼쳐 친구가 말한 돌림자 하나를 적어놓고 며칠 꼬박 떠오르는 온갖 글자를 앞뒤로 붙여보았어요. 이름하는 일은 어쩐지 영혼에 관여하는 일 같습니다. 제가 낳은 것도 아닌 ...

[월간소묘: 레터] 8월의 편지 ‘파랑’

2022-03-11T16:52:44+09:002021-09-4|

  한 해 전 팔월에는 빨강을 전했지요.(빨강의 편지) 빨강으로 태어난 소년 게리온의 이야기 <빨강의 자서전>과 함께요. 게리온의 빨강 날개는 아름답고 경이로운 괴물성을 품고 있었습니다. 계절을 돌아 올여름의 복판에는 파랑을 전해요. ‘파랗다’의 어원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풀’에서 유래한 ‘프르다’가 변형되었다는 설과 ‘바다’에서 비롯되어 ‘바다하다’가 ‘파라하다’로 변형되었다 ...

[월간소묘: 레터] 7월의 편지 ‘여름의 클리셰’

2022-03-11T16:39:30+09:002021-07-29|

  여름에는 어째서 여름 이야기만 하게 되는지. 여름 아닌 것들을 도무지 떠올리기 어렵고 그럴수록 여름 안이라는 것만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럴 바에야 여름 안에서 좋은 것들을 늘려가는 수밖에 없어요. 폭설로 빙수를 만들고, 온갖 여름을 설탕에 절여 유리병에 담고, 땡볕의 바다에 눕고 구르고, 뒤집힌 양산으로 폭우를 헤치고, 콩국수와 옥수수로 세 끼를 채우고, 수영복을 입고 춤을 추고, 수박을 수영장 ...

[월간소묘: 레터] 유월의 편지 ‘비밀의 무늬’

2022-03-11T16:40:10+09:002021-07-3|

  -비밀 있어요? 조카가 귀엣말로 속삭입니다. '아니, 없는데. 도연인 있니?' 물었더니 많다고 하지요. -비밀 많은 사람이 작가가 되는 거래. 작가가 꿈인 조카가 눈을 반짝여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면서 누구에게나 말하는 거야, 비밀을. 응? 조카가 갸우뚱해요. 아이의 엄마가 덧붙였어요. -도연이도 그러잖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하면서 엄마랑 친구들한테 얘기하는 거. 슬며시 웃으며 끄덕입니 ...

[월간소묘: 레터] 5월의 편지 ‘창으로’

2022-03-11T16:47:36+09:002021-06-4|

  내게는 꼭 한 번 그런 저녁이 찾아온다. 열어둔 창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올 때나 거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고개를 돌릴 때, 문득 ‘아,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 왔구나’ 깨닫는 그해의 첫 저녁이. -김신지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게 취미>   종일 창을 열어두어도 좋은 달이 되었어요. 오월은 언제나 창으로 옵니다. 부드러운 구름, 잎이 초록으로 무성해진 감나무와 호두나무, 다디 ...

[월간소묘: 레터] 4월의 편지 ‘Now or Never’

2022-03-11T16:47:57+09:002021-04-28|

  “나를 위해 꽃 한 다발 사는 일이에요.”   좀처럼 잊히지 않는 말들이 있습니다. 이달의 책 저자인 이경신 선생님과 함께한 ‘좋은 삶을 위한 죽음 준비 워크숍’에서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이야기하던 시간, 70대 여성 분이 남긴 말이에요. 그 말을 듣자마자 모두가 탄식을 내뱉으며, 지금! 지금 하실 수 있어요, 돌아가는 길에 꼭 사세요, 한 마음으로 응원하던 것까지 오롯이 기억하고 있습니 ...

[월간소묘: 레터] 3월의 편지 ‘Little Forest’

2022-03-11T16:48:15+09:002021-03-29|

  “모든 온기가 있는 생물은 다 의지가 되는 법이야.” -영화 <리틀 포레스트>(한국판)   3년 전 이맘때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개봉했어요. 그리고 주연인 김태리 배우가 3월 1일 뉴스룸에 출연해, 당신의 리틀 포레스트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고양이들(반려묘)’이라고 대답했죠. 저는 그 순간 환호하며 영상을 사진으로 찍고 박수를 쳤답니다.(‘오후의 소묘’의 소묘가 ...

[월간소묘: 레터] 2월의 편지 ‘걸음걸음’

2022-03-11T16:48:33+09:002021-02-28|

  “걸어가는 사람이 바늘이고 걸어가는 길이 실이라면, 걷는 일은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입니다. 보행은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입니다.” -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몸은 녹슨 기계 같고 바깥은 산화를 촉진하는 위협적 환경같이 느껴지는 때, 찢어진 것은 무엇일까. 갈수록 묵직하고 크게 다가오는 물음을 앞에 두고 작은 것들을 생각합니다. 나의 한 걸음, 한 걸음을요. &nb ...

[월간소묘: 레터] 2021년 첫 편지 ‘얼굴들’

2022-03-11T16:49:12+09:002021-01-25|

  연말연시의 어느 오후,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한 중년 남성이 앉았습니다. 역을 출발하자마자 울리는 전화벨 소리. 그가 전화를 받아요. 큰 목소리, 경상도 억양. 자리를 옮길까 고민하는 사이 그의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오랜마➚이다. 어어, 집에 가는 길~ 오늘 일찍 마➚칬제. 아이고, 당분간 내리가기 어렵지 않겠➚나. 거도 난리났대➚. 니도 단디해라. 내? 내 그렇지 뭐. 가방 맨드는 거 계속하고 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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