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사람의 마음에게 주는 음식이다. 밥보다 차를 더 즐기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마음이 발달한 사람이다.” _김소연 <마음사전>

 

언젠가(라고 하기엔 십수 년 전이군요…) 친구에게서 이 구절을 찍은 사진을 받았습니다. ‘네 생각이 나서’라는 말과 함께. 좋아하는 책이어서 더 반가웠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네요. 마음이 발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차를 즐기는 편인 것은 확실하고- 그러니 작가노트 시리즈 1, 2권이 나란히 차 이야기를 담게 되었겠죠? :)

 

차가 왜 좋을까. 차 도구를 만드는 도예가의 작업노트인 <차를 담는 시간>(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오늘 출간 소식을 전했어야 하지만 별일이 생겼기 때문에… 일주일 더 기다려주시길!)에서 김유미 작가는 이렇게 씁니다.

 

차를 마시는 것이 무엇이 좋으냐 묻는다면 오감을 깨우고 만족시키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곱디고운 다구를 보는 재미, 비 내리는 날 찻물을 따르는 소리나 물이 끓는 소리, 간직하고 싶을 정도로 황홀한 내음, 기분과 계절에 따라 고를 수 있는 다양한 맛의 세계, 따뜻한 찻잔의 감촉이나 까슬한 티매트의 감촉…. 오감을 만족시키는 요소들이 매 순간순간 존재한다.

 

마음은 몰라도 감각은 발달할 수밖에 없는 시간. 다섯 감각 중 저는 어쩐지 청각 쪽으로 몸이 기웁니다. 함께 작업하던 다른 원고의 영향일 텐데요. (책은 두어달에 한 권씩 내고 있지만 작업은 늘 여러 권을 동시에 진행합니다. 원고가 책이 되는 데 짧게는 두 달에서 길게는 반년이 걸리기도 하고, 원고를 처음부터 함께 만들어가는 경우 수년을 들일 때도 있으니까요. 후자는 별개로 하고, 디자인과 교정에 착수한 원고가 편집자 수중에 보통 두셋은 있다고 보면 될 거예요.)

최근에는 <차를 담는 시간>과 함께 회화 작가의 화집인 <조용함을 듣는 일>의 교정지를 번갈아 이어달렸고요. 그러다 보니 아무 관련 없어 보이던 서로 다른 이야기가 어느 순간 가만히 포개지기도 해요.

 

<조용함을 듣는 일> 마지막 교정 때 추가로 앉힌 김혜영 작가의 최근작 <이야기의 밤>이라는 제목의 그림에 눈길이 머뭅니다. 밤의 바닷가에 하얗고 둥근 도자기 화로와 주전자가 놓여 있고 거기서 김이 올라요. 이 장면은 마치 망원경으로 보는 양 원 안에 그려져 있고 원 바깥은 까맣습니다. 영화의 오프닝 혹은 엔딩, 어쩌면 꿈, 오래된 기억 같기도 해서 아득한 기분이 들고요. 그 고요한 풍경 안에서 찰박찰박 물결이 내는 소리, 찻물이 끓는 소리, 불이 작게 타오르는 소리, 바람 소리, 마주 앉은 당신의 말소리, 내 안에서 일어나는 소리들…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차를 담는 시간>의 한 구절이 다정히 포개져요.

 

일에 치여 조용한 여유가 필요할 때, 서로 대화하고 싶은 게 있을 때, 감정이 상했을 때조차도 차를 마셨다.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 다기에서 나는 달그락 소리, 차를 찻잔에 따르는 쪼르륵 소리가 날이 선 말을 다듬어주고 과한 감정을 사그라뜨렸으며 웃음소리에 배경음이 되어주었다.

 

보글보글, 달그락, 쪼르륵… 차의 시간이 소란함보다 조용함에 가까운 것은 이처럼 작고 사소한 소리를 듣게 해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진은영 시인과 철학 상담자 김경희 교수가 함께 쓴 <문학, 내 마음의 무늬 읽기>에서는 “나무들이 내뿜는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목수가 된다. 혹은 병의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의사가 된다. 목수나 의사 같은 이런 천직은 늘 어떤 기호에 대한 숙명이다”라는 질 들뢰즈의 문장에 더해 “사물의 기호에 민감할 때 우리는 아름다움을 배우며 그것의 비밀을 발견하는 예술가가 될 수 있지요. 사물들의 아름다움은 은밀하게 감춰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도처에 공공연한 비밀로 존재하죠. 문제는 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민감성입니다. 사물들이 뿜어내는 기호에 대해 민감할 때에만 사물들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발견하게 됩니다”라고 전합니다.

 

소리도 ‘사물들이 뿜어내는 기호’에 다름 아니며, 소리가 실은 떨림이듯, 조용함을 듣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로 존재하는 은밀한 떨림을 민감하게 감지하는 것일 테죠. 그리하여 차를 마시는 일은 크나큰 소리와 온갖 소음에 내맡겨진 우리의 둔감한 날들에 잠시 틈을 내어, 그 틈새의 미소한 떨림으로 마음을 기울게 하는 일, 마침내 그 아름다움과 함께 울리게 되는 일.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을 작게 만끽하는 일. 그것으로 또 다른 아름다움을 만들어 전할 힘을 얻는 일.

 

“매일 다른 하늘과 바람, 새소리, 냄새까지. 이 모든 것들이 벅차게 다가온다. 그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 도자기에 담기 시작했다.” _김유미 <차를 담는 시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순간과 조우할 때, 세상은 조용해진다. 그 순간과 나만이 남았다. 조용함을 듣는 시간이다. 여린 안료가 겹겹이 쌓이고, 물맛이 느껴지는 찰나들을 가만히 듣는다.”

_김혜영 <조용함을 듣는 일>

 

사물이 뿜어내는 기호에 민감한 예술가들이 발견한 아름다움을 저는 또 조용히 건네봅니다. 이 글과 그림과 책 곁에 찻물 보글보글 끓고 있기를 바라며.

 

 

[…]

 

실용적인 이유로 영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는 확신(물론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이 새로운 신기술의 세계에서도 당연히 유리하기야 하겠지만요)이 생기니까 거꾸로 영어를 공부하고 싶어졌어요. 이를테면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영어로 직접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앞으로 더욱 발달하게 될 기술들이 그 시들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번역해줄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제 몸에 축적된 영어로 읽고 싶어졌습니다. 그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욕망이었어요. 번역 너머에 있는 작품의 아름다움을 전문 번역가들이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으니까요. 번역되지 않은 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아름다움의 판단 대상 자체가 아니었지만 거기에 큰 불만은 없었고요. 그런데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언어의 장벽 없이 자유롭게 모든 작품을 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신기술 너네들, 매끄럽고 유용할진 몰라도 아직 아름답진 않은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래 보여.

 

그래서 영어를 공부해야겠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My cat is my family’가 학습 예제로 등장하는 수준에서 아름다움까지 가는 게 살아생전에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름다움을 잊은 채 살아갈 수는 없다는 기개(!) 자체가 중요한 문제니까요.

 

이번 소소한 산-책은 아름다움을 향한 기개를 잃지 않은 자다운 선택이었습니다.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밤의서점’,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책방에 다녀왔습니다.

 

공간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요소는 다양합니다. 구조일 수도 있고 배치일 수도 있고 색깔일 수도 있습니다. 어떨 땐 기능적인 요소나 세월의 흔적이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죠. 그런데 서점은 건물 자체가 독특하고 매력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공간에 아름다움을 부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필 책이라서 그런데요. 원활한 쇼핑을 위한 고객의 동선과 시선을 고려하면서 책을 아름답게 진열하는 방법이 마땅치 않습니다. 잠깐 눈을 감고 서점 공간의 이미지를 떠올려볼까요. 벽을 따라 책장이 둘려 있고 책장에는 책이 빼곡히 혹은 듬성듬성 혹은 불규칙적으로 꽂혀 있습니다. 그리고 책장과 책장이 마주 보는 사이에 있는 너른 공간, 대개는 서점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곳에 테이블이 자리하고 그 위에 또 책이 여러 방식으로 진열되어 있습니다. 책장의 높이, 테이블의 디자인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아마도 이 풍경은 교보문고에서부터 동네책방까지 대부분의 서점에 해당할 거예요.

 

이렇듯 서점의 공간 구성과 배치가 비슷비슷한 이유는 책장 때문입니다. 책장이란 게 그 생김새부터가 왠지 뒷면을 벽에 딱 붙이라고 만든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래서 일단 책장을 벽에다 타닥타닥 붙여서 책을 진열하고 나면 남아 있는 공간에는 테이블이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거기에 또 책장을 넣으면 공간이 얼마나 답답해지겠어요. 시선과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높이라면 괜찮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테이블 높이밖에 안 되는 책장을 책장이라 부르긴 애매하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파격적인 공간 배치를 위해 두 가지를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책장을 없앴다. 삑- 안 됩니다. 책장의 그 엄청난 수납력 없이는 서점이란 공간이 (거의)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테이블 매대를 없앤다. 오호, 그럴싸한데요. 하지만 어떻게? 밤의서점에서 테이블 매대가 없는 서점의 정답 같은 풍경을 보고 왔습니다.(테이블 매대가 없다고 해서 책 표지가 보이게 진열하는 공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어요. 비어 있는 벽에 선반과 작은 테이블을 두어 콘셉트에 맞는 추천 책을 책방 주인장의 코멘트와 함께 가지런히 진열하고 있었습니다.)

 

밤의서점에 있는 책장은 벽에 등을 붙이고 있지 않습니다. 옆구리를 벽에 붙인 채 모든 책장이 출입문 정면을 향해 있어요. 가운데 통로를 사이에 두고 왼쪽에 하나 오른쪽에 두 개가 있습니다. 거기에 한 칸 높이의 선반이 천장에 붙어 양쪽 책장 위를 가로지르고 있어서 책장 사이의 통로가 마치 문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총 세 줄의 책장으로 만들어진 벽과 문이 평행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앞뒤로 길쭉한 서점이 사등분된 칸으로 이루어져 있는 셈이죠. 아마도 이러한 배치 때문에, 출입문을 열고 서점에 들어갔을 때 은밀한 초대장을 들고 비밀의 공간을 방문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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