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인사를 드려요. 환히 여셨을까요?

저는 나희덕 시인의 첫 산문집 <반 통의 물>로 2022년 첫날을 시작했습니다. 존재의 ‘삐걱거림’과 ‘질문들’ 로 가득한 책 속에서 “인간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는 과연 무엇이 남는가”라는 문장 하나를 품습니다. 이 책은 아끼는 서점 리브레리아Q에서 1월 비밀책으로 보내 온 것이었어요. 월간비밀Q를 구독 중이고 일곱 번째 받은 책인데 그간 다 읽어낸 것은 절반밖에 되질 않고. 그리하여 비밀책 월초에 열어보기를 올해 작은 다짐 중 하나로 삼았습니다.

당신의 새해 첫 책, 품은 문장, 작은 다짐은 무엇인가요?

 

 

오후의 소묘의 새해 첫 책은 <고양이와 결혼한 쥐에게 일어난 일>(a.k.a. 고결쥐)입니다. 소묘의 첫 그림책 <섬 위의 주먹>부터 <마음의 지도>, <할머니의 팡도르>, <노래하는 꼬리>까지 함께 읽어온 분이라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름 ‘비올레타 로피스’(*로피즈에서 로피스로 정정)의 신작이에요. 여태껏 그랬듯, 그간의 어떤 작품과도 겹치지 않는 새로운 스타일의 그림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고요. 또 놀라게 될 것은 이야기 자체인데요. 그것은 책으로 확인해보시길 바랄게요. 이번 주중에 출간됩니다 ;)

 

이 책을 작업하는 동안엔 아니 에르노가 소녀에서 어른 여자로 변모해가는 자전적 이야기 <얼어붙은 여자>를 읽었어요. 쓰인 지 40년 만에 한국에 소개되었는데, 한국어판 서문의 문장은 이 이야기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명백히 합니다. “소년과 소녀가 함께 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전통이란 것이 깨어나서 자신의 모델을 강요한다. 말하자면 한 성에 대해 다른 성의 지배와 불평등을 실현하는 것이다. … 함께 살아가는 이 모험에서, 우리는 평등하게 출발하지 않고, 서로의 사랑 속에서도 사회가 전통적으로 남성에게 부여한 특권들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문장이 표상하는 장면들을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고, 혹은 날마다 마주하기도 할 테죠. <얼어붙은 여자>가 결혼이란 “다른 계획처럼 하나의 계획”일 뿐이며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성급히 결합한 한 순진한 여자의 지난한 결혼 이야기를 보여준다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영화 <결혼 이야기>(2019)에는 꼭 같은 생각으로 결합한 또 다른 커플의 지난한 이혼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니콜과 찰리의 관계는 그들만의 특수한 사연으로 복잡해 보이지만, 실은 결혼이라는 틀에 맞춰져버린 전형적인 관계이기도 하죠. 방향과 각도가 분명한 기울기 속에서 니콜의 욕망은 계속해서 미끄러지고 찰리의 욕망으로 끌려갑니다. 그러나 그 기울기는 니콜이 틀 밖으로 뛰쳐나오는 과정에서야 비로소 모두에게 선명히 드러납니다. 이를테면 니콜의 변호사 노라의 입으로부터. ‘찰리 당신이 원하는 걸 말하면 약속이 되고, 니콜이 원하는 걸 말하면 단지 상의군요(지킬 필요 없는!)’ 그렇다고 찰리가 악역일까. 찰리는 자신의 가족이 행복했다고 믿는 순진한 남편이고 아빠였을 뿐이에요. <며느라기>, <82년생 김지영> 속 남편처럼 지극히 평범하고 어쩌면 평균보다 조금 더 다정한 남자였고요.

문제는 아니 에르노가 썼듯, “당시 내가 처해 있던 난감한 상황에서, 커플 내에 존재하는 불평등에 대한 부당함의 감정을 누군가와 함께, 그게 누가 되었든 간에, 아니 누군가라기보다 내 파트너와 함께 거론하는 그 자체가 불가능했음”이었을 테죠. 그 불가능함은 두 개인의 내밀한 관계 바깥에서 비롯합니다.

 

이런 와중에 그 바깥을 이루는, 한 국가의 대표가 되겠다고 출마한 후보는 ‘여성가족부 폐지’를 대문짝만 하게 써놓고요. 소설보다 소설 같고 영화보다 영화 같은 이것은 비극인지 희극인지.

 

명백히 비극으로 보이는 <고결쥐>의 텍스트를 두고 로피스는 작업노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텍스트에 그림을 그리기 어려운 이유: 사랑, 학대, 젠더, 사회, 폭력에 대한 이야기다.

결론: 그 고통에 출구를 만들어줄 것.

이 책에 대한 나의 바람은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하는 것이다. 왜 이 이야기가 불편하거나 낯설게 느껴지는지를 이해하고, 한 번 읽고 난 후 수개월이나 수년 후에 다시 찾아 읽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해주기를 바란다.

저의 바람도 그와 같습니다.

 

1981년에 쓰인 아니 에르노의 <얼어붙은 여자>와 2019년에 만들어진 노아 바움백의 영화 <결혼 이야기> 속 결혼 생활은 크게 다르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얼어붙은 여자>의 마지막 페이지와 <결혼 이야기>의 엔딩신은 크게 다르고, 저는 그 차이에서 희망을 읽어요. 사라져가는 여자의 몸과 사랑과 생기로 충만한 니콜의 몸. 우리의 몸은 이름 없는 여자에서 니콜 쪽으로 더디지만 확실히 이동하고 있다고.

두 세기 전 텍스트를 21세기의 두 여성 작가가 다시 쓰고 그린 <고결쥐>의 엔딩은 이 두 엔딩을 모두 품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면, 다시 한 번, 책으로 확인해보시길 바랄게요. 이번 주중에 출간됩니다 ;)

 

 

읽고 보고 듣고 만들고. 이 시간들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는 무엇이 남을까요? 그 질문과 흔적들을 앞으로도 나눠요. 삐걱거리며 계속 이어져요, 우리. 또 만나요.

 

ps. 1월의 두 번째 레터는 넷째 주 월요일인 24일 ‘김혜영의 혜영들’ 연재로 전합니다.

 

 

<이치코의 코스묘스> 연재를 시작할 때 나름의 빅픽처가 있었어요. 먼저 봉산아랫집 식구들을 소개하고(시즌 1) 그다음엔 동네 길냥이들, 여행지에서 만난 아이들, 지인들의 고양이 등을 소개하면서 고양이와 인간과 자연과 사회에 관한 성찰(?)을 시도하다가(시즌 2) 어느 정도 됐다 싶으면 형식을 완전히 바꿔서(이를테면 고양이가 화자가 된다든가, 그림일기로 간다든가…) 일상의 작고 짙은 온기(!)를 전하는 콘텐츠(시즌 3)로 나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시즌 2의 시동을 한참 걸던 와중에 갑자기 ‘소소한 산-책’의 연재를 맡게 되면서 아쉽게도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휴면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어요. 7개월을 쉬었네요. 그러다 [월간소묘: 레터]의 형식에 변화가 생기면서 다시 연재를 하게 되었어요. <이치코의 코스묘스>와 <소소한 산-책>을 격월로 싣는 방식으로 말이에요. 물론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거예요. 그 둘이 뭐가 다른데? 고양이 얘기, 책 얘기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거기서 거기 같던데? 놉! 아니에요. (자세히 보면) 달라요. 고양이 얘길 할 땐 말이에요, 어떤가 하면요, <이치코의 코스묘스> 시즌 3 시작합니다!

 

해가 바뀐 지도 벌써 여러 날이 지났네요.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저는 만화책을 정주행하면서 한 해를 시작하고 있어요. 잡지에 연재되는 만화를 단행본 단위로 읽다 보면 매번 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전에 읽었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몇 권까지 샀는지 헷갈린다는 것. 작년 가을에, 평소 챙겨 읽는 만화 단행본의 신간을 산 적이 있었는데요. 새 책의 래핑을 뜯어서 읽으려다가 앞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예전 걸 복습하려고 책장을 뒤지다가 깜짝 놀랐어요. 지금 26권을 샀으니 책장 어딘가에 25권이 있어야 하는데 보이질 않는 거예요. 심지어 24권까지. 23권 다음에 26권, 이게 무슨 일이지? 책장을 정리하면서 다른 데 섞여 들어갔나 싶어서 온 집을 다 뒤졌지만 24권과 25권은 찾을 수 없었어요.

 

이미 있는 책을 또 산 적은 있어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어요. 만화책 두 권의 발매(시간으로 따지면 무려 6개월)를 건너뛰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동네 만화방을 찾아갔어요. 들어가자마자 허겁지겁 24권을 찾아서 후루룩 넘겨봤어요. 그랬더니 세상에, 처음 보는 내용이었어요. 25권은 말할 것도 없고요. 아, 어쩌다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만화책 신간이 나오는 것도 모르고, 그것도 두 번씩이나 모르고 살았을까, 한탄이 나왔어요. 하지만 이미 놓친 걸 어쩌겠어요. 그러고 있다가 새해도 밝았고 이참에 새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1권부터 다시 보기 시작했어요. 24권과 25권은 진작 주문해서 책장에 꽂혀 있었고요. 만화책의 제목은 <골든 카무이>예요.

 

“모험, 역사 낭만, 문화, 수렵 별미!

LOVE & GAG! 전부 때려 넣어 팔팔 끓인

일본풍 묻지 마 짬뽕 웨스턴.

드디어 똑 떨어지는 제10권!!!!!!!!”

<골든 카무이> 단행본 10권의 뒤표지에 있는 문구 중 일부인데요. 출판사 담당자의 고뇌가 느껴지는 카피라고 할 수 있어요. <골든 카무이>는 한 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장르이고 남들에게 선뜻 추천하기로 어려운 내용이지만, 일단 빠져들면 헤어나올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작품이에요. 일본 코믹스가 으레 그렇듯이 스토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아요. 러일전쟁(1904년~1905년) 직후 어딘가에 숨겨진 막대한 양의 금을 쫓는 이들의 모험, 음모, 배신, 우정, 사랑 등을 그려내고 있는데 문제는… 금을 찾기 위한 열쇠인 지도가 24명인가 되는 사람의 몸에 나뉘어서 문신으로 새겨져 있기에 그걸 하나로 모으려면 치열한 상황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 굳이 껍질(?)을 벗기는 과격한 방법을 쓰지 않더라도 문신을 베껴 그리면 될 것 같지만, 몸에 보물 지도가 새겨진 이들이 하나같이 기구한 인물들(문신이 새겨진 장소가 어느 교도소)이라 이야기가 순순히 흘러가지 않고 총과 칼이 난무하게 되고 신체가 뎅겅뎅겅 떨어져 나가고 그러다가 결국 껍질이 벗겨지고, 뭐 그런 스토리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이 작품의 진짜 매력은 스토리가 아니라 따로 있어요. 2016년 일본만화대상까지 받은 작품이니까 궁금하시다면 검색 오네가이시마스!)

 

<골든 카무이>를 보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인간이란 참 뭐든 할 수 있는 존재구나, 그게 좋은 방향의 의외성이든 나쁜 쪽으로의 일탈이든 극단의 폭이 정말 크다고 느꼈어요. 그러면서 오랜 세월 붙잡고 있던 질문 하나가 떠올랐어요. 과연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신뢰하며 사랑하는 게 가능한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개별적 사람이 아니라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집합체, 보통은 대중이라든가 민중이라든가 하는 이름으로 불리는 인간 군상을 사랑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에요. 한때는 당연히 가능할뿐더러 일종의 의무에 가깝다고 여기던 때도 있었어요. 젊었고 에너지가 넘쳤고 낙관적이었던, 지금은 부끄러움으로 더 많이 기억되는 짧은 시절이었지만요. [계속 읽기]

 

 

🐭 <고양이와 결혼한 쥐에게 일어난 일> 1.13(목) 출간 예정

  • 리뷰어 모집 중 ~1.10(월) 마감 instagram.com/p/CYbSEv-p48c/
  • 역자 온라인 북토크 2.3(목) – 시간 및 자세한 사항은 추후 공지합니다.

 

🐈 <호찌냥찌 새로운 이야기> 연하장 & 호찌 부적 이벤트 1.13(목) 오픈 예정

 

📘 <두 여자> 전시 & 오후의 소묘 브랜드전

  • 1.19(수)~2.6(일) | 비플랫폼 (서울 마포구 독막로2길 22 3층 1:00-8:00, 월요일 및 설 연휴 휴무)

 

📖 오후의 소묘 이모저모 에디터 온라인 북토크

  • 1.20(목) 저녁 7시 | 비플랫폼 인스타그램 라이브 instagram.com/bplatform/
  • 오후의 소묘나 책들에 관해 궁금한 점이 있다면 답장하기를 통해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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