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소묘: 레터] 12월의 편지 ‘연말정산’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나이마다 자신이 살아온 ‘해’를 규명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과거를 어떻게 그릴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아니 에르노 <세월> 연말정산을 하기엔 아직 이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12월에만 3종 4권의 책이 출간될 예정이거든요…(무슨 일이냐…) 그렇지만, 그렇지만, 역시 12월은 한 해를 돌아보기에 ...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나이마다 자신이 살아온 ‘해’를 규명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과거를 어떻게 그릴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아니 에르노 <세월> 연말정산을 하기엔 아직 이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12월에만 3종 4권의 책이 출간될 예정이거든요…(무슨 일이냐…) 그렇지만, 그렇지만, 역시 12월은 한 해를 돌아보기에 ...
샹그릴라, 그러니까 지상낙원. 그곳은 마치 보물섬처럼 특정한 좌표를 지니고 있어 우리가 지도를 들고 찾아가야 하는 미지의 장소가 아니라, 자기만의 고유한 내재율과 공명하는 어떤 질서를 감각하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물질적으로는 허상이라 할지라도 비물질적으로는 분명히 거기 존재하는.(이 말이 말이 된다면.) 샹그릴라는 티베트어로 ‘내 마음속의 해와 달’를 뜻한다고 해요. 스페인 시인 마르 베 ...
일이 의미 있게 느껴지는 건 언제일까? 우리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자아내거나 고통을 줄여줄 때가 아닐까? — 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 저 유명한 책의 제목은 ‘슬픔’으로 끝납니다. 알랭 드 보통은 일이 충족감을 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다만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준다고 썼습니다. ‘가없는 불안’ 대신 ‘품위 있는 피로’를 안겨줄 것이라고요 ...
“이름을 지어줘.” 어느 날 메시지로 아기 사진이 날아왔습니다. 친구가 아이를 낳은 것이에요. 아가 얼굴을 보자 이 존재는 뭐라고 불러줘야 하는지 궁금해졌어요. 이름 뭐야? 물었더니 이름을 지어달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저는 노트를 펼쳐 친구가 말한 돌림자 하나를 적어놓고 며칠 꼬박 떠오르는 온갖 글자를 앞뒤로 붙여보았어요. 이름하는 일은 어쩐지 영혼에 관여하는 일 같습니다. 제가 낳은 것도 아닌 ...
한 해 전 팔월에는 빨강을 전했지요.(빨강의 편지) 빨강으로 태어난 소년 게리온의 이야기 <빨강의 자서전>과 함께요. 게리온의 빨강 날개는 아름답고 경이로운 괴물성을 품고 있었습니다. 계절을 돌아 올여름의 복판에는 파랑을 전해요. ‘파랗다’의 어원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풀’에서 유래한 ‘프르다’가 변형되었다는 설과 ‘바다’에서 비롯되어 ‘바다하다’가 ‘파라하다’로 변형되었다 ...
여름에는 어째서 여름 이야기만 하게 되는지. 여름 아닌 것들을 도무지 떠올리기 어렵고 그럴수록 여름 안이라는 것만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럴 바에야 여름 안에서 좋은 것들을 늘려가는 수밖에 없어요. 폭설로 빙수를 만들고, 온갖 여름을 설탕에 절여 유리병에 담고, 땡볕의 바다에 눕고 구르고, 뒤집힌 양산으로 폭우를 헤치고, 콩국수와 옥수수로 세 끼를 채우고, 수영복을 입고 춤을 추고, 수박을 수영장 ...
-비밀 있어요? 조카가 귀엣말로 속삭입니다. '아니, 없는데. 도연인 있니?' 물었더니 많다고 하지요. -비밀 많은 사람이 작가가 되는 거래. 작가가 꿈인 조카가 눈을 반짝여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면서 누구에게나 말하는 거야, 비밀을. 응? 조카가 갸우뚱해요. 아이의 엄마가 덧붙였어요. -도연이도 그러잖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하면서 엄마랑 친구들한테 얘기하는 거. 슬며시 웃으며 끄덕입니 ...
내게는 꼭 한 번 그런 저녁이 찾아온다. 열어둔 창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올 때나 거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고개를 돌릴 때, 문득 ‘아,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 왔구나’ 깨닫는 그해의 첫 저녁이. -김신지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게 취미> 종일 창을 열어두어도 좋은 달이 되었어요. 오월은 언제나 창으로 옵니다. 부드러운 구름, 잎이 초록으로 무성해진 감나무와 호두나무, 다디 ...
“나를 위해 꽃 한 다발 사는 일이에요.” 좀처럼 잊히지 않는 말들이 있습니다. 이달의 책 저자인 이경신 선생님과 함께한 ‘좋은 삶을 위한 죽음 준비 워크숍’에서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이야기하던 시간, 70대 여성 분이 남긴 말이에요. 그 말을 듣자마자 모두가 탄식을 내뱉으며, 지금! 지금 하실 수 있어요, 돌아가는 길에 꼭 사세요, 한 마음으로 응원하던 것까지 오롯이 기억하고 있습니 ...
“모든 온기가 있는 생물은 다 의지가 되는 법이야.” -영화 <리틀 포레스트>(한국판) 3년 전 이맘때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개봉했어요. 그리고 주연인 김태리 배우가 3월 1일 뉴스룸에 출연해, 당신의 리틀 포레스트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고양이들(반려묘)’이라고 대답했죠. 저는 그 순간 환호하며 영상을 사진으로 찍고 박수를 쳤답니다.(‘오후의 소묘’의 소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