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의미 있게 느껴지는 건 언제일까? 우리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자아내거나 고통을 줄여줄 때가 아닐까?

— 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

 

저 유명한 책의 제목은 ‘슬픔’으로 끝납니다. 알랭 드 보통은 일이 충족감을 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다만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준다고 썼습니다. ‘가없는 불안’ 대신 ‘품위 있는 피로’를 안겨줄 것이라고요. 서늘한 통찰이 아닐 수 없어요.

그러나 과연 그렇기만 한가. 이달의 편지에서는 일의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피어나는 기쁨에 주목해 보고 싶었습니다. 완벽히 실패한 것 같지만 시도는 남을 테죠. 어쩌면 여러분의 시도를 자아낼지도 모르고 말예요. :)

 

 

 

회사 내에서 나의 한계가 부끄럽기는 했어도, 나의 사생활을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내 생각에 그건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이었다.

편집자 생활을 하면서 내 인생은 아주 긍정적인 방향으로 넓어지고 깊어졌다. 덕분에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 수 있었고, ‘흥미진진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출판업계의 아주 오래된 클리셰를 끊임없이 확인할 수 있었다.

 

오후의 소묘 첫 에세이 시리즈의 첫 권을 준비하며 객원 에디터를 모집했습니다. 에디터에 대한 관심이 이토록 많다니! 신청서를 정리하며 깜짝깜짝 놀랐어요. 신청 이유로 새 책에 대한 관심과 오후의 소묘를 향한 애정을 드러내 주신 분들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책 출간 과정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하나로 흘러넘쳤습니다.

 

이달의 책 저자인 다이애나 애실은 50년간 책의 세계에 깊숙이 몸담은 인물로 75세에 은퇴해 80대에 지난 편집자 생활을 회고하며 <되살리기의 예술>을 썼어요. ‘되살리기’는 교정 부호 ‘生’을 뜻하는데요. 이전 교정을 되돌리는 일을 뜻합니다. 주로 삭제하려고 동그라미를 치고 돼지꼬리를 그려 넣은 부분 위에 줄을 긋고 ‘生’을 써 넣습니다. 전에는 없애려 한 부분을 다시금 살려놓겠다고 판단한, 고민의 흔적을 남겨두는 것이죠.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편집 일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선택하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정답(필연적 진리)은 없으니까요. 하나의 원고가 책으로 만들어지기까지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으며, 편집자는 그중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선택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선택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최선의 세계가 탄생하는 것이죠. 물론 그 과정에서 불협화음도 생길 수 있지만 이유 있는 불협화음이라면 결국엔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 이 일의 아름다움일 것이에요.

그런데 어쩐지 이 책은 온통 불협화음투성이인 것처럼 보입니다. 대작가를 놓친 일, 50년을 함께한 사장과의 온갖 잡음(또 잡음, 잡음, 계속 잡음)들, 원고를 받기 위한 수년의 지난한 기다림, 믿었던 저자의 배신, 출판인으로서 그리고 한 회사의 이사로서 미덥지 못했던 자신의 처신, 불경기와 함께 찾아온 출판 불황 속 추락까지. 제가 편집자였다면 이 원고의 절반은 덜어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자는 필립 로스, 존 업다이크, 진 리스, 잭 케루악, 시몬 드 보부아르, 마거릿 애트우드 등 세계적인 작가를 발굴하고 그들의 작품을 만들었다는 전설적인 편집자로서의 대단한 면모를 드러내려 하기보다 앞서 말한 그 모든 불협화음을 되살려냅니다. 그것이 다 ‘생生’이었다고 말이죠.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나는 엄청난 행운아이고, 내가 누린 행운의 상당 부분이 이 일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편집자로 보낸 시간 위에 ‘생生’이라고 끼적이게 된 이유는 그 일이 내 일상에 수많은 발전과 관심과 즐거움과 기쁨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은 아닙니다만, ‘책 출간 과정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한 번쯤 이 생의 기록을 펼쳐보셔도 좋겠어요. 출판업계의 일상을 담은 1부 중 편집자의 의무와 편집의 원칙에 관해 쓴 세 페이지에 걸친 대목(“책 한 권을 만들기까지 필요한 과정은 단순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고 가끔은 지루했다(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무기가 작업 중인 책에 대한 애정이었다). 편집자의 의무를 나열하자면 먼저~” 83~85쪽)에서 단어마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출간한다면 분명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될 원고를 왜 반려했는지 자신의 직업 윤리를 들어 상세히 기술한 부분(128~129쪽)은 이 전설적인 편집자가 대작을 탄생시킨 사연보다 제게 더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저자들에 관해 쓴 2부에서 저의 인생의 책 중 하나인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와 진 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서 몹시 괴롭고도(?) 흥미로웠어요.

 

내가 책을 사랑하는 이유는 위대한 문장에 희열을 느껴서라기보다 내 좁은 경험의 한계를 넘어 복잡한 인생에 대한 감각을 넓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집어삼킬 듯한 인생의 어둠과, 고맙게도 그 속을 애써 뚫고 나오는 빛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일’로 바꿔 읽어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요.

 

직장 생활을 시작하며 받은 것 중 두 가지를 또렷이 기억합니다. 하나는 초록색 명함으로 일찌감치 사라졌으며, 다른 하나는 선배에게 선물받은 만년필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어요. 바로 이달의 썸띵인 라미LAMY 사파리safari 만년필인데요. 1980년 학생들을 위한 만년필이라는 컨셉으로 출시된 만큼, 이전 한 세기 동안 만년필이 지녀온 무거움과 장식적인 요소를 버리고 누구나 일상에서 가볍고 편하게 사용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당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다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만년필이 되었죠. 만년필 초심자 대개가 입문용으로 선택하는 모델이기도 하고요.

만년필이 손에 익고 만년필도 제 필기 습관에 맞춰지는 동안 사회 초년생이던 저 역시 일과 회사에 적응해… 갔다면 좋았겠지만 그럴 기미는 없었습니다.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 새로운 만년필을 찾아 열심히 헤매던 시기가 있었지만 결국 또 다른 색의 사파리로 귀결되었어요. 그러니까 여전히 사파리를 쓰고 있고 일 또한 입문의 문에서 영원회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왜 자꾸만 슬퍼지죠.)

좋든 싫든 첫 일터의 경험은 ‘일하는 나’의 토대를 마련하기 마련입니다. 만 2년 동안 가장 가깝게 일했던 이는 일을 놀이와 같이 생각하며 가르치기와 말하기를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충고와 칭찬을 모두 아끼지 않았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제게 큰 행운이었어요. 이렇게 하면 더 재밌지 않을까? 띄어쓰기 교정 하나에도 정확한 이유를 들 수 있어야지. 도판과 캡션은 에디터의 영역이지만 텍스트를 부연하는 건 게으른 거야, 새로운 관점에서 텍스트를 확장해야 해. 너는 이런 걸 잘하는구나. 자유는 능력에서 비롯되는 거란다. 이번엔 뭘 배웠어? 등등. 지금은 잊은 듯도 싶지만요.

 

책을 만들고 파는 일은 권수가 늘수록 경험이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생전 처음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한창 지어놓은 일의 집을 부수고 다른 방식으로 세워야 하는 현장 같아요. 하지만 토대가 남아 있고, 그동안 동료, 저자, 독자로부터 얻은 모든 것이 낱낱의 일이 아니라 하나의 업으로 그 아름다운 뼈대를 드러내곤 합니다. 단순하고 간결한 형태의 라미 만년필을 손에 쥔 채 새로운 교정지를 마주할 때마다, 든든한 기분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이겠죠.

라미는 바우하우스 디자인 철학로부터 영감을 받은 브랜드이고 슬로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Form follows fuction’

저는 에디터로, 출판인으로 아직은 좀 더 잘 기능하고 싶군요.

 

 

자기만의 색깔을 지닌 작은 서점을 찾아다니는 소소한 즐거움을 나눕니다. 책방에서 산 책을 함께 소개합니다.

 

제주, 라바북스

 

여행을 좋아하시나요? 여행 어려운 날들이지만 출장을 겸해 다녀온 라바북스에서, 제주의 어느 곳보다 여행의 기분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제주 고양이 웹툰 시즌 2. <아홉 번째 여행>을 쓰고 그린 신현아 작가가 전지적 대봉 시점으로 봉봉 식구들 이야기를 담박히 담았습니다.

 

슬픔 따로 기쁨 따로가 아니라 두 색이 겹쳐 하나의 색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요. [대봉이의 일기]를 볼 때마다 백면의 까만 선 위로 제 마음이 칠하는 색이 꼭 그렇습니다.

 

 

[대봉이의 일기]

사생활

점프왕

복잡하게 살지맙써

소묘가 사랑하는 그림책 작가 이미나의 그림 에세이. 그림과 그리는 생활에 대해 씁니다. 아니 오리고 붙여서 새로운 모양을 만든 이것은, 고양이 화가의 이야기.

 

지구에 그림 그리는 화가 일억 명 있다면

 

그림 그리는 이들을 가까이 혹은 멀리서나마 지켜보며 알게 된 사실은, 화가란 슬픔에 끝까지 잠겨본 존재라는 것이에요. ‘대롱대롱’ 달린 눈물과 콧물 방울 끝에 찾아온 기쁨의 순간을 기쁘게 전합니다.

“뭘 그려야 할지 몰라서 공모전 결과를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난 터널을 그렸어요. 큰 붓으로 한번 눌러 비비니까 공간이 생기고 그 위에 다른 색의 물감으로 곡선을 세 번 그어주니 터널처럼 보였습니다. 물감을 채 닦지도 않고 흰 물감을 찍어 점을 네 번 찍으니까 터널의 불빛이 그려졌어요. 좀 심심한 것 같아서 파란 물감을 찍어 자동차도 그렸어요. 엉엉 우는 몇 분 사이에 그림을 다 그렸습니다.
에엥

눈물이 멈췄습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 듯했습니다.”

 

월간소묘의 느슨한 온라인 독서 모임. 함께 읽고 써요.

 

◇ 9월의 책 <수어>

“나는 내 세상에 어떤 단어가 없는지 알지 못한다. 내게 ‘수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전까지 농사회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것처럼, ‘비건’이라는 단어가 내 삶에 들어오기 전까지 동물의 고통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희망적인 건, 어떤 단어를 곁에 두고 살아야 할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 차별과 편견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면, 배려와 공감, 이해와 인정의 말을 우리 곁에 두면 된다.”

이미화 작가님의 <수어> 읽고, 수어, 농인, 청인, 농세계라는 생소했던 단어들을 내 사전에 포함시켰다. 언제부턴가 “몰랐어요,” 라는 말을 변명으로 삼지 않게 되었다. 이 세계에 공공연히 존재하는 큰 구멍을 모른다는 건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뜻 같아서. 나도 모르게 누리는 특권이 누군가에게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라면 그건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말과 글이 가진 힘을 믿는다. 한 권의 책이 단번에 세상을 바꾸지는 못 하더라도 한 사람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변화시키기 위해서 쓰기로 했다는 이미화 작가님의 글은 최근에 읽은 어떤 글보다도 힘이 세다. ‘좋아하는 마음, 지켜내고 싶은 마음’으로 썼기 때문일 것이다.

수어에 대해, 농인과 농세계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그 자체로 완전하고 고유한 수어의 아름다움’과 농인들의 ‘반짝이는’ 삶을 전하는 말들, 공감과 연대를 위한 말들이 더 풍부하고 섬세해지길 바란다. 무엇보다 ‘내가, 우리가, 이 인생을 다르게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서로를 향한 단어를 꼭 쥐고서.

@littlestitches__ instagram.com/p/CUkJXCgp5AO/

 

월간소묘 9월의 편지의 ‘이달의 책’이 <수어>였습니다. 월초에 읽고 나름 깨닫는 바가 커서 유투브에서 수어를 조금 익혔습니다. 그래도 몇 문장 정도지만요. ‘한국수어사전’도 종종 찾아보았어요. 누군가의 언어. 닫혀 있던 세계의 문이 열리고 ‘내가 속한 세상의 정의’를 고쳐씁니다.

수어 : 안녕하세요. 제가 누군지 궁금하시죠. 지금부터 제 소개를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moya입니다. 초를 만들어요. 취미는 영화보기, 책 읽기예요. 성격이 차분해요. 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moya.__

 

 

 

*[김혜영의 혜영들]은 다음 달에 만나요.

 

🍃 김인, [ 사루비아 다방 티 블렌더 노트 ](부제) 10월 출간 예정입니다.

 

🐈 제주 라바북스에서 [아홉 번째 여행] 원화전 잘 마쳤습니다.

찾아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아래 링크의 아홉 번째 영상에서 신현아 작가님의 러프한 스케치를 보실 수 있어요.

instagram.com/p/CUb1rAopM_w/

 

큰딸을 9월에 낳았습니다. 예쁜 이름을 고민하다 가을하늘 ‘민’이라는 외자 이름으로 지어줬는데 제 마음과 같은 이야기가 반가웠습니다.(그 김에 소소한 산-책을 나눠요.) 쓰레빠 권역에 서점과 혼술집이 있는 게 소원이었는데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서점이 생겼습니다. ‘천천히, 스미는…’이라는 곳인데 수원 율전동에 있다가 이전했습니다. 오토바이가 쉴 새 없이 지나다니는 어수선한 동네로 들어가는 길에 세탁소 간판이 보이면 그곳입니다. 긴가민가하며 문을 열면 그 어수선한 길의 대피소같이 조용하고 아늑한 장소가 숨어 있습니다. 보드랍지만 심지 있어 어딘지 단단해 보이는 여자 사장님이 맞이해주세요.

8월에는 <여름의 묘약>을 읽었습니다. 여름 휴가지에 들고 가서 코로나로 가기 어려운 프로방스의 여름을 보냈습니다. 동네 한 바퀴 도는 양 걸어가 커피도 마시고 책 구경도 할 수 있는 이런 곳이 있어 기쁩니다.

이제 혼술집만 생기면 됩니다.

—treemj

 

반가운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하고, 축하드립니다. 써주신 편지를 읽으며 친구를 따라 낯설지만 친근한 동네를 함께 걷는 듯했어요. 무엇보다 민이와 treemj 님의 건강을 바라고, 혼술집도 머지않은 때에 나타나주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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