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쿠메이와 미코치, 신부 이야기, 어제 뭐 먹었어?, 요츠바랑!, 그리고 대망의 원피스, 기타 등등.
눈치채신 분들도 계시겠죠? 네, 제가 다음 권을 기다리는 만화책 목록입니다. 물론 여기 적은 것보다 더 많은 이름들이 있고, 에세이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다룬 에세이 <에세이즘>에서는 ‘목록 작성의 핵심은 기타 등등을 쓰지 않는 것’이라 했지만 저는 에세이가 아니라 편지를 쓰는 것이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흠흠, 그래도 중요한 것 하나만 더 적어본다면, 여러분의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을 그 이름, 네, 바로 ‘호찌냥찌 새로운 이야기’지요.
<호찌냥찌 새로운 이야기> 1-2권을 출간했을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3권 언제 나와요? 이고, 3권을 출간한 지금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역시 4권 언제 나와요? 인데요. 일단 1년은 기다려주십사 말씀드려봅니다. 원래 대작 시리즈는 항상 윈터 이즈 커밍…과 함께 연말마다 나오잖아요.
아무튼, 같은 반응을 수없이 접하며 생각했어요. 어쩐지 다음 장면이나 결말이 빨리 알고 싶어서 못 참겠다는 마음과 결이 조금 다른 것 같았거든요. 정말로 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궁금해서 다음 권의 행방(?)을 묻는 의문문이 아니라(아니, 물론 궁금하겠지만요), 그보다는 참을 수 없이 터져나오는 감탄문에 가까운 건 아닐까. 그러니까 ‘언제 나와요?’는 이 세계에 푹 빠져 있다는 고백, 등장인물들에게 보내는 애정과 격려, 작가에게 계속 이 이야기를 써달라는 응원- 그런 마음 한데 모아 잘 반죽해서 구워낸 빵 같은 말.
대체 이 마음은 언제 부풀어 오른 걸까요. 곱씹어보면 작가가 곳곳에 뿌려둔 아주 사소한 순간들에 그 씨앗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아요. 제 안에서 싹튼 씨앗 장면을 떠올려봅니다. 아기가 된 호찌 삼촌의 곰 무늬 스카프, 알프레도와 깜부의 강아지풀 놀이, 서로 기대어 자는 모습, 다 함께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시간, 입가에 귀엽게 묻은 츄르, 엉덩이를 실룩거리는 꿍실꿍실 장면들, 손을 잡아주는 모든 순간들… 그저 이 순간이 계속되었으면 염원하게 된. 여러분에게도 그런 순간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이야기가 있겠지요?
그러고 보니 제가 다음 권을 기다리는 만화책 거의 대부분이 극적인 전개보다 느긋한 순간들을 집요 아니 섬세하게 그려낸 것들이네요. <요츠바랑!>(2004~, 현재 15권, 한국어판 기준 이하 동일)은 엉뚱하고 귀여운 꼬마 요츠바가 어쩌다 가족이 된 번역가 아빠랑 아빠 친구들이랑 이웃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언뜻 평범하지만 모든 게 새롭고 특별한 하루하루를 보여주고요. <어제 뭐 먹었어?>(2008~, 현재 20권)는 두 중년 남자가 날마다 한 끼 식사를 정성껏 요리하고 마주 앉아 함께 먹는데, 요리 과정의 묘사가 얼마나 디테일한지 영상보다 더 생생해요. <신부 이야기>(2010~, 현재 14권)는 19세기 중앙아시아를 살아간 여자들의 이야기로, 무엇보다 직물이나 조각의 정교하고도 화려한 무늬에서부터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수를 놓듯 한 땀 한 땀 그려내는 모리 카오루 장인의 그림에 이 만화의 정수가 있답니다. <하쿠메이와 미코치>(2015~, 현재 10권)는 목수이자 여행자인 하쿠메이와 직녀이자 요리사인 미코치, 이 둘을 중심으로 신장 9센티미터의 작은 사람들(쿠나?)과 각양각색 여러 존재가 숲에서 마을에서 오손도손 살아가는 사랑스러운 이야기에요. 10년, 20년씩 연재 중인 이 만화들 모두 기다림이 길어요. 저는 그저 작가가 지치지 않고 더 오래오래 그려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호랑이와 고양이 가족의 소중한 날들을 담은 호찌냥찌 이야기는 인스타툰으로 2018년부터 연재되었고, 오후의 소묘에서는 2021년 12월에 처음 책으로 내놓았죠. 정말로 호찌냥찌 이야기 속에서 막 튀어나온 것만 같은 사랑스러운 Grace J 작가님이, 할머니가 될 때까지 쓰고 그리고 싶다 하셨으니 10년, 20년, 우리 이야기 속에서 함께 나아가요.
깊어지는 가을밤, 폭신한 솜이불 덮고 알밤처럼 까먹을 이야기들 가득 쟁여두시고요 :)
참, 대봉 작가님, <대봉이의 일기>는 또 언제 나와요?
“이렇게 날이 무덥기 전의 일입니다만 나는 이번 여름에 고양이를 잃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매일을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고양이와 시간을 보내세요. 병원에서 느닷없이 그런 조언을 받고 돌아와 보름도 되지 않아 겪은 일입니다. ”
<채널예스> 100호 특집에 실린 황정은 선생님의 글을 읽다가 이 문단에서 더 나가지 못하고 한참을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떻게 견디고 계실까? 보탤 수 있는 말이 없었습니다. 다만 함께했던 그 15년 동안 사람도 고양이도 행복했으리라 믿어볼 따름입니다.
* * *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 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 강승원 작사/작곡, 김광석 노래, <서른 즈음에>
상황은 다르지만 선물 같은 시간을 산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서른 즈음, 오래전 일입니다. 질풍노도의 이십 대를 지나고 첫 번째 직장 생활을 짧게 마친 뒤였을 거예요. 어느 날 갑자기 사는 게 별거 없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왔습니다. 이제부턴 지루한 반복이겠구나 싶었습니다. 도전 정신이나 성취욕이라도 있어야 일상의 그 나른함을 깨고 삶을 역동적으로 설계해 볼 수 있었을 텐데, 한참 심장이 뜨거울 나이였음에도 그런 에너지는 없었고요. 그렇게 흐물거리다가 또 어느 날 갑자기 결심했습니다. 그래, 그냥 뽀나스라고 생각하자. 남은 인생은 선물인 셈 치지 뭐. 돌이켜보면 참 이상한 결론이었고 약간은 건방진 태도였지만 덕분에 잘 살았습니다. 욕심 없이 적당히, 대충, 무난하게 말이죠.
그러다 지금은 진짜 선물 같은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삼삼, 모카, 치코, 미노, 오즈, 시월 여섯 고양이와 함께 지내는 시간을 선물 말고 어떻게 달리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존재들이 어떻게 내 삶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믿기지 않을 때도 있고, 손수 부지런히 주워 온 결과지요, 육묘가 편안하고 자유롭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꿈인가 싶을 때도 있고, 이불에 오줌을 싸고 새벽에 밥 달라고 괴성을 지르고 거실에서 똥으로 축구를 하고 등등의 사건도 있지만요, 아이들의 새근대는 숨소리를 들으며 이 녀석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것도 인생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싶어 안도하곤 합니다. 뽀나스 같은 인생이란 생각은 진작에 내다 버렸습니다. 선물인 셈치고 대충 살아갈 때가 아니더라고요. 이 선물 같은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 매일 다짐합니다. 오래 살자! 우리 막둥이 시월이보다 오래 살아야지! 요절(아니지만) 금지!
* * *
“행복과 기쁨의 차이는 중요하다. 행복은 끝없는 햇살처럼 지속적인 상태로 상상되는 데 비해, 기쁨은 번개처럼 번득이는 것이다. 행복은 난관이나 불화를 피하는 질서 잡힌 삶을 요구하는 듯한 데 비해 기쁨은 어디서든 불현듯 나타날 수 있다.”
– 리베카 솔닛, <오웰의 장미>
행복은 시간의 누적으로만 인식할 수 있습니다. 당장 지금의 순간이 행복한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만약 행복한 순간이라고 느낀다면 그건 기쁨의 번득임을 행복으로 오인한 것이거나, 오래도록 축적된 행복의 충만감을 지금 발생한 기분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반면에 기쁨은 즉각적입니다. 준비된 순간이라면 기다림 없이 발현됩니다. 번개처럼, 불현듯 말이죠. 기쁨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야 행복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기쁨 없는 행복이 존재할 수 있는지도요.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기쁨보다는 행복이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선물 같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행복보다는 기쁨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선물 같은 시간이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안한 시간과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읽기]
🎉 [호찌냥찌 새로운 이야기] 3권 리뷰 & 당첨자 발표
– “힐링을 가져다준 이야기.”
– “한 장 한 장이 아까워서 천천히 읽으려 해도 어찌나 후르륵 넘어가던지!”
– “읽으면서 이렇게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다 읽고 나서도 행복한 책은 호찌냥찌뿐이에요.”
– “책이 서점에 깔리는 첫날 직접 가서 책을 사온 건 해리포터 이후로 처음이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들의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지!”
– “미공개 에피소드가 실려 있어서 책으로 소장해야! 호찌냥찌 가족의 세상이 넓어지는 걸 보는 재미가 있고 귀여운 아기고양이 앵두 때문에 최애가 자꾸 바뀌려고 해요. 굿즈로 나온 포토카드까지 완벽.”
🐯 선정되신 아래 다섯 분께는 호찌냥찌 스티커 4종 세트 선물 보내드립니다. 메일로 개별 연락드렸으니 금일(10일)까지 꼭 회신주세요_! 축하합니다 :)
– 이메일 앞 3자리, 이름: woo* 김*정 | gre* 김*숙 | sad* 김*희 | dms* 유*경 | jin* 유*진
👏 지난 추석 연휴에는 오후의 소묘의 친애하는 작가 비올레타 로피스와 하루를 같이 보냈습니다 :)
소묘에서 펴낸 첫 그림책 <섬 위의 주먹>부터 <고양이와 결혼한 쥐에게 일어난 일>까지 다섯 권을 모두 번역한 기린, 무루 님과 고결쥐 원화 및 작업 노트를 보고 이야기 나눴고요. 꼬박 7년이 걸린 작업이었던 만큼 노트도 빼곡 두툼한 것이 여러 권이었어요. 그 많은 구상 끝에 하나의 방향이 결정되면 나머지는 모두 버려낸다고 했는데요. 다른 멋진 작업들이 독자에게 직접 가닿지 못하는 것은 매우 아쉽지만, 완성된 책에는 페이지마다 그 한 페이지를 만들기 위해 쌓아온 고민들이 분명하게 녹아 있겠지요.
로피스는 책마다 글과 별개로 그림이 하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전해온 작가예요. 그의 깊은 곳에 있는 생각들이 오후의 소묘가 지향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고, 포옹과 함께 새삼 온몸으로 스며든 시간이었습니다.
발레리오 비달리와 고결쥐에서 로피스가 헌사를 바친 루스- 가족 모두의 사인을 받은 기린 역자님 부러울 뿐이고, 그러나 책을 놓고 온 아쉬움보다 뭉클함 더 컸지요😌
무루님이 처음 <섬 위의 주먹>을 소개해 준 날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그날도 볕 좋은 가을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는데 말이죠. 또 다음을 기약해 봅니다. 그 언젠가엔 우리 함께 만나요✨
✏️ 안성의 다즐링북스에서 열렸던 <차를 담는 시간> 북토크 풍경- 몹시 따듯하네요. 김유미 작가님의 북토크 후기
11월에는 토림도예 전시가 있다고 하니 또 소식 전할게요 :)
✏️ <우울이라 쓰지 않고> 문이영 작가님의 재미난(?) 일기 연재 만나볼 수 있는 레터 소개드립니다. 벌써 두 편의 일기가 띄워졌어요. 마마다(My Mindful Diary): ‘이영의 일기’ 미리보기 | 구독하기
영화 <수라> 처럼 지금 강원도 원주에서는, 또 전국의 많은 영화인들이 원주 아카데미 극장의 위법 철거를 막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어쩔 땐 무력해지기도 하는데, (흰발농게는, 갯벌은,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정말로 아름답답니다.) 라는 말을 읽고 큰 위로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아카데미극장에 평화를. #SAVEOURACADEMY _summernblue
아름다운 사람들의 행진을 보았습니다. 아카데미극장이 원주 시민과 영화인들의 것으로 오래 남기를 기원해요. 보존서명 동참하기
아름다움이 희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다는 것을 소묘의 편지를 받고 느꼈습니다. 저는 <새의 심장>에서 이 부분이 떠올랐어요. “네가 모으던 보물들을 계속 찾아서 소중히 간직하고 있어. 사라지지 않도록. 네가 돌아왔을 때 시가 여기 계속 있을 수 있도록”. 우리와 연결된 작고 무수한 생명들에게 귀 기울이고 자세를 낮추는 오늘을 살고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새만금의 흰발농게와 대봉이, 그리고 호찌냥찌를 향해 두 팔을 벌려요. _moya
모야씨 두 팔 활짝 열린 크고 넉넉한 마음에 시 가득 깃들어 있는 것 같네요. 아름다움이 희망인 것- 정말 그래요 :)
이달의 편지를 읽고 나누고 싶은 문장이 떠올라 남겨봅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눈망울이 사랑을 담는 가장 아름다운 그릇이었으면 한다.
보이지 않는 사랑이란 말을 두 눈 가득 꾹꾹 담아 보여 주던 나의 아름다운 사람들처럼.
가을이다. 아직 단풍나무가 푸른 가을. 이제 저 파란 나무들이 가을을 담을 차례이다.
지상이 가을을 담는 커다란 그릇이 될 것이다.” P.15
성동혁 시인의 산문집 <뉘앙스> 의 한 페이지에요.
아름다운 문장을 가슴에 담아 편지를 읽는 분들의 하루가 반짝이길 바라봅니다. :) _inyoung0408
이 계절에 꼭 어울리는 시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 모두 눈망울 반짝이는 하루하루이기를- 함께 바라요.
아름다움을 보았기에 그걸 지켜야겠다는 책임감이 생겼다는 말이 스르르 살며시 닿았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나름다움, 나다운 아름다움을 찾아 수많은 청년들과 함께 해왔더랬죠. 이 일을 하고 있는가 생각해보니 찍어내듯 똑닮은 자기소개서들, 나답기보다는 정답(그런 게 있냐마는)에 가까워지기 위해 감추고 숨겨왔던 진짜 그들의 이야기를 만났던 그 순간, 저마다의 빛깔로 물들어가는 아름다움을 바라본 업으로, 이 업을 떠나지 못하고 있음을, 나는 참 이 일을 사랑하고 있음을 잘 알면서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정답보다는 나답게 아름답게 살아가는 청춘들의, 사람들의 나름다운 세상으로 물들길 바랍니다. _kizi1004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업이라니- 아름답네요. 그저 바라보는 게 아니라 발굴이 선행되는- 개인사의 고고학자랄지. 애정과 즐거움에 책임까지 더해지는 것이 역시 일인가 싶어집니다. 여러 가지 생각해 보게 되는 답장, 감사합니다.
10월의 편지,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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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소묘 : 레터]는 책과 고양이를 비롯해 일상의 작은 온기를 담은 다양한 글을 전합니다. 매달 두 번째, 네 번째 월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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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첫 편지 ‘얼굴들’ • 2월의 편지 ‘걸음걸음’ • 3월의 편지 ‘Little Forest’ • 4월의 편지 ‘Now or Never’ • 5월의 편지 ‘창으로’ • 유월의 편지 ‘비밀의 무늬’ • 7월의 편지 ‘여름의 클리셰’ • 8월의 편지 ‘파랑’ • 9월의 편지 ‘이름하는 일’ • 시월의 편지 ‘일의 슬픔과 기쁨’ • 11월의 편지 ‘나의 샹그릴라’ • 12월의 편지 ‘연말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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