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연휴내 비가 오더니 이제는 갑작스럽게 쌀쌀해진 날씨에 몸이 움츠러드네요. 그래도 사이사이 별사탕처럼 찾아온 드물게 온화한 날들에는 볕을 향해 씩씩한 걸음을 옮겼습니다. 다시 날이 풀릴 거라고 하니 가을 안에서 걸을 날들을 기쁘게 고대해 봐요.

지난달 이치코 실장의 글이 없어서 아쉬우셨던 분들 계시지요? ‘이치코의 코스묘스’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원고의 두 장 반을 읽고(총 세 장 반) ‘소소한 리뷰’인 줄 알았는데 절묘하게 코스묘스로 빠지더라고요. ‘이치코의 삼천포’로 타이틀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 싶지만, 본인은 코스묘스라고 하니 너그러이 읽어주시길 바라요.

이달의 ‘소묘의 여자들’에서는 오후의 소묘라는 세계를 보이고 만져지는 경험으로 구현해 주시는 ‘디자인소요’의 이경란 실장님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디자이너가 책과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과 감각을 엿볼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어요. 무엇보다 ‘좋아하는 일에 깊이 잠기는 사람’이 남기는 작지만 분명한 흔적들을 전할 수 있어 기쁩니다.

 

 

아주 작지만 분명한 이정표를 남기는 것

 

팀 소묘에서 귀여움과 웃김과 사랑스러움을 맡고 있는 분. 우리의 책들에 단단하고 아름다운 옷을 지어주시는 분. 오후의 소묘를 이야기할 때 디자인소요의 이경란 실장님을 빼놓을 수 없다. 올해는 무루 님 신작 에세이 <우리가 모르는 낙원>과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개정판, 그리고 리브레리아Q 서점원 에세이 <고르는 마음>까지 세 권의 책을 함께 작업했다. 게다가 <고르는 마음>은 오후의 소묘의 마흔 번째 책이자, 경란 실장님이 디자인해 주신 스무 번째 책이라는 사실을 책이 나올 즈음 알게 되어 더욱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소묘의 절반을 담당해 주신 셈이다. 오후의 소묘라는 세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며 소묘에 작고 짙은 흔적을 남겨주시는 분과 이야기 나눴다.

 

 

“한 권의 이야기를 한 컷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

소묘 소묘 레터 독자분들에게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경란 안녕하세요. 북디자이너 이경란입니다. 18년째 책과 함께하며 책의 다양한 모습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읽는 경험이 어떻게 시각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을까, 그 여백과 결을 들여다보는 일을 하고 있어요.
소묘 늘 바쁘게 작업하고 계시고 올해는 특히 도서전에서 타 출판사와 협업 프로젝트도 진행하셨지요. 요즘 근황은 어떠신지 여쭤보아요.

경란 올해 상반기는 정말 쉼 없이 달렸던 시기였어요. 본업인 북디자인뿐 아니라 도서전 팝업의 브랜딩과 아트 디렉팅까지 함께 진행하면서, 하루하루가 마치 현장 속을 뛰어다니는 듯했어요. 책이라는 정적인 세계 안에서 머물던 감각이, 공간과 오브제, 그리고 관람객의 취향으로까지 확장된 작업이었어요.

도서전이라는 공간은 책의 물성과 그에 대한 굿즈, 그리고 사람이 만나는 자리잖아요. 그 안에서 브랜드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는 건, 단순히 ‘보이는 것’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어떤 리듬과 경험으로 기억될 것인가’를 설계하는 일이라 더욱 어려웠어요

낯설지만 자극적이었고, 몸은 지쳤지만 마음은 오래 남을 에너지로 찼죠. 정신없이 바쁘면서도 매 순간이 흥미롭고 신나는 경험이었습니다. 좋은 기회를 주신 안온북스에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에요. 그 시기는 제게 일의 확장기이자, 디자인의 현장으로 나오는 전환점이었어요.

상반기를 바쁘게 보낸 덕분에, 하반기는 조금 숨을 고르며 지내고 있습니다. 미뤄두었던 공부를 시작했고, 그 연장선으로 여유 있는 프로젝트들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시도해 보고 있어요. 오랜 시간 쌓인 루틴에서 벗어나, 디자인의 ‘다른 얼굴’을 관찰하는 시기이기도 해요.

소묘 그래서일까요? 최근엔 실장님 포트폴리오 계정에 재밌는 작업이 많이 올라왔어요. 움직이는 책 표지라니! 저희 책들 <우모낙> <이로운 할머니> <고르는 마음> 표지 속 이미지들이 이상하고 자유롭게 생동하고 있더라고요. 표지 모션은 오래전부터 구상하고 해보고 싶어 했던 작업으로 알고 있는데, 실제로 구현하신 걸 보고 놀랐습니다. 이런 재밌는 아이디어들은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요?

경란 모션 표지의 시작이 언제였는지 아는 거의 유일한 분이 대표님이시죠. 한때 에프터이펙트를 공부하며 시도했지만 기술적 한계를 느껴 잠시 멈춰 있었어요. 그런데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서 훨씬 수월하게 구현할 수 있게 되어, 다시 도전해 보고 있습니다.

책을 디자인할 때 저는 한 권의 이야기를 ‘컷cut’보다는 ‘신scene’으로 떠올려요. 기억 속 장면들은 언제나 소리, 냄새, 온도처럼 여러 감각이 함께하니까요. 그 공감각적인 신 속에서 하나의 컷을 건져내는 일이 제 작업의 시작입니다.

이를테면 제가 작업한 책 표지가 일종의 컷이라면 그 컷이 존재하는 저만의 신이 있는데, 그걸 영상으로 구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어요. 그래서 모션 표지는 결국, 제가 바라본 이야기의 감각을 조금 더 온전히 담아보려는 시도죠. 움직임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통해 책이 가진 세계의 ‘공기’를 표현해 보고 싶었어요. 예상치 못한 배움과 즐거움이 많아서, 앞으로도 계속 실험해 보고 싶은 작업이에요.

 

 

소묘 하나의 컷을 건져내는 일, 인상적이네요. 문학동네에서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작업하신 소설들 표지를 기억해요. 은유적인 이미지와 단정한 타이포가 어우러진 직관적인 표지들이었던 것 같아요. <지도와 영토>(구판)도 그렇고, <희랍어 시간>도 2011년에 나왔는데 여전히 제일 좋아하는 한강 작가님 책 중 하나예요. 이렇게 보니까 정말 실장님 디자인은 타임리스다..!

‘디자인소요’라는 이름으로 독립하셨을 때가 2013년이었나요? 그때 처음 실장님께 책 디자인을 의뢰드렸죠. (막상 저희가 작업한 첫 책에는 이미지 없이 타이포로만 갔던 것 안 비밀 ㅎㅎ)

오랫동안 북디자인을 업으로 삼으면서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나만의 색깔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리고 실장님이 생각하는 좋은 디자인이란?

경란 크흙 저도 좋아하는 작업들 꼽아주셔서 넘나 영광이고요!!

처음 디자인을 시작했을 땐, 자신만의 색깔과 기준이 있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어요. 특히 그래픽 스타일에 대한 욕심이 컸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생각은 조금 달라졌어요. 지금도 저만의 색깔과 기준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 기준이 이제는 ‘그래픽 스타일’보다는 ‘책을 바라보는 태도’ 쪽으로 옮겨 갔어요. 이제는 어떤 시각적 표현이든, 책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차용해요.

다만 콘텐츠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나만의 스타일이 담기길 바랍니다. 북디자인은 결국 텍스트의 세계를 읽고, 그 세계의 내러티브를 시각적으로 다시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텍스트의 결을 따라가며 그 안에 숨어 있는 정서나 호흡을 시각으로 번역하는 것, 그 흐름 속에 아주 작지만 분명한 이정표를 남기는 것, 그게 제가 생각하는 ‘좋은 디자인’에 가까운 순간이에요.

소묘 북디자인의 경향이나 스스로의 작업 스타일에도 흐름과 변화가 있었을 것 같아요. 최근에는 어떤 것에 중점을 두고 작업하시는지, 앞으로는 또 어떤 실험들을 해보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경란 요즘은 새로운 기술과 매체, 특히 인공지능과 영상 작업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어요.

긴 텍스트를 시각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관습을 자주 생각하게 돼요. 우리는 어떤 문장을 읽을 때 무엇을 떠올리고, 또 어떤 이미지를 볼 때 무엇을 느끼는가. 그 인식의 층위와 감각의 연결을 고민하는 일이 제게는 점점 더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어요.

결국 제가 시도해 보고 싶은 건, 인간의 생각과 시각, 감정이 하나의 점으로 모이는 그 지점을 시각적으로 포착하는 일입니다. 그 교차점에서 디자인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감각과 사고가 만나는 구조로 확장될 수 있다고 믿어요.

 

“팀 소묘로 함께한 이상하고 웃긴 시간들”

소묘 올해 저희가 함께 만든 책이 세 권이에요. 오래 함께했다 보니 제가 실장님에게 많이 의지를 하는 편이잖아요.(?!) <우리가 모르는 낙원> 일러스트 관련해서도 책 작업 들어가기 전부터 두 후보를 놓고 의견 여쭙기도 했었고. 고민하던 지점들이 있었는데 실장님 말씀 덕분에 딱 결정할 수 있었거든요. 제가 보여드렸던 두 그림 작가 중 요안나 카르포비치 언니로 강하게 의견 주셨던 이유 기억하실까요?
경란 일상의 순간 속에서 만나는 낯선 존재들이, 무루 작가님의 이야기 속 인물들과 닮아 있다고 느꼈어요. 요안나 카르포비치의 그림은 그 낯섦을 따뜻하게 안아주죠. 묘하게 생동하는 시선, 미묘한 거리감… 조용한 표정 속에 서늘한 빛이 머물고, 그 안에서 신비로운 이야기가 천천히 깨어나는 느낌이었어요. <우리가 모르는 낙원>이 가진 정서도 그런 빛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소묘 <이로운 할머니>는 이번 개정판으로 네 번째 옷을 입었어요. 산책 에디션, 예스24 리커버 까지 5년간 한 책으로 네 번의 표지 작업을 하는 일이 흔치는 않지요. 책의 여정을 함께해 온 소회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실장님이 되고 싶은 할머니의 모습은? :)

경란 맞아요. 한 명의 디자이너가 한 종의 도서를 네 번이나 디자인하는 일, 또 있을까요? 감히 저만의 자랑이라 불러봅니다.^^ 이렇게 소중한 기회를 꾸준히 주신 소묘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를 처음 작업하던 시절은 제게 여러모로 특별한 때였어요. 오래 머물던 작업실을 떠나 새 공간으로 옮겼고, 삶에서도 크고 작은 변화들이 이어지던 시기였거든요. 그래서인지 이 책에는 제 삶의 사건들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나이 들어가는 일에 대한 제 시선을 조금은 다정하게 바꿔준 것 같아요.

그치만 저는 언제나처럼 이상하고 웃긴 할머니가 되고 싶습니다.

소묘 <고르는 마음> 같은 경우에는 작가노트 시리즈의 한 권이죠. 이 시리즈에 관해 출판잡지인 <기획회의>에 글을 싣게 됐는데 디자인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었어요.

“장정은 얇은 합지를 쓴 마루 양장에 오래된 노트를 연상시키는 앤틱한 형태로, 내지는 매거진처럼 도판을 다채롭게 배치하면서도 클래식한 서체와 적절한 여백을 활용한 단정한 레이아웃으로 가져갔다. 다소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편집자의 요구를 ‘디자인소요’의 이경란 실장님은 세심하고 균형 있게 구현해 주었다. 패턴으로 확장한 이 시리즈의 로고는 선과 면을 이루며 표지와 내기 곳곳에서 ‘작가노트’ 시리즈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어우려져 작가들이 애써 일궈온 작업과 그 기록이 단단하고 아름다운 집을 갖게 됐다.”

정말 뜨거운 아아 만들어주시는 분, 새록새록 감사한 마음이 들었답니다, 후후.

사실 책뿐 아니라 소묘의 시작부터 함께해 주셨잖아요. 커피 상점일 때부터요. 저희 로고부터해서 전반적인 디자인 콘셉트를 잡아주셨어요. 이후 스무 종의 책에 이르기까지, 소묘의 색깔을 정립해 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요. 저희 책을 디자인할 때 특별히 떠올리는 감각이나 기준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경란 그야 당연히 우리 작은 고양이님이요…ㅋㅋ

커피 상점 시절부터 지금의 디자인 콘셉트까지 함께 만들며, 소묘만의 색을 차곡차곡 쌓아온 시간을 더듬어보면, 제가 소묘의 책을 디자인할 때 떠올리는 기준은 한마디로 ‘작고 온기 있는 장난기’예요. 소묘의 로고가 된 고양이 히루가 보여준 똥꼬발랄함과 팀 소묘가 지닌 친근한 결이 작업 전반의 길잡이가 됩니다. 장난스럽고 따뜻하게, 그러면서도 포근하게 안아주는 느낌.

저는 스스로를 몽글하다고 보진 않지만, 소묘에는 그런 몽글한 귀여움이 가득하니까요. 결국 큰 그림은 책을 만드는 사람과 닮은 디자인이에요. 작고 따듯하고 가끔은 막 괴롭히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우면서도 진실한, 그런 성격이 책의 이미지, 여백의 호흡, 타이포의 리듬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신경 써요. 세심한 질감과 소소한 디테일을 통해 독자가 책을 ‘만지고 싶은 감각’까지 느끼게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월간소묘의 편지하는 마음] 전시가 열렸던 디자인소요의 스튜디오

 

[계속 읽기]

 

 

 

미국이나 일본 드라마를 즐겨 보는 편입니다. 딱히 의도한 게 아니라 OTT 서비스 환경에서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 재밌다고 하면 웬만하면 찾아보는 편입니다. 올해 본 목록만 해도 <웬즈데이 S2>, <더 베어 S4>, <오오마메다 토와코와 세 명의 전 남편>, <바라카몬>, <가공 OL 일기>, <안도르 S2>, <데어데블: 본 어게인>, <핫 스팟>, <세브란스: 단절 S2>, <사일로 S2>, <슬로 호시스 S4>, <리전 S1 S2>, <블랙 도브>, <아수라처럼>, <엄브렐러 아카데미 S4> 등이 있습니다. 영국은 어떤 작품이 영국 드라마인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미국에 업혀 가는 걸로 하고, 그 외 국가의 드라마는 접할 기회가 드물다 보니 최근 몇 년을 통틀어도 얼마 안 됩니다. <종이의 집>(스페인), <다크>(독일), <뤼팽>(프랑스) 그리고 <상견니>(대만)!! 정도가 기억날 뿐이네요. 그렇다면 한국 드라마는?

 

안 봅니다. 거의. <정년이>(2024)와 <악귀>(2023)(김태리가 나오니까!!) 정도가 기억나고 그전에 봤던 마지막 드라마는 <킹덤: 아신전>(2021)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본 게 없습니다. 이상하게 한국 드라마는 손이 안 갑니다. 브라운관에, 요즘엔 OLED나 QLED라고 해야 하려나요, 아무튼 화면 속에서 재현되는 한국적 상황을 못 견디는 편입니다. 등장인물의 ‘한국적’ 대사, ‘한국적’ 감정, ‘한국적’ 갈등, ‘한국적’ 화해와 용서 등등을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시대적 배경이 조선이거나 서기 3000년이라도 소용없습니다. 한국의 연장선일 뿐이니까요. 저는 그냥 한국을 싫어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미국이나 일본은 좋아하느냐고요? 그럴 리가요. 거긴 트XX 같은 놈들이 있는 곳인데. 두 나라 모두 어쩔 땐 한국보다 더 꼴 보기 싫은 나라들입니다. 그래도 드라마 속 상황들이 ‘미국적’, ‘일본적’이기 때문에 거리를 두고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미드, 일드를 보는 동안엔 적어도 “아, 젠장 내가 한국에 살고 있지”라며 화들짝 놀라진 않으니까요. 한국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그런 제가 최근에 한국 드라마 두 편을 연달아 보고 있습니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다 봤고 <은중과 상연>은 3화까지 달렸습니다. 재밌더구만요!! <은중과 상연>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10대부터 함께한 은중과 상연. 동경과 질투, 애증이 20대, 30대를 채우다 결국 돌이킬 수 없이 멀어졌다. 이제 마흔둘, 은중은 상연의 죽음에 동행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공식 소개 글) 아직 3화까지밖에 못 본 터라 주인공 은중과 상연의 나이가 (만으로) 스물에 머물러 있습니다. 서른까지 어떻게 둘의 삶이 포개지고 엇갈리는지 알 수 없지만 스물까지의 이야기는 무척 좋았습니다. 저에겐 왠지 모르게 한국적이지 않은 느낌이었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지 않고 이야기를 거칠게 휘두르지 않으면서도 두 여성의 삶을 섬세하고 풍부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주연 배우들의 연기는 물론이고 아역의 연기도 좋았고요. 아직 열두 편이나 남아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이대로라면 충분히 좋은 드라마로 기억에 남을 듯합니다.

 

다만 <은중과 상연> 역시 피해 가지 못하는 한국적 상황이 있긴 했습니다. 그놈의 나이. 92년에 은중과 상연이 처음 만났을 때 몇 학년이었지? 천상학이 97년 수능에 합격했으니까 78년생인가? 은중이 01학번이니까 2024년엔 (만으로) 마흔둘, 그럼 상연은 그 나이에 백상예술대상 특별상을 받는 건가? 등등. 미드나 일드를 볼 때는 한 번도 의식해 본 적 없는 그놈의 나이를 본능적으로 머릿속에서 셈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정말 뼛속부터 한국 사람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대체 그게 왜 궁금한 건데?? 그리고 특정 연도에 대한 본능적 반응은 주인공의 나이 계산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92년, 1994년, 1997년, 2001년 이런 식으로 화면에 자막이 등장할 때마다 당시 제 개인의 과거사와 한국의 현대사가 자동적으로 재생되었습니다. 머릿속의 강제 회상 신으로요. 1992년, 입학, 황영조 금메달, 대통령 선거,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비준, 성수대교 붕괴, 학생회장 선거, 1997년 졸업, IMF.. 드라마를 보는 데 방해가 될 정도로 말이에요. 그러다가 그 일들이 몇 년 전이었는지를 생각하곤 갑자기 우울해졌습니다. 아직 생생한 것 같은데 한참 전의 옛날 일이구나.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어. 정말로.. <응답하라> 시리즈(안 봤음)라면 몰라도 <은중과 상연>이 이런 기분을 느끼라고 만든 드라마는 아닐 테지만 아무튼 그런 기분이 들고야 말았습니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은중과 상연>보다는 조금 복잡한 드라마였습니다. “국내 최고의 프로파일러가 수사 중인 살인사건에 얽힌 딸의 비밀과 마주하고, 처절하게 무너져가며 심연 속의 진실을 쫓는 부녀 스릴러.”(공식 기획 의도) 아버지와 딸 사이를 가르는 미묘한 감정과 태도의 변화가 중요하긴 하지만 극을 이끌어가는 핵심 사건이 있고 그 살인범을 잡아야 한다는 미션이 분명했습니다. 한국 드라마를 이렇게 만든다고?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 역시 한국적 상황에 대한 각성을 피해 갈 수는 없었습니다. 주인공인 장 팀장은 마지막에 사표를 제출합니다. ‘경찰로서 선을 넘었을 때 이미 결심했던 일’이라고 하면서요. 딱히 놀랄 일은 아니었습니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저 양반은 이 사건 끝나면 그만두겠구나 싶었거든요. 문제는 그렇게 최종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다음이었습니다. 갑자기 장 팀장이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드라마에서 묘사된 걸 봤을 때 경제적으로 여유 있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딸이 고등학생이면 아직 돈 들어갈 데가 많을 텐데 퇴직하고 뭘 하려나? 경찰 연금으로 가능한가? 그 성격에 자기 전공 관련된 일을 할 것 같진 않고.. 식당을 차리려나? 아니면 카페, 치킨집? 드라마 캐릭터한테 참.. 오지랖도 넓다 싶긴 했지만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어떤 식으로든 노후를 준비해야 하고 거기다 고양이가 여섯이나 있는데..

 

그러다 갑자기 노후준비가 궁금해졌습니다. 노후준비란 뭘까요? 언제부터 사용된 개념일까요? 한국을 벗어난 나라들에서도 노후준비란 걸 하고 있겠죠? 영어로는 뭐라고 하나 검색해 봤더니 retirement planning 혹은 preparing for retirement라고 알려주네요. 은퇴라는 단어가 들어가니 훨씬 직관적으로 이 개념이 자본주의에서 나왔음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종결점이 정해져 있는 경제활동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조선시대 농부한테 은퇴가 어딨나요. 소수의 지배계급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생계 활동의 시작부터 죽음까지 특별한 단절 없이 똑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늙었을 때를 대비해 무언가를 준비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늙어감이 서러웠을 수는 있겠으나 늙었다고 굶어 죽을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 시절은 지금과 달랐습니다.

 

[계속 읽기]

 

 

 

📚 [고르는 마음: 리브레리아Q 서점원 노트] 소식들

🤎 리브레리아Q에서 열린 첫 북토크 후기

리브레리아Q의 5년을 묶은 책인 만큼 손님분들과 함께 만든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 비밀Q와 멤버Q로 또 북클럽으로 함께해 주신 분들, 처음 방문해 사진으로만 보던 공간을 눈에 담으며 벅찬 마음 표현해 주신 분들, 문을 연 순간부터 집처럼 드나들며 vip 단골손님이 되신 분까지- 책방에서 하는 첫 북토크에 와주신 독자님들 한 분 한 분 너무나 애틋했어요. 사연은 달라도 리브레리아Q를 통해서 우리가 읽고 배우고 향하는 세계가 넓어졌다는 마음 하나는 모두 같았고요. 눈물의 작은 파도들이 밀려오던 순간들을 우리 무사히 넘겼네요(?!) [사진과 함께 보기]

• 애정 어린 시선으로 책 속 작은 조각들에까지 구석구석 비추어 이야기 나눠주셨던, 다정한 진행의 장일호 기자님 후기

• 우리의 서점원Q 정한샘 작가님의 후기

 

🔔 익산의 몽카페 르물랑에서 <고르는 마음> 북토크가 열립니다. 이 아름답고 다정한 조합 너무나 기대되고요. 반갑게 만나요.

• 10월 24일 금요일 저녁 7시 | 카페 르물랑(익산시 중앙동) @cafe.le.moulin

• 북토크 기념 기획전으로 [리브레리아Q 미니 전시 & 오후의 소묘 에세이 특별전]도 함께 열리고 있어요.

 

📚 11월에는 대전의 한쪽가게에서도 북토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찬찬히 소식 드릴게요.

 

🌳 [우리가 모르는 낙원] 무루 작가 X 신길도서관 북토크 후기

영등포에 새로 개관한 신길도서관에서 무루 작가의 <우리가 모르는 낙원> 북토크가 열렸습니다. 마흔 분 남짓 자리 꽉 채워주셨는데요. 모두가 돌아가며 그림책에 대한 자기만의 해석과 이야기를 들려주신 시간이 무척 귀하고 뭉클했어요.

인생이라는 여정은 혼자 헤쳐나갈 수밖에 없기에 필연적으로 외롭고, 함께인 시간은 찰나일지 몰라요. 하지만 이날과 같은 다정한 마주침의 순간이 있어 고독의 시간에도 기쁘게 걸어갈 힘을 얻습니다.

무루 님이 소개해 주신 두 권의 그림책 중 <나의 오두막> 속 가장 좋아하는 장면과 그 장면에 관한 <우모낙>의 문장을 나눠봅니다. 이 안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낙원의 풍경이 되어주는 일의 힌트를 발견하실 수 있을 거예요 :) [사진과 함께 보기]

 

💝 [소묘살롱 X 동네책방] 찾아가는 오후의 소묘 시즌1

⟡ 10월 18일 토요일, 평창의 미지서가에서 첫 번째 소묘살롱이 열렸습니다. 미지서가에서 담아주신 풍경을 전해요. 고맙습니다.

⟡ 두 번째 소묘살롱 | 소묘 편집자가 들려주는 오후의 소묘 이야기

• 11월 1일(토) 오후 3시 | 바베트의 만찬(대전) @babette_bookst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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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소묘살롱 | 모니카 바렌고의 그림 세계

• 11월 8일(토) 오후 4시 | 티티새와 나무(부산) @titisae_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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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번째 소묘살롱 | <여전히 나는> 깊이 읽기: 모니카 바렌고가 그려낸 사랑과 그리움

•11월 13일(목) 저녁 6시 30분 | 오늘의 페이지(목포) @todays_pag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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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첫 편지 ‘생기’   •  3월의 편지 ‘질문의 자리’  •  4월의 편지 ‘장소라는 몸’  •  5월의 편지 ‘낭만’  •  유월의 편지 ‘어느 틈에’  •  7월 ‘편지하는 마음’  •  8월의 편지 ‘빨강’  •  9월의 편지 ‘어스름’  •  시월의 편지 ‘herbarium’  •  11월의 편지 ‘그 속에는’  •  12월의 편지 ‘연말정산’

2021년   첫 편지 ‘얼굴들’  •  2월의 편지 ‘걸음걸음’  •  3월의 편지 ‘Little Forest’  •  4월의 편지 ‘Now or Never’  •  5월의 편지 ‘창으로’  • 유월의 편지 ‘비밀의 무늬’  •  7월의 편지 ‘여름의 클리셰’  •  8월의 편지 ‘파랑’  •  9월의 편지 ‘이름하는 일’  •  시월의 편지 ‘일의 슬픔과 기쁨’  •  11월의 편지 ‘나의 샹그릴라’  •  12월의 편지 ‘연말정산’

2022년  1월의 편지, 새해 첫 책  •  2월의 편지, 어려움에 대하여  •  3월의 편지, 구름의 나날  •  4월의 편지, 사랑의 모양  •  5월의 편지, 비화  •  6월의 편지, 사라진다는 것  •  7월의 편지, 환대  •  8월의 편지, 정원 너머 어렴풋이  •  9월의 편지, 함께 해피엔딩  •  10월의 편지, 마음을 쓰고 계신가요?  •  11월의 편지, 작가의 발견  •  12월의 편지 ,연말정산 

2023년 1월의 편지, 하얀 꽃들이 피어나  •  2월의 편지, 차를 듣는 시간  •  3월의 편지, 조용히 다가오는 것들  •  4월의 편지, 꿈을 꾼다는 건  •  5월의 편지, 다정한 반복으로  •  6월의 편지, 다시 태어나기를  •  7월의 편지, 촛불을 켜는 밤  •  8월의 편지, 치코의 일기  •  9월의 편지, 아름다움과 함께  •  10월의 편지, 언제 나와요?  •  11월의 편지, 오늘의 주인공은 너  • 12월의 편지, 연말정산 

2024년 1월의 편지, 새삼 새 마음  •  2월의 편지, 일상 맞춤형 실감 블록  •  3월의 편지, 사랑과 우정의 세리머니  •  4월의 편지, 길고양이 돌봄 지침  •  5월의 편지, 절기 좋아하세요?  •  6월의 편지, 우리를 홀린 OOO  •  7월의 편지, 이 모든 일이 다 영화 같아요  •  8월의 편지, Sometimes, again  •  9월의 편지, 여름의 기억  •  10월의 편지, 힙hip하지는 못해도  •  11월의 편지, 작은 도망  •  12월의 편지, 연말정산

2025년 1월의 편지, 숨 고르기  •  2월의 편지, 이상한 용기  •  3월의 편지, 충분한 사랑  •  4월의 편지, 계속 그리고 싶은 것들  •  5월의 편지, 무루가 사랑한 여자들  •  6월의 편지, 마음을 두드리는 순간  •  8월의 편지, 다정한 고집으로  •  9월의 편지, 낙원의 여름을 건너  •  10월의 편지, 흔적을 남기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