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나는 흰빛에서 푸름을 발견했습니다. 그날, 흰색이 얼마나 많은 색을 품고 있는지, 이 세상 모든 색이 얼마나 많은 색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를 기억합니다.”
—파울 더모르, <하얀 방> 저자의 말
2023년 첫 편지를 씁니다. 한 해 잘 열어내셨을까요? 저는 폭풍 같던 12월을 떠나보내고 1월 첫날부터 편도염을 앓기 시작했어요. 약을 먹고 자주 누웠습니다. 이제는 제법 나았고 그것 말고는 특별한 일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타고서 여느 때처럼 보냅니다. 일을 하고 고양이들을 돌보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고 책을 읽고 여자배구를 보면서요. 그러면서도 마음 한 편에는 새해에 하나라도 나아지는 게 있어야 할 텐데, 작은 초조가 자리 잡습니다.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들 중 자신이 통제할 수 있고 실행 가능하며 결과를 비교적 정직하게 얻을 수 있는 한 가지는 운동일 거예요. 지난 일 년 남짓 부상과 통증과 바쁨을 핑계로 몸을 전혀 쓰지 않았더니 정말로 못쓰게 되었습니다. 바스라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사무실 근처 필라테스 센터에 등록했어요. 아- 이 첫걸음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센터를 나오자 비가 쏟아졌습니다. 황급히 버스를 타고 집 앞에 내렸는데 비가 함박눈으로 바뀌었어요. 한순간이었습니다. 초조가 기쁨이 되는 것이.
─✲─
짧게 앓는 동안엔 하얀 천장을 오래도록 보았어요. 그곳에 <하얀 방>이 상영되었고 여러 장면들이 순서도 없이 떠오르고 펼쳐지고 흘러갔습니다. 한 장면 속 침대에 누운 채 하얀 집을 얼굴에 덮은 하양, ‘저 소녀가 나’였어요. 이어지는 장면에서 하양은 새의 가면을 쓰고 색색의 날개를 달고 창문 앞에 서 있습니다. 한낮에 쌓인 지루함과 답답함을 딛고, 혹은 여러 날 어쩌면 아주 오래 키워온 갈망, 꿈을 품고서.
어둑하니 푸른 방, 희고도 노랗게 빛나는 창, 하양의 뒷모습. 긴장과 기대가 농축된 이 장면에서 누구나 잠시 숨을 멈출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 페이지에는 글도 없습니다. 오롯이 그림만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요.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를 만났을까요? 어떤 감정이 그곳에서 피어났을까요?
<하얀 방>의 그림 작가인 카텨 페르메이러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파울의 글은 마치 물이 졸졸 흐르는 것과 같이 감정이 없는 매우 특이한 텍스트였기에 그림에 적합한 분위기를 얻기 위해 잠시 내 안에서 가라앉게 두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이 그림책이 우리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면 그림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크겠지요. 하지만 파울의 말도 들어보아야 해요. 그는 이 글을 기쁨으로부터 써내려갔다고 밝혔습니다. 고통과 아픔이 그에게 준 예민한 지각과 세상을 섬세히 바라보게 하는 시선, 그로부터 발견한 보이는 것 너머의 아름다움과 그 순간의 환희. 그것들을 가라앉게 두어야 했던 쪽은 우선 파울 그 자신이었을 거예요. 자신의 기쁨을 직접적으로 노래하기보다 그 안에 담긴 진실을, 거기서 새롭게 피어나는 하양의 이야기를 추수합니다.
카텨는 파울이 들려주는 하양의 하얀 꿈들을 자신의 내면에 가라앉히고 그 깊은 곳에서 길어올린 감정과 풍경을 그려냅니다. 우리는 그 조각들을 바라봐요. 이 그림책에서 파울의 글이 씨앗이라면 카텨의 그림은 그 씨앗을 틔워낸 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크고 하얀 꽃과 작고 하얀 꽃.’ 또 그 꽃들은 다시 씨앗이 되어 우리에게 심기겠죠. 저마다의 토양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피어날 거예요. 그렇게 우리가, 작가와 책과 독자가 함께 가꾼 다채로운 정원의 풍경이 눈앞에 선히 펼쳐집니다.
‘하얀 나무 아래 하얀 풀이 넘실거리고, 하얀 꽃들이 피어나.’
꽃처럼 피어난 기쁨 속에서 씨앗을 얻고 다시 피워내고 또 씨앗이 되고 다시금 피어나는 그 과정 안에서 하나의 씨앗이 정원을 이루고 또 하나의 숲을 이뤄요. 이 풍경 속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새삼. 한 해를 갈무리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며 초조했던 마음은 가라앉고 오롯한 즐거움이 떠오릅니다.
“정원은 항상 생성의 장소이므로 정원을 만들고 관리하는 것은 희망의 몸짓이다. 지금 심는 이 씨앗들이 싹 터 자라고, 이 나무가 열매를 맺으리라는, 봄이 오리라는, 그래서 뭔가 수확이 있으리라는 소망 말이다.”
—리베카 솔닛 <오웰의 장미>
초조가 기쁨이 되고, 씨앗이 꽃이 되는 것은 언제일까요. 그것이 생성될 적합한 조건, 그리고 향하고자 하는 곳으로의 작은 한 걸음. 장미를 심는 한 남자의 몸짓처럼.
[…]
지난달 한쪽가게에서 사 온 <기내식 먹는 기분>을 읽다가 이번 달 ‘이치코의 코스묘스’에서 쓸까 말까 망설이던 주제를, 평소 열혈 팬임을 자처하는 정은 작가님이 비슷하게 쓰신 걸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이 얘기를 써야겠다, 라고 흔쾌히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작가와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건 김초엽 작가님의 <책과 우연들> 덕분이에요. SF 작가로서의 읽기와 쓰기, 거기다 스스로의 변화와 성장에 관해 꼼꼼하게 써 내려간 글이 너무 좋았습니다. 특히 에세이 전반에 흐르는 상큼한 공대(작가님은 이과 전공이시지만) 느낌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고요. 아무튼 이렇게 이번 달 원고를 시작할 수 있게 만들어주신, 아울러 이미 원고지 9매가량의 분량을 확보해주신 두 분께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
2022년의 마지막 날, 오랜만에 판교를 다녀왔어요. 현대어린이책미술관(MOKA)에서 ‘두 개의 시간 : 2022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어워드’라는 제목의 전시가 열리고 있길래 초등학교 2학년인 조카와 함께 구경했어요. 전시는 재미있었습니다. 전시된 작품들도 좋았고 공간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올 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어요. 판교의 낯선 풍경 때문이었어요. 전시를 보고 차를 마시고 저녁을 먹는 내내 미술관이 있는 백화점 건물 안에서만 있었지만, 전철역에서 백화점으로 가는 고작 몇십 미터를 걸으며 보았던 도시의 모습이 너무 생경했습니다.
가끔 나들이하는 번화가의 최대치가 합정-망원 정도인 터라 그렇게 높고 커다란 빌딩이(빌딩만!) 줄지어 있는 걸 볼 일이 평소에는 없습니다. 어쩌다 강남대로 한복판에(중앙차로 버스정류장이니까요..) 내던져지는 것만으로 약간의 멀미를 느낄 정도로 말이에요. 그런데 그날은 빌딩 숲에 대한 울렁증에 더해 평소 생각지 않았던 질문이 따라붙었습니다. “저런 곳에서 고양이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판교라고 해서 길고양이가 없지는 않을 거예요. 다만 낯선 방문객의 눈에 띌 만큼 활발하게 지내지는 못하는 것일 테죠. 어딘가에 꼭꼭 숨어서, 아마도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불편한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어요.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는 일이라니.
“한번은 낯선 길 산책 중에 낯익은 마트 간판을 보고 들어갔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계산대 앞마다 무장한 경찰이 있었고, 고객은 모두 흑인이었다. 상품들의 배치도 달랐다. 똑같은 기성품들이었지만 진열된 상품이 결코 같아 보이지 않았다. […] 그것은 분명히 분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곳에 가보지 못했다면 나는 그런 곳이 없다고 그런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구별하고 분리하고 잊어버리기 위해 만들어놓은 곳이었다.”
– <기내식 먹는 기분>, ‘보이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 [월간소묘: 살롱] 1월의 모임 ‘하얀 방’
<하얀 방>을 함께 읽습니다.
줌(ZOOM)을 통해 온라인으로 진행되며 신청하신 메일 주소로 모임 하루 전 참여 링크를 보내드립니다.
・ 1월 14일(토) 오후 3시
・ 줌(ZOOM) 온라인 진행
・ 참가비 5,000원
・ 신청하기
✏️ [하얀 방] 후기로 만나보세요.
-“올해 만난 가장 아름다운 책이다.” _북튜버 해나 님 @hannahbookshelf
-“천천히 읽고 또 읽어서 모든 장면과 문장을 외운 다음 언제 어디서든 떠올릴 수 있길 바라게 되는 책.” _ 문이영 작가님 @mooneeyeong
-“외롭고 단조로웠던 방 안이 자연경관으로 열리는 과정이 포근하고 무척이나 근사하다. ‘우리 시대의 모네’라 불리는 페르메이러의 그림 한 장, 한 장이 그야말로 작품이다.” _<서울신문> 김기중 기자 2023년 1월 5일자 서평
🍄 [버섯 소녀] ‘그림책 신간 크리틱(@picturebook.critics)’ 선정 2022 올해의 책 비평 부문 선정 👏👏👏
선정자 한윤아(@tigress_on_paper) 선생님의 코멘트를 함께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
“제가 #그림책신간크리틱에서 올해의 그림책으로 뽑은 작품은 김선진의 『버섯 소녀』(오후의 소묘)입니다. 책을 덮은 후에도 여운이 꽤 오래 남았고, 다시 펼 때마다 감각이 다시 재생되어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느껴지는 책입니다. 그런 신비로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분석적으로 따져보아도 아직도 해명이 되지 않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버섯의 생태에 대한 괴학 지식을 바탕으로, 그것을 소녀의 모습으로 형상화해 숲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품입니다. 숲의 습기나 온도 여러 유기체가 내뿜는 충만한 호흡 등 보이지 않는 기운을 재현합니다. 숲에서 천천히 걷고 헤맸던 기억이 내 몸에도 전달되는 듯 합니다. 버섯은 마치 세계의 붕괴 이후 시간을 천천히 준비하는 활동, 다른 존재/사물을 살피는 활동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이해 같는 건 상관하지 않는 무심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소녀가 남긴 조용한 전언을 들으며, 차분하게 새해를 준비할 수 있은 힘을 주는 작품입니다.”
🐰 2023 계묘년을 맞이하며 오후의 소묘 토끼들
🗒 2023 오후의 소묘 상반기 라인업 미리보기
— 차를 담는 시간: 토림도예 도예가 노트 (작가노트 시리즈 2) | 김유미
— 조용함을 듣는 일 (화집/그림 에세이) | 김혜영
— 세상 모든 밤에 (그림책) | 세실 엘마 로제 글, 파니 뒤카세 그림
1월의 편지, 어떠셨나요?
답장을 남겨주세요.
[월간소묘 : 레터]는 책과 고양이를 비롯해 일상의 작은 온기를 담은 다양한 글을 전합니다. 매달 두 번째, 네 번째 월요일에 만나요.
[월간소묘: 레터]
2020년 첫 편지 ‘생기’ • 3월의 편지 ‘질문의 자리’ • 4월의 편지 ‘장소라는 몸’ • 5월의 편지 ‘낭만’ • 유월의 편지 ‘어느 틈에’ • 7월 ‘편지하는 마음’ • 8월의 편지 ‘빨강’ • 9월의 편지 ‘어스름’ • 시월의 편지 ‘herbarium’ • 11월의 편지 ‘그 속에는’ • 12월의 편지 ‘연말정산’
2021년 첫 편지 ‘얼굴들’ • 2월의 편지 ‘걸음걸음’ • 3월의 편지 ‘Little Forest’ • 4월의 편지 ‘Now or Never’ • 5월의 편지 ‘창으로’ • 유월의 편지 ‘비밀의 무늬’ • 7월의 편지 ‘여름의 클리셰’ • 8월의 편지 ‘파랑’ • 9월의 편지 ‘이름하는 일’ • 시월의 편지 ‘일의 슬픔과 기쁨’ • 11월의 편지 ‘나의 샹그릴라’ • 12월의 편지 ‘연말정산’
2022년 1월의 편지, 새해 첫 책 • 2월의 편지, 어려움에 대하여 • 3월의 편지, 구름의 나날 • 4월의 편지, 사랑의 모양 • 5월의 편지, 비화 • 6월의 편지, 사라진다는 것 • 7월의 편지, 환대 • 8월의 편지, 정원 너머 어렴풋이 • 9월의 편지, 함께 해피엔딩 • 10월의 편지, 마음을 쓰고 계신가요? • 11월의 편지, 작가의 발견 • 12월의 편지 ,연말정산
2023년 1월의 편지, 하얀 꽃들이 피어나 • 2월의 편지, 차를 듣는 시간 • 3월의 편지, 조용히 다가오는 것들 • 4월의 편지, 꿈을 꾼다는 건 • 5월의 편지, 다정한 반복으로 • 6월의 편지, 다시 태어나기를 • 7월의 편지, 촛불을 켜는 밤 • 8월의 편지, 치코의 일기 • 9월의 편지, 아름다움과 함께 • 10월의 편지, 언제 나와요? • 11월의 편지, 오늘의 주인공은 너 • 12월의 편지, 연말정산
2024년 1월의 편지, 새삼 새 마음 • 2월의 편지, 일상 맞춤형 실감 블록 • 3월의 편지, 사랑과 우정의 세리머니 • 4월의 편지, 길고양이 돌봄 지침 • 5월의 편지, 절기 좋아하세요? • 6월의 편지, 우리를 홀린 OOO • 7월의 편지, 이 모든 일이 다 영화 같아요 • 8월의 편지, Sometimes, again • 9월의 편지, 여름의 기억 • 10월의 편지, 힙hip하지는 못해도 • 11월의 편지, 작은 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