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있어요?

조카가 귀엣말로 속삭입니다. ‘아니, 없는데. 도연인 있니?’ 물었더니 많다고 하지요.

-비밀 많은 사람이 작가가 되는 거래.

작가가 꿈인 조카가 눈을 반짝여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면서 누구에게나 말하는 거야, 비밀을.

응? 조카가 갸우뚱해요. 아이의 엄마가 덧붙였어요.

-도연이도 그러잖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하면서 엄마랑 친구들한테 얘기하는 거.

슬며시 웃으며 끄덕입니다. 입가와 눈가와 눈동자와 발간 볼에 비밀의 무늬가 새겨진 수상하고도 예쁜 표정이에요. 비밀 없는 저도 비밀스레 따라 웃게 되는.

 

*’김혜영의 혜영들’과 ‘대봉이의 일기’는 숨을 고르고 다음 달부터 다시 인사드립니다.

 

 

타원형의 화단에는 아마 백여 그루쯤 될 듯싶은 식물의 줄기가 하트 모양으로 혹은 기다란 혓바닥 모양으로 잎사귀를 반쯤 내밀며 올라오고, 그 끄트머리엔 갖가지 채색된 점박이 무늬를 한 빨강, 파랑, 혹은 노랑 꽃잎이 펼쳐지고 있었다. …꽃잎이 움직일 때마다 빨강, 파랑, 노랑의 빛깔들이 서로 겹쳐지면서 그 아래에 있는 한줌의 갈색 흙을 가장 영롱한 색채로 물들여놓았다. 그 빛은 매끄러운 잿빛 자갈 위에, 혹은 나선형 줄무늬가 있는 갈색 달팽이 껍데기 위에 떨어지기도 하고, 혹은 빗방울 속으로 들어가 그 얇은 표면을 빨강, 파랑, 노랑의 강렬한 빛으로 팽창시키는 것이 급기야는 터져서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단편 <큐 가든> 중에서

 

열흘이나 되었을까요. 두 뼘의 정원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분홍낮달맞이꽃, 꽃양귀비, 델피늄썸머, 러시안세이지, 솔체, 딜과 바질과 고수과 차이브… 모두 집 안의 여섯 고양이를 피해 바깥으로, 위로. 저에게는 큐 가든 못지않은 옥상 가든이에요. 약한 잎들만 흙에 붙어 있어 살기나 할까 걱정하던 하루이틀이 지나고 꽃대가 오르고 꽃망울이 맺히고 분홍낮달맞이부터 하나둘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운이 좋다면 서리가 내릴 상강까지는 차례로 분홍, 빨강, 노랑, 파랑, 보라의 꽃잎이 펼쳐지겠지요. 꽃을 보러 하루 두어 번 옥상을 오르는 일은 비밀은 아니지만 분명 비밀스러운 데가 있는 내밀한 일과입니다. 어느 날은 꽃 아래로 하얀 벌레 떼를, 어느 날은 빨간 벌레 떼를 봅니다. 흙 사이에서 날아오르는 까만 벌레를 향해 손뼉도 칩니다. 옥상의 다른 한편에 무성한 작물들을 염탐하며 감탄하기도 하고요. 꺄르르 웃는 소리를 따라가면 다른 옥상에서 나이 지긋한 남자 여자가 이불 하나를 털고 있어요. 무슨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는 걸까. 이불을 차곡차곡 접어가며 가까워지는 모습이 어째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지. 내가 아는 그림책 속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듭니다. 제 비밀이라는 것은 이게 다예요.

버지니아 울프는 이런 보잘것없는 비밀들을 ‘강렬한 빛으로 팽창시키는’ 소설을 씁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비밀스럽게 갈망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 원하는 것을 모르는 여성, 아무도 모르는 여성, 그러니까 그들보다는 어느 종마의 일기가 더 볼 만하다고 말할 만큼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는 이들의 일기와 편지를 살피면서요. 혹은 벽 위에 붙은 달팽이와 큐 가든의 화단을 지나는 달팽이, 숨겨놓은 보물을 찾아다니는 유령 부부, 연못 밑바닥에서 떠오르는 상념들의 목소리를 좇기도 하죠. 단편 하나하나 모두 ‘터져서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비밀의 무늬의 세밀화 같습니다. 끝내 뭉개버리는 손짓이 짓굿고 장난스럽게 느껴지기도 해요. 그것은 그림자의 세밀화에 가깝겠습니다.

 

많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따금씩, 오랜 세월을 두고, 홀로 이곳을 찾아와서는 그들의 생각을 물속에 떨어뜨리기도 하고, 의문을 던지기도 했겠지요. 이 여름날 초저녁에 누군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상념과 그리움, 의문과 고백, 그리고 환멸을 막 건져 올려 백일하에 드러내는 듯한 순간들이 있다고는 해도, 숟가락에서는 뭔가 늘 미끄러져 내리고 우리는 다시금 연못 속으로 되돌아갑니다. 그것이 아마도 우리가 연못가에 앉아 물속을 들여다보는 걸 좋아하는 이유겠지요.

-단편 <연못의 매력> 중에서

 

 

지난해 유월과 칠월에 걸쳐 ‘편지하는 마음’ 전시를 열었죠. 월간소묘 레터를 종이에 옮겨 직접 만지고 볼 수 있도록 꾸렸습니다. 벌써 한 해가 지나고 또 그만큼의 편지들이 쌓였네요. 이렇게 이메일로 온라인으로 편지를 보내기도 하지만 저는 손으로 쓰는 것도 좋아합니다. 엽서를 자주 쓰고 달에 두어 번은 친구들에게 긴 서신을 전해요. 그때마다 자주 이용하는 카드와 편지지는 편지가게 ‘글월’의 것입니다. 글월은 ‘편지’를 뜻하는 순우리말이자, 편지를 높여서 부르는 말이라고요.

편지지를 앞에 두면 문어체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신형철 평론가는 편지를 ‘문어체의 공간’이라고 칭했어요. “구어체로는 담을 수 없는, 그 자신도 몰랐던 진심이 ‘발굴’되고 심지어 ‘생산’되는 일”이 일어나는 문어체만의 특별한 힘이 일어나는 공간이라고 말이죠.(<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편지지에 그어진 줄들은 그 힘을 끌어내는 비밀의 무늬처럼 보입니다. 백지의 작은 공간인 엽서는 그보다 구어체가 어울리는 공개적이고 가벼운 공간처럼 느껴져요. 자신도 몰랐던 진심을 담아내는 일이 아직 무섭거나 무겁게 느껴진다면 엽서와 편지지의 사이에 있는 글월의 ‘특별한 날’ 카드를 권해봅니다. ‘당신에게 특별한 날은 언제인가요?’라는 뜻의 문장을 담은 카드는 바깥 면에 프랑스어로 월과 일이, 안쪽 면에는 편지지처럼 줄이 인쇄되어 있어 편지를 쓴 날이나 서로에게 특별한 날을 표시하고 마음을 넉넉히 적어 보낼 수 있어요. 어느 날이든 특별한, 편지하기 좋은 저녁들이 이어지는 유월입니다.

 

특별한 날 카드 세트

실은 오월에 나온 ‘사랑의 형태’를 소개하고 싶었는데 한정 기간 판매 상품이라고 해요. 확인해보니 아직 판매 중이어서 링크를 걸어봅니다.

사랑의 형태 편지 세트

﹅ 글월 instagram.com/geulwoll.kr

자기만의 색깔을 지닌 작은 서점을 찾아다니는 소소한 즐거움을 나눕니다. 책방에서 산 책을 함께 소개합니다.

 

속초 동아서점

 

‘꼭 가보고 싶은 서점 리스트’ 중 한 곳인 속초 동아서점을 다녀왔습니다.

지역 거점의 중형서점이 고전을 면치 못 하고 사라져 가던 중에 동아서점은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며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명소가 되었죠. 동아서점에 가려고 속초로 향한 사람이 저만은 아닐 거예요.

 

이달에 산책하기 좋은 전시들 함께 소개합니다.

‘리베카 솔닛 <해방자 신데렐라> 전시’ ~6.16, 책방 사춘기

‘빛이 지나갈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박혜미 | 이해선 | 한차연 전시’ ~6.24, 갤러리 인

‘태도의 발화점, 향을 담는 시간: 토림도예 전시’ ~6.27, 오르에르 아카이브

‘모래알 브랜드전’ ~6.30, 번역가의 서재

소묘가 사랑하는 그림책 작가 이미나의 그림 에세이. 그림과 그리는 생활에 대해 씁니다. 아니 오리고 붙여서 새로운 모양을 만든 이것은, 고양이 화가의 이야기.

 

그림을 안 그려도 된다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조용한 세계>, <나의 동네>, <터널의 날들>과, 지난해 연말정산에서 소개한 2020년의 그림책 중 하나인 <Cat’s Melody 캣츠 멜로디>를 쓰고 그린 이미나 작가의 그림 에세이입니다. 그림과 그리는 생활에 관한 이야기라고 소개했는데 첫화 제목부터 어디로 갈지 모르겠고요? 호방한 그림체 속에 숨겨져 있던 비밀한 이야기들, 설레며 만나요.

 

 

시작하며

그림 얘기를 하려니 무언가에 눈치가 보인다. 정말 그림과 그리는 생활에 대해 얘기해도 되나? 근데 또 안 될 건 뭔가? 오락가락 어쩌면 스스로 자주 검열한다. 머무는 말은 금세 사라져버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표현하는 것은 늘 어렵다.

평생 그림을 그려온 위대한 화가들을 떠올리면 나는 에어컨 실외기 위 먼지처럼 부들거리다가 비바람에 휩쓸려 사라져 버릴 것 같다. 내 그림에 대해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민망하고 작업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나마 낫다. 긴 소개를 썼다가 모두 지웠다. 이 부끄러움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여기저기 흩어진 그림에 관한 기록을 모아 오리고 붙여서 새로운 모양을 만들었다. 이것은 모두 고양이 화가의 이야기이다.

소묘는 아시다시피 ‘작은 고양이’고요. 오후의 소묘에서 고양이 실장을 맡고 있는 이치코의 글을 전합니다. 고양이 얘기만 합니다.

 

떨림이 멈추지 않는 세계에서(2)

 

“골목 뒤편의 보이지 않는 곳에는 어떤 아픔과 좌절이 숨어 있을까.”

언제나 그래 왔지만, 의식의 흐름이 좀 더 자유분방(?)해졌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읽은 직후 쓴 글이라서 그렇다나요? 그래도 그 끝이 고양이인 것만은 변함없고요. 오후의 소묘의 또 다른 식구인 코코와 그녀의 연인과 아이들의 이야기 이제 들려드려요. 하지만 쓰지 못한 이야기가 더 많을 것이고. 코코의 비밀을 우리는 끝내 알 수 없겠죠.

월간소묘의 느슨한 온라인 독서 모임. 함께 읽고 써요.

 

◇ 5월의 책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게 취미>

삶이 뷔페처럼 다양한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제일 재미난 노는 일부터 열심히 접시에 떠 와야 한다. 그래야 내내 맛있게 재밌다가 배부를 수 있다.

#김신지 #좋아하는걸좋아하는게취미

 

저는 오월에 태어났어요. 오월은 유독 기념일이 많아서 순서대로 양가를 챙기다 보면 제 생일 즈음에는 힘에 부쳐요. 하지만 이번 오월은 생일’달’로 챙겨보자 싶었어요. 열두 달 중에 별사탕 같은 달로. 시간 나면 부지런히 돌아다녔고 강원도 평창과 속초를 다녀왔어요. 한 달 내내 작약이 곁을 지켜주기도 했지요. 마침 오월의 캔들도 작약이었던 덕분에 잠꼬대로도 작약을 부를 지경에 이르렀달까요. 맑다가도 이상하고 자유롭게 비가 내리는 날들에는 집안에서 작고 사소한 행복 ‘ㅎ’을 찾았습니다. ‘ㅎ’이라고 이름 붙여주니 그 순간이 더 애틋했어요.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비로소 혼자된 시간에 내리는 커피, 집안 곳곳을 밝히는 초,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종소리, 두 해 만에 꽃을 보여준 천리향, 벗들의 편지, 엄마와 함께한 여행.

 

“엄마 일어나. 일출이야.” 새벽 다섯 시 반 즈음에 엄마를 깨워 속초 바다의 일출을 함께했어요. 엄마를 부르고 이불을 걷고 나오는 사이 이미 해는 구름 위까지 떠 버렸지만 저는 이 시간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행의 둘째 날은 비가 종일 오락가락했어요. 엄마와 바다향기로를 걸을 때는 마침 폭우였고요. 우산을 썼는데도 바지와 등허리가 다 젖어 제 발걸음은 동동거리는데 엄마는 신나게 산책길 옆에 핀 풀들의 이름을 불렀죠. 어릴 땐 저런 걸 다 따먹으며 자랐다고. 엄마의 피는 강원도의 풀로 이루어졌던 걸까요. 지금의 제 나이만큼 젊었던 엄마와 지금의 제 아이만큼 어렸던 제가 종종 겹쳤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나이인 채로 여행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엄마와의 여행. 오월의 가장 큰 ㅎ이었어요. 아니, 여기엔 제대로 이름을 붙여도 되겠어요. 엄마와 딸, 친구처럼 떠난 여행.

@moya instagram.com/p/CPaJCS9p_ws/ 중에서

 

*함께 읽어주어 늘 고마워요

@littlestitches__ instagram.com/p/CPxPzehpIPZ/

@miran_bookshelf instagram.com/p/CPRahbvl4Jd/

 

🌷 <꽃들의 말> 6월 10일에 만나요.

 

 

 

자줏빛 튤립, 흰 패랭이꽃, 붉은 작약을 소재로 한 세 가지 이야기가 묶인 이 책은 사랑, 탐욕, 질투, 희망과 같은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세 이야기는 모두 각 꽃의 꽃말에 대한 인용구로 시작된다. 꽃말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달랐지만, 꽃을 받는 사람에게 일종의 메시지를 전하는 의사소통 수단으로 쓰였다. 그 유래로는 17세기 오스만제국에서 꽃이나 사물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셀람selam이라는 풍습으로부터 기인했다는 설이 가장 지배적이다. 이것이 유럽으로 전파된 후 19세기에 들어 꽃말 문화가 성행했는데, 경직되고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공공연히 드러낼 수 없었던 감정들이 특별한 의미를 가진 꽃을 통해 표현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반대로 모든 것이 공개적이고 직선적인 시대를 살고 있기에, 이 은밀함이 더욱 귀하고 간절하다. 자연의 시처럼 비밀의 언어를 담은 이 아름다운 책이 봄날의 꽃을 기다리는 설렘처럼 우리 모두에게 간직되길 바란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 2주년 이벤트 당첨자 분들께는 개별 연락 드렸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

 

유월의 편지,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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