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채셨을까요? 12월의 편지부터 레터 디자인 조금 바뀌었다는 사실을요 :) 이치코 실장이 제게 새 디자인 컨셉을 보여주었을 때 이것은 ‘_____’이로구나! 바로 알아보았답니다.(*정답은 레터 하단에.)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아주 사소한 변화지만 그것만으로도 새 마음이 되어요.

 

디자인뿐 아니라 코너에도 소소한 개편이 있습니다. 그간 격달로 소개해 온 ‘소소한 산-책’이 비정기로 바뀌고 그 자리를 ‘소소한 리-뷰’가 지키게 되었습니다.(애초에 코너명이 무슨 소용인가 싶게 딴소리가 더 많은 게 실정이지만… 그게 매력이기도 하죠 ;) 첫 ‘소소한 리-뷰’는 역시 책, 그중에서도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네요. 언제나처럼 즐겁게 봐주시길 바라요.

 

또 새롭게, 조그맣게, 선보이는 ‘소묘 일지’는 소묘의 하루하루 업무를 담담히 담아 보냅니다. 책이 만들어지는 여정을 물어봐준 친구 덕분에 쓰고 전할 마음을 먹게 되었어요. 또 저의 새해 작은 다짐 하나가 기록인데요. 뭐든지 흘려보내는 인간으로 살아왔거늘 어쩐지 올해부터는 쌓는 인간으로 살아볼까 싶어졌답니다. 그리하여 업무 일지, 10년 일기, 독서 기록 등등… 안 하던 걸 갑자기 이렇게나 한꺼번에 하려고 해도 되는 걸까 싶지만, 가짓수는 많아 보여도 결국 ‘쌓는 마음’ 그 하나에 달린 일일 테죠. 적어도 업무 일지는, 못해도 앞으로 열두 번, 쌓아볼게요. 올해 출간 리스트를 확정했으니 달마다 해야 할 일들도 모두 계획되어 있지만, 실제로 벌어질 일들은 늘 그렇듯 제 예측과 상상을 가뿐히 벗어나고 말 거예요. 어떤 일들 꾸미고(?) 꾸려가는지 한 해 동안 책들의 여정 함께해 주세요. 새삼 든든합니다!

 

 

 

1월 첫 주의 업무
앤솔러지 에세이 <자기만의 방으로>를 작업 중이다.

책에 실릴 열 편 중 한 편의 마지막 원고가 마침내 들어왔다. 아홉 편으로 마무리해서 내야 하나 싶었는데- 책 만드는 일은 곧 기다리는 일임을, 매번 새기게 된다. 여러 번 읽은 후 글 제목에서 한 단어를 바꾸고 두 꼭지를 재배치하는 것으로 제안드렸더니, 고친 제목에 맞게 작가님이 마지막 문단도 다듬어주셨다. 두 문장 바뀌었을 뿐인데 이것이 내가 기다리던 글이었다는 걸 알아보았다. 전체 구성에서는 가운데 위치시키면 될 것이다. 서로 마음 나눈 분들의 글을 나란히 놓는다.

새 교정지도 도착했고 판면이 다 흔들려서 수정대조를 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제자리를 찾아간 각주와 그림들 어여쁘다. 1차분 원고들은 이전에 미처 놓친 저자교 반영과 3교를, 2차분 원고들은 2교와 동시에 저자 교정을 진행했다. 이번 단계에서 수정은 최소화하려 했으나- 저자 수정사항을 보며 저마다 섬세히 마음 쓰고 있구나, 그 마음들 빠뜨릴 수 없겠다- 가능한 전부 옮겨 적고 두 번째 수정 파일을 만들었다. 금요일 저녁이 다 되어서야 빨갛게 물들인 교정지를 실장님께 다시 보내드리고 메일을 쓰면서 나는 참으로 몹쓸 클라이언트라고 생각했다. 송구할뿐더러… 다음 수정대조도 걱정이다. 마감일 멀어지는 소리 들리고… 아니야! 안 돼! 이달에 꼭 나와야 할 이유가 여럿 있다. 약조한 일들 반드시 지켜야지.

인용문 사용 허락을 구한 곳에서 아주 빠르고 흔쾌하며 다정한 회신이 왔다. 업무 메일은 최대한 건조하고 정확하게 쓰려는 편인데 이런 메일 받으면 좀 더 다정하고 싶어진다. 감사해.

이실장은 본문을 처음으로 읽어보고는 훌륭하네-라고 말했다. 뒤에 또 뭐라고 덧붙였는데 뒷말은 안 들려.

표지 디자인 시안도 입수되었고, 받아 보고는 됐다- 싶었다. 시안 3, 4번 중에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창문 모양으로 그림을 앉힌 4번 컨셉으로 마음이 한 뼘 더 열렸다. 이 책은 정말로 이 그림이어야 하는구나, 이 모양이어야 하겠구나.

볼수록 모든 게 더 좋다. 각별하고 애틋한 책 되겠다.

 

 

 

[…]

 

행복한 독서 생활, 지난 12월이 딱 그랬습니다. 베스트 세븐에 속하는 작가들의 신간을 연달아 세 권이나 읽었습니다. 이런 복이 찾아올 확률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앤솔러지 등을 제외하고 오롯이 본인 이름으로만) 작가들이 대략 1년에 한 권 책을 낸다고 치면 1.74개월에 한 번씩 베스트 세븐 작가들의 신간을 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두 달에 한 권 남짓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저의 평균값인데 이번에는 몇 배나 커진 복이 굴러들어 온 것입니다. 게다가 세 권 모두 장편이라니!(소설집도 좋지만 아무래도 장편의 아우라가 있으니까요.) 복권이라도 맞은 것처럼 황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불타는 작품>, <파견자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이렇게 세 권의 책으로 어느 해보다 충만한 연말이었습니다.(읽은 시기와 무관하게 책의 발행일은 모두 10월이고 나열한 순서 역시 발행일순입니다.)

 

<밤의 여행자들>을 통해 윤고은 작가를 처음 접했습니다. 책이 출간되었던 2013년에 읽은 건 아니고요. 2021년에 영국추리작가협회(CWA)가 주관하는 대거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궁금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기발했습니다. 재난으로 폐허가 된 지역을 관광하는 ‘재난여행’을 기획하는 프로그래머라니. 흥미진진했습니다. 숨겨진 비밀과 뒤통수를 치는 악당과 예측할 수 없는 반전. 순식간에 윤고은 소설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주저 없이 (당시 기준) 베스트 파이브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기발함과 재미, 이런 요소들 때문에 윤고은 작가의 세계에 사로잡힌 건 아닙니다. 윤고은 작가를 고유하게 만드는 한 가지 매력이 더 있었습니다. 딜레마. 소설 속 인물들이 겪는 딜레마가 현실의 어떤 상황보다 실감 나게 느껴졌고, 마치 딜레마 속 인물들과 하나가 된 것처럼 마음이 껄끄러웠습니다. 그런데 인간 존재의 근본을 고민하는 실존적 딜레마,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인물의 극단적인 딜레마 등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사람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답답함까지는 아니고 직장인이라면 한 달에 두세 번쯤 선택을 고민하게 되는 애매한 상황 같은 찜찜함이라고나 할까요. 만약 이름을 붙인다면 생활 밀착형 딜레마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불타는 작품> 역시 그 점이 두드러지는 작품이었습니다. 로버트 재단의 후원으로 배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지긋지긋한 현실을 떠나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지만, 전 세계의 예술가 중 자신을 꼭 집어 선택한 ‘로버트’가 개dog라는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 게다가 후원의 조건으로 작품 하나를 골라 소각해야 한다는 사실. 원본과 복제와 아우라,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떠올릴 만큼 깊어질 수도 있는 딜레마지만 <불타는 작품>에서 이 상황들은 훨씬 윤고은적으로, 그러니까 적당한 생활 밀착형 딜레마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이란 무엇인가?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예술가와 작품은 어떤 관계인가? 등의 고차원적인(동시에 고리타분한) 질문은 어쩌면 이 책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작품이 불타는 상황에 다다른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그전에 벌어지는 각종 좌충우돌 에피소드였습니다. 주인공이 로버트 재단의 제안을 수락하고 작품 창작을 위해 재단 소재지로 가기 위해 미국에 도착했으나, 캘리포니아 지역의 대형 산불 때문에 가이드와 길이 엇갈리고 담당자와 연락마저 끊기며 시작부터 곤란함을 겪습니다. 공항을 벗어나기 위해 숙소를 알아보지만 근처 호텔은 모두 만실, 숙박 가능한 호텔을 겨우 찾았으나 오래된 곳이어서 화장실을 2:1로 쓰느냐 n:1로 쓰느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 나중에 연락이 닿은 담당자의 안내로 재단과 제휴된 곳에서 근사한 무료 식사를 즐기지만 식당의 배신으로 밥값을 지불해야 할 처지가 되고, 공항에서 신용카드를 잃어버려 수중의 현금으로는 13달러가 부족한 상황에서 하필 2:1로 화장실을 공유하는 옆방 사람에게 돈을 빌리는 상황, 그리고 소설 후반부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똥(주요 스토리라 자세히 밝힐 순 없지만..)에 얽힌 각종 상황 등등.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어휴 어쩜 이래.. 에? 설마.. 라는 말이 끊길 새가 없는 딜레마적인 상황이 계속 펼쳐집니다.

 

[…]

 

[전체 읽기]

 

 

 

_😽 레터의 새옷은 ‘고양이 털’을 모티프로 디자인했습니다. 귀엽게 봐주셔요._

 

_상반기 새로나올책 출간 알림과 기대평으로 응원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_

 – 자기만의 방으로 | 고운, 무루, 박세미, 송은정, 서수연, 신예희, 신지혜, 안희연, 이소영, 휘리

 – 쌓는 마음 | 윤혜은

 – 미화리의 영화처방 편지 | 이미화

 – 무루의 이로운 그림책 | 무루

 

_[작가의 방] 1월 예약하기_

 – 장소: 오후의 소묘 스튜디오(서울 은평구 응암동)

 – 시간: 화-토 15:00~18:00 | 3시간 15,000원(다과 포함)

 – 링크 : 네이버 예약

 

 

올해의 마음가짐은 하지 않았던 것들 해보기, 할까 말까 망설여질 때는 그냥 하기였어요. 덕분에 온라인 독서모임에 참여했고, 보고 싶었던 친구를 만났고, 미지의 수신인들에게 달마다 한 통의 편지를 썼고, 매주 대바늘 수업과 도자기 수업에 가고 있네요. 하나하나 제게는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는데, 용기가 필요할 때마다 소묘를 떠올렸어요. 소묘가 만든 책들, 소묘와 함께 읽은 책들, 소묘 레터의 문장들이 주저하는 저를 이끌어주었습니다. 어떤 문장들이었는지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여기에는 제 올해의 그림책의 문장을 남겨두어요. “나는 나팔을 배우기로 결심했어. 그들과 함께하고 싶으니까.” 새해에는 조금 더 용기 내어 더 멀리 가보려고 해요. 나의 파타무아를 따라. 소묘 에디터와 작가님들, 레터를 읽는 분들 모두 새해에도 저마다의 걸음으로 ‘아름다움과 함께’하시길 바라요. 올해도 고마웠어요 :) _고운

 

이토록 뭉클한 2023년의 마지막 답장- 고맙습니다. 파타무아의 해방 작전처럼 크고 너르게 나아간 한 해였네요. 새해에도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로 진동”하기를, 아름다운 음표들 같이 연주해요 오붓하게 :)

 

 

1월의 편지,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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