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오후의 소묘 비상사태의 달이었습니다. 8년 만에 이사를 하는데, 삼삼이 하나뿐이던 고양이가 어째서 여섯으로 늘어가지고… 이사 전날 육묘를 사무실로 데려와 며칠 함께 지냈어요. 그리하여 저희는 요즘 이사 말고 다른 이야기는 못 하는 사람 되었고, 석 달 만에 돌아온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고양이 여섯 데리고 이사하기의 준비 과정(?)을 풀어냈습니다. 오랜만에 등장한 투비컨티뉴드까지 흥미진진(!)하네요.
그리고 이번 레터에는 특별한 편지들을 함께 실었어요. <엔딩까지 천천히> 속 쿠키의 주인공인 고민 사연자 분들이 직접 답장을 보내주셨거든요. 미화리 작가님의 에필로그와 고민 사연자 분들의 답장을 같이 띄웁니다. <백엔의 사랑>과 <요노스케 이야기 & 스탠 바이 미> 에피소드 쿠키의 쿠키가 되겠네요. 다음 레터에서도 쿠키는 쭈욱 이어집니다. 답장 보내주신 우리의 주인공들 모두 감사해요.
이 모든 일이 다 영화 같아요.
이사(移徙)
[명사] 사는 곳을 다른 데로 옮김
이사는 현대적인 단어입니다. 20세기가 도래하기 전, 왕을 모시던 시절까지만 해도 일반 백성들은 마음대로 거주지를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그 시절엔 이사란 개념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한자를 봐도 단어를 대충 만든 느낌이 있습니다. 옮길 이移에 옮길 사徙라니, 유리 유(류)琉에 유리 리(이)璃만큼이나 이상합니다. 식민지 시대가 끝나고 해방이 되었다고 보통의 인민들이 곧바로 거주이전의 자유를 누렸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전쟁을 겪고 폐허를 복구하고 경제발전 구호에 매여 살면서 사는 곳을 다른 데로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옮길 만큼 여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평생 살아온 땅을 버리고 도시로 향했던 대부분의 사람은 쫓겨나듯 고향을 떠났을 것입니다. 오직 먹고살기 위해서요.
동물에 대해서도 이사를 간다고 표현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생활 반경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에 가깝습니다. 가장 멀리 이동하는 철새로 알려진 북극제비갈매기의 경우, 봄과 여름에는 북반구의 거의 끝인 그린란드나 아이슬란드에서 번식기를 갖고 가을에 남반구 끝으로 이동해 남극대륙 해안가에서 (남반구는 여름인) 겨울을 난 뒤 봄이 되면 다시 북반구로 올라옵니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일 년에 두 번 생존 환경이 양호한 곳을 찾아 이사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북극제비갈매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거주지가 지구 전체인 셈입니다. 사는 곳을 다른 데로 옮기는 게 아니라 북극과 남극 모두가 하나의 사는 곳인 거죠. 우리들과는 생활 범위의 스케일이 다릅니다. 비행기만 타면 세계 어느 도시라도 24시간 내에 도달하는 지구촌 시대에 인간 역시 행성 단위의 스케일로 생활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신다면, 물론 그런 사람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저는 아닙니다. 서울시 은평구만 해도 너무 넓어서 부담스럽습니다.
이사는 인간적인 행위입니다. 생존의 필요에 의해 이동하는 동물과 달리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거주지를 옮기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사회는 공식적으로 신분의 구분이 없습니다만, 자본주의 체계는 얘기가 좀 다릅니다. 많은 곳에서 계급의 차이가 사실상 신분의 차이로 작동합니다. 주거지의 구획을 나눔으로써 신분을 구분했던 봉건사회에서 그다지 멀리 못 왔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에 사는지로 자신의 계급을, 신분을 드러내려 합니다. 19살에 받은 시험 성적이 평생을 따라다니고, 빌딩과 아파트가 돈을 낳는다고 철썩같이 믿고 사는 한국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이 나라에서 이사를 간다는 건, 자신의 계급 또는 신분 변화에 대한 내부적 평가이자 대외적 선포와도 같습니다. 하긴 현대적이라는 단어와 인간적이라는 단어가 만났으니, 애초부터 좋은 꼴은 못 볼 상황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이사 다니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습니다. 스스로 사는 곳을 결정할 수 있게 된 스무 살 이후로 이사를 참 많이도 다녔습니다. 물론 완전히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이사한 적은 몇 번 안 됩니다. 대부분 떠밀리듯 이사를 가야 했죠. 전세 계약이 만료되어서, 직장과 거리가 멀어져서, 함께 살던 친구들이 흩어지게 되면서 등등. 그런 상황에서도 이사하는 게 마냥 싫지는 않았습니다. 환경이 새롭게 바뀌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보다 이번에는 어떤 동네일까? 집은 어떻게 꾸며볼까? 하는 기대감이 훨씬 컸습니다. 골목을 거닐고 식당을 찾아보고 공원이나 산책로를 발견하고 대중교통의 루트를 구성하는 일들이 즐거웠습니다. 물론 1~2년 살다 보면 금세 익숙해져서 그냥 우리 동네가 되어버리지만, 그때는 또 이사를 가면 되니까요! 그렇게 대책 없이 막무가내로, 이사 친화적인 마인드로 잘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죠. 이사, 극혐!!!
법으로 정해야 합니다. 고양이를 반려하는 사람은 거주를 이전하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헌법으로 보장해야 합니다.
[계속 읽기]
이사異事
고양이가 없는 곳이 필요해 사무실을 얻었다. 교정지만 보면 깔고 앉는 삼삼이, 부지불식간 나타나 잔을 엎는 모카가, 책 표지를 긁고 찢고 맛보는 치코가, 밥을 양껏 먹고도 더 내놔라 울부짖는 미노가, 언제나 조금쯤 돌아 있어서 예측 불가능한 오즈가, 보기만 하면 웃음이 터져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시월이 없는 공간, 적막하고 정연하고 안전한 장소. 여기서 책을 만든다. _<동네책방 30%> 4호에 실었던 글
소묘小猫 사무실인데 고양이는 없나요? 라고 물어본 작가님이 계셨고, 그때 아유 고양이가 있으면 안 되죠, 일을 어떻게 해요. 라고 답한 게 엊그제 같은데. 사무실에 고양이가 있다. 그것도 여섯이… 일을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그 기이하고 별스러웠던 4박 5일간 무슨 일을 했더라.
곰곰 돌이켜보니 아주 오랜 프로젝트를 천천히 함께하고 있는 저자 분과 4년 반 만에 프루스트 읽기 모임을 재개했고, <엔딩까지 천천히> 첫 북토크에 다녀왔다. 한샘&유진 작가님 마지막 연재글 레터를 띄웠고, 서울국제도서전을 위해 특별 제작한 굿즈를 정성껏(정말로요) 포장해 전했으며 미화리 작가님 인터뷰 응원 차 사진 찍으러 씀에 또 다녀왔네. 다행히(?) 외근이 많았구나.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사이에 가장 큰일인 이사도 했지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이사’를 찾으면 결과값이 열일곱 개나 나온다. 우리가 흔히 쓰는 ‘사는 곳을 다른 데로 옮김’이라는 뜻의 이사移徙는 열세 번째. 나머지의 면면을 보다 보니 이사를 겪어낸 지금의 내게는 3, 12, 17번까지가 13번 이사移徙에 결부된 하나의 의미 덩어리로 느껴진다.
—
이사3 已事 / 이미 지나간 일. =이왕지사.
이사12 異事 / 기이한 일. 또는 별스러운 일.
이사17 離思 / 이별할 때의 슬픈 생각.
—
이사3已事과 동의어인 이왕지사의 예문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이왕지산데 이제 그 일을 다시 거론해서 무엇 하겠나.
이왕지사 끝난 일을 생각해서 뭐 하나?
그러니까요. 근데 계속해서 생각하고 거론하고… 아니, 어쩌면 내게는 이미 지나간 일이 아닌 것인가. 반드시 다시 겪어야 할 일이기 때문일까. 아주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그럼에도 고양이들이 이곳에 있던 짧고도 길었던 그 시간은 기이하리만치 그립고, 그 순간순간에도 곧 그리울 것을 알고 있었다.
시월이가 요상한 자세로 누워 나를 바라보는 사진을 배경화면으로 설정해둔 내 모니터 앞에 진짜 시월이가 요상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을 목격할 때. 다음 일정일랑 홀랑 잊고 이 장면만을 그저 오래오래 담아두고 싶었지. 이인용 작은 소파에 몸을 구긴 채 밤새 비몽사몽하던 새벽, 등받이에 올라간 삼삼이 나를 내려다보던 눈과 마주쳤을 땐 괴로운 와중의 단꿈인가 눈을 비볐다. 초록의 식물들이 가득하던 창가 벤치를 오렌지빛 치코가 만족스레 독차지하고 있던 순간엔 탕비실로 밀려난 식물들에 대한 미안함과 인간의 사정으로 이리저리 영역을 옮기게 만든 고양이들에 대한 미안함마저 잠시 잊고 그저 흐뭇했다. 집에서도 늘 함께해 왔는데 새삼스레 이렇듯 애틋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인지.
특수하고도 비일상적인 그날들은 마치 영화 속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특별 임무: 고양이 여섯을 데리고 이사하기’라는 제목의 영화일 것이고, 이 닷새간의 이사12異事는 갈등과 갈등 사이 잔잔한 긴장이 감도는 고양이들의 어드벤처(이자 호러…).
평소 시월이 곁에 오는 걸 질색하는 모카가 시월이랑 꼭 붙어 잠을 자고 밥을 먹는 걸 보면서는 잔뜩 경계하는 모카의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경계하는 와중에 모카랑 함께여서 너무나 행복하다는 시월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육묘 중 가장 조그맣고 또 가장 용감한 삼삼이는 짧은 탐색을 마치고 원래 제 영역인 양 편안해했는데 모카는 그런 삼삼이를 지켜보며 조심스레 구석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시월은 또 그런 모카를 따라 용기를 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용기가 되는 모습, 기특하고 놀랍다. 우리의 도르니 오즈가 용감해진 나머지 완전히 돌아서 새벽 내도록 사이렌을 울리며 우다다다를 하던 그 밤엔 정말로 울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의 엔딩이 부디 천천히 오기만을 바랐다. 이 모든 장면들의 결말은 빈 풍경일 테니까. (물론 이전 집에서 사무실로 옮기는 데 여섯 시간이 걸린 모카를 다시금 새집으로 이주시키는 일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일 텐데 그것을 영영 맞고 싶지 않기도 했다…. 고양이 이사에 관한 명작으로 <대봉이의 일기>가 있고, 7장의 ‘이사란 무엇인가’와 ‘이사 후 스트레스 장애’ 편을 참조해 주시길….)
지금은 엔딩 이후. 이 영화에 쿠키가 있다면 이런 장면일 것이다. 모두가 떠나고 다시 적막해진 자리에 먼지처럼 홀연히 떠오르는 털 뭉치, 웃음을 터뜨리는 나, 손 안에 가만히 굴려 책상 위에 올려둔다. 그 순간 깨닫는다. 이 영화는 이사17離思에 사로잡힌 미래의 나에게 어떤 처방이 되어줄지도 모르겠다고.
Epilogue
↳PS. 꽃밭을 만드는 마법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은 2024년 5월. 그러니까 왓챠를 통해 고민 사연을 받은 지 2년이 막 지난 시점입니다. 2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알고 싶어서 인스타그램에서 2년 동안의 게시글을 확인해 보았는데요. 왓챠 영화처방 이벤트를 알리는 게시글 이후로 저는 기혼자가 되었고, 어떤요일을 포함해 다섯 곳에서 연재를 마쳤으며, 다섯 번째 단행본과 한 권의 사진집을 출간했더라고요. 제자리걸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나선으로 걷고 있었다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대사가 생각나는 시간이었습니다.
2년간 한 달에 한 통씩 편지를 쓰고 싶었지만, 절반의 편지는 사연을 받은 2022년 상반기에, 나머지 절반은 최근에야 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편지를 쓰면서 여러분의 2년은 어떠했을지, 2년이나 늦은 답장을 받아볼 여러분에게 제가 얼마나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걸지 걱정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러분이 완전히 다른 선택을 했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보기 좋게 저를 한 방 먹여주기를, 어떤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현실의 여러분을 대체할 이야기는 없다는 걸 제게 톡톡히 알려주기를.
편지를 쓰는 틈틈이 영화 보기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중에는 애니메이션 〈장송의 프리렌〉도 있습니다. 1000년을 사는 요정 프리렌이 먼저 세상을 떠난 인간 동료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혼이 잠들어 있다는 ‘오레올’로 향하는 여정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프리렌은 현재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엘프이면서 동시에 마왕을 쓰러트릴 만큼 무진장 강한 마법사인데요. 그런 프리렌이 가장 좋아하는 마법은 ‘꽃밭을 만드는 마법’입니다. 누군가는 그런 하찮은 마법을 좋아하는 프리렌을 비웃지만, 꽃밭을 만드는 마법은 길을 잃고 겁먹은 아 이를 안심시킬 수 있는 마법이거든요.
꼭 그런 마음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여러분에게 저의 마법과도 같은 영화를 소개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여러분의 영화처방사, 미화리
Cookie 내 모습을 인정하고 싶어요 | 백엔의 사랑 —H의 답장
안녕하세요. 제1막 마지막 고민의 사연자였던 H입니다.
영화를 감상하고 작가님의 글을 읽어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려 이제야 답장을 보내요. 사실 보고 읽기까지 반나절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절을 돌이켜보는 과정이다 보니 어떻게 후기를 남겨야 할지 많은 고민이 들었어요. 지난날의 고민이 지금까지도 온전히 풀리지는 않아서 조금은 씁쓸하기도 했답니다.
그럼에도 지금에서야 깨달은 한가지 사실은 ‘아, 나는 참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구나.’라는 점이에요. 저도 작가님처럼 영화를 좋아하는데, 성인이 되면 영화 속 세계만큼은 아니더라도 극적이고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펼쳐질 거라 기대했거든요. 하지만 평범하다 못해 진부한 제 일상을 못 견디고 도망치기 바빴던 것 같아요.
영화 속 ‘이치코’의 이야기 또한 누군가에게는 그저 하찮고 보잘것없는 인생처럼 보이겠죠? 이치코의 인생이 180도 달라질 일도 없을 거고요. 그렇지만 이치코는 앞으로 링 위에 올라갔던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시간이 흘러 ‘32살의 복싱 선수 도전기’를 남들 앞에 무용담 털어놓듯 웃으며 말할 수도 있을 거고요.
작가님 말씀처럼 이런 게 바로 인생 아닌가 싶어요. 무심하고 단조로운 일상이지만, 여기저기 치이고 깨지기 십상이지만, 결국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특별한 순간’은 분명 존재한다는 거.
남들뿐만 아니라 나 또한 알아채지 못할 만큼의 성장 또한 값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영화를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어요. 영화를 추천해주신 작가님, 정말 감사합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제 앞으로의 이야기 엔딩까지 꿋꿋이 써 내려 가볼게요!
PS.
저에게 있어서 특별했던 순간을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한동안 방황을 일삼았던 저는 평소 영화를 즐겨보던 성향 덕분에 여러 영화를 접해볼 수 있는 일을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현재는 일을 그만둔 상황이지만 다시 영화와 관련된 일을 알아보는 중이랍니다.
근데 때마침 작가님께 메일이 온 거예요! 제가 몇 년 전 보냈던 사연이 책에 실려 나올 거라는 소식과 함께! 별일 아닐 수 있지만 참 드라마틱하지 않나요? 그때나 지금이나 전 똑같은 취준생인데 상황은 꽤 많이 달라졌다는 게. 이런 순간을 돌이켜보면 살아가는 것도 꽤나 재미있어요.
제 인생에 자그마한 이벤트를 만들어주신 작가님께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드립니다!
아무쪼록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시는 모든 분들이 이 책과 영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길 바라며,
—H
Cookie 우리는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걸까요? | 요노스케 이야기 & 스탠 바이 미 —D의 답장
안녕하세요. 2년 전 편지를 보낸 D입니다.
몇 번의 계절을 돌아 잊고 있던 편지의 답장을 받는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반갑고 기분 좋은 일이었어요. 그러는 동안 스무 살이었던 저는 스물두 살이 되었고, 제 곁엔 저를 만나 다행이라고 말해주는 사랑하는 사람도 생겼답니다.
돌이켜보면 편지를 보낼 당시 스무 살이었던 저는 나름대로 절박한 심정이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든 삶의 진실을 알아내고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었죠. 죽음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사랑하는 것들과의 이별이 예정된 게 그 당시 제가 해석한 삶인데, 다들 어떻게 그리 태연한 얼굴로 살아갈 수 있는 건지 나를 뺀 모두가 대단하고도 이상하게 느껴지는 나날이었어요.
다행히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제 나름의 대답 비스름한 것도 찾았고 그것에 기대어 멀리서 보면 그럴듯하게 살아가고 있었는데요. 무료해지던 찰나에 먼 곳에서 날아온 사려 깊은 답장은 단조롭게만 느껴지던 제 일상을 다시금 소중히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어요. 돌아보면 제게 일어났던 크고 작은 모든 일은 영화 속 한 컷들이 그렇듯 미약하게나마 저라는 사람을 구축하는 데 꼭 필요한 거였어요. 이제는 ‘우리는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걸까요?’라는 제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라고요. 우리의 욕망은 죽음이 아니라 삶에 있다고요.
<벌새>의 영지 선생님이 남긴 편지 속 한 줄처럼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지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몰라져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도 찾아오지만, 마음에 흙탕물이 인 것처럼 두려워질 때면 이 책을 꺼내볼게요. 저와 닮은 이름 모를 이들의 고민과 그에 따른 다정한 처방이 가득 담긴 이 책을 머리맡에 두고 자면 조금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은 책이 세상에 나왔네요. 독자로서 기쁩니다. 작가님도, 이 답장을 읽고 계신 모든 분도 부디 잘 지내시길 바라요. 각자 삶의 단일한 주인공이 되어, 자기 앞에 놓일 모든 일을 충분히 음미하실 수 있길 바라요. 저도 그럴게요.
—D
❨ _[엔딩까지 천천히]의 천천한 여정 💫_ ❩
★ 7월의 북토크 소식
• 7월 20일(토) 2시 | 물레책방(대구 수성구) | *영화감독이 주인인 책방에서 영화 이야기 한껏 나눌 예정!
• 7월 31일(수) 7시 30분 | 북티크(서울 마포구) | *천선란 소설가의 진행으로 우리의 엔딩까지 천천히를 깊고 너르게 그려봅니다 :)
• 북토크 신청은 추후 서점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모집 시작되면 저희 인스타에서도 공지할게요. 북토크는 8월에도 이어집니다.
★ 작업책방 씀에서 열린 첫 북토크의 한 조각
🎶 혜은: 미화리가 자신의 고민이나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셀프로 영화처방을 선택하기도 하나요? 지금 이런 고민이 있으니까 이 영화를 한번 볼까 하면서요.
🎞 미화: 다양한 고민을 갖고 있는 주인공들을 많이 알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영화를 처방해 줄 수는 있지만, 저한테 영화는 위로나 처방을 위한 수단은 아니에요. 영화라는 존재가 그냥 중요하고, 마냥 좋아서 보는 것. 그래서 거꾸로 거의 모든 영화가 다 처방이 될 수도 있겠죠. 💞
“영화를 볼 때 주인공의 먼 미래는 가늠이 잘 안 돼요.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주인공이 지금 처해 있는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정도죠. 오늘 우울하다면 우울하게 살고, 문제가 생겼다면 그걸 해결하려 하고. 뭔가가 하고 싶으면 하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하고. 그냥 오늘 하루, 이 상황 이 장면만을 나로 사는 것이죠. 일단 오늘을 나로 살 수 있어야 그다음도 있을 것 같아요.”
문화예술 플랫폼 ‘아트인사이트’에서 <엔딩까지 천천히>를 곁에 놓고 미화리 작가님과 나눈 이야기를 전합니다. 영화처방사 미화리의 면모를 촘촘히 만나볼 수 있어요.
★ 서울국제도서전 작업책방 씀 I30 부스에서 펼쳐진 풍경 🧡🩷
★ 팟캐스트로 만나는 ‘엔딩까지 천천히’
☆ [두둠칫 스테이션] ‘엔딩까지 천천히’ 가면서 김칫국 마시기
“영화 같은 일이 나한테 벌어지기를 바라는데 사실 그게 다 김칫국이잖아요. 이런 김칫국을 죽을 때까지 마시면서 그걸 동력 삼아 계속 쓰게 됩니다.”
☆ [일기떨기] ‘엔딩까지 천천히’ 특집방송. 영화처방사 미화리의 이야기는 길어~!
“마지막 꼭지에서 이 제목이 나왔어요. 우리 삶의 엔딩이 죽음이라면 최대한 천천히 멀리 돌아서 가자. 시간을 막을 수는 없지만 멈춰 세울 수 있는 좋은 순간들을 많이 만들어서 시간에 반항을 하자. 그런 의미를 담았어요.”
☆ [잠 못 이룬 그대에게] ‘엔딩까지 천천히’ 낭독 방송
미화리 작가님의 담백하면서도 다정한 문장이 지혜 님의 목소리와 정말 잘 어울려요. 아직 책 만나기 전이라면 지혜 님의 낭독으로 먼저 들어보셔도 좋을 거예요.
❨ _[작가의 방] 7월 예약하기_ ❩
• 장소: 오후의 소묘 스튜디오(서울 은평구 응암동)
• 시간: 화-토 15:00~18:00 | 3시간 15,000원(다과 포함)
• 링크 : 네이버 예약
7월의 편지, 어떠셨나요?
답장을 남겨주세요.
[월간소묘 : 레터]는 책과 고양이를 비롯해 일상의 작은 온기를 담은 다양한 글을 전합니다. 매달 두 번째, 네 번째 월요일에 만나요.
[월간소묘: 레터]
2020년 첫 편지 ‘생기’ • 3월의 편지 ‘질문의 자리’ • 4월의 편지 ‘장소라는 몸’ • 5월의 편지 ‘낭만’ • 유월의 편지 ‘어느 틈에’ • 7월 ‘편지하는 마음’ • 8월의 편지 ‘빨강’ • 9월의 편지 ‘어스름’ • 시월의 편지 ‘herbarium’ • 11월의 편지 ‘그 속에는’ • 12월의 편지 ‘연말정산’
2021년 첫 편지 ‘얼굴들’ • 2월의 편지 ‘걸음걸음’ • 3월의 편지 ‘Little Forest’ • 4월의 편지 ‘Now or Never’ • 5월의 편지 ‘창으로’ • 유월의 편지 ‘비밀의 무늬’ • 7월의 편지 ‘여름의 클리셰’ • 8월의 편지 ‘파랑’ • 9월의 편지 ‘이름하는 일’ • 시월의 편지 ‘일의 슬픔과 기쁨’ • 11월의 편지 ‘나의 샹그릴라’ • 12월의 편지 ‘연말정산’
2022년 1월의 편지, 새해 첫 책 • 2월의 편지, 어려움에 대하여 • 3월의 편지, 구름의 나날 • 4월의 편지, 사랑의 모양 • 5월의 편지, 비화 • 6월의 편지, 사라진다는 것 • 7월의 편지, 환대 • 8월의 편지, 정원 너머 어렴풋이 • 9월의 편지, 함께 해피엔딩 • 10월의 편지, 마음을 쓰고 계신가요? • 11월의 편지, 작가의 발견 • 12월의 편지 ,연말정산
2023년 1월의 편지, 하얀 꽃들이 피어나 • 2월의 편지, 차를 듣는 시간 • 3월의 편지, 조용히 다가오는 것들 • 4월의 편지, 꿈을 꾼다는 건 • 5월의 편지, 다정한 반복으로 • 6월의 편지, 다시 태어나기를 • 7월의 편지, 촛불을 켜는 밤 • 8월의 편지, 치코의 일기 • 9월의 편지, 아름다움과 함께 • 10월의 편지, 언제 나와요? • 11월의 편지, 오늘의 주인공은 너 • 12월의 편지, 연말정산
2024년 1월의 편지, 새삼 새 마음 • 2월의 편지, 일상 맞춤형 실감 블록 • 3월의 편지, 사랑과 우정의 세리머니 • 4월의 편지, 길고양이 돌봄 지침 • 5월의 편지, 절기 좋아하세요? • 6월의 편지, 우리를 홀린 OOO • 7월의 편지, 이 모든 일이 다 영화 같아요 • 8월의 편지, Sometimes, again • 9월의 편지, 여름의 기억 • 10월의 편지, 힙hip하지는 못해도 • 11월의 편지, 작은 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