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연말이네요. 11월부터 이곳저곳에서 캐롤이 들리고 크리스마스 장식이 한창입니다. 날은 이렇게나 포근한데 말이에요. 좋은데 걱정… 다음 주엔 그래도(?) 부쩍 추워진다지요. 모두 월동 준비 단단히 하시길 바라요.

이달의 ‘소소한 리-뷰’에서는 스산하고도 따듯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12월 20일까지 더현대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유코 히구치 특별전: 비밀의 숲> 전시인데요. 무려 고양이 그림이 1,000점 넘게 있으니 우리 소묘 레터 구독자 분들 꼭 보셨으면- 관람팁도 톡톡히 담았습니다.

12월은 레터의 역사와 전통에 따라 연말정산의 달이므로, 11월의 ‘소묘 일지’가 마지막 업무일지가 되겠습니다. 이달의 업무에는 저에게도 무척 생소한, 편집자 생애 첫 ‘달력’ 작업이 있었는데요. 이치코 실장이 이달의 ‘소소한 리-뷰’에 쓴 “작은 도망”이라는 표현이 제가 그림 달력에서 느끼는 마음과 꼭 포개지더라고요. 나날 혹은 다달의 환기를 위한 새로운 풍경의 창이자, 다시 일상에 발붙이도록 살짝 등을 밀어주는 다정한 손이에요.

이달의 소묘 일지엔 달력 이야기를 적느라 신간 이야기를 못 했는데, 유진 작가님의 연재글 ‘엄마의 책장으로부터’가 드디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연재 원고 그대로인 꼭지도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꼭지가 새로 쓰인 것이에요. 그중 오늘의 ‘작은 도망’에 꼭 어울리는 문단이 있어 소개해 봅니다.

 

“엄마는 책장에 유리문을 달았다. 엄마는 문이 달린 책장을 좋아했다. 딸깍, 소리를 내며 닫힐 때마다 기분이 좋다고 했다. 책장의 문이 닫히면 책으로 된 하나의 장소가 생기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엄마에게 4단 책장은 엄마만의 장소였다.”_신유진, <사랑을 연습한 시간>

 

여러분에게 이런 작은 도망처는 무엇인가요?

 

 

 

10월의 마지막 날들엔 두 가지를 마감했다. 하나는 <사랑을 연습한 시간>, 하나는 [2025 사적인 계절 – 박혜미 달력].

박혜미 작가님의 독립출판 화집 <사적인 계절>을 만난 게 2019년. 오후의 소묘의 시작도 2019년. 혜미 작가님의 독립출판 그림책 <동경>을 <빛이 사라지기 전에>로 만들면서 <사적인 계절> 또한 새롭게 만들고 싶었고, 그 계획에는 책만이 아니라 달력도 포함되어 있었다.(어쩌면 달력이 먼저고 책이 나중이었나?)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지만… 작가님의 작업 스타일을 알고 나면 절대로 재촉할 수가 없다. 내가 아는 가장 섬세한 손. 이파리의 세포까지 그려내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떤 장대한 풍경도 현미경을 들이댄 듯 점점이 담는다. 나는 그저 작가님의 손가락과 손목과 허리와 목과 눈이 튼튼하길 기원할 뿐이고. 그렇게 땀땀이 찍어낸 그림 열세 점이 도착한 날엔 얼마나 기뻤는지, 감사했는지. 어떤 장면은 내가 직접 마주했던 풍경이어서 더 애틋했다. 그 풍경 속 친구와 나눴던 대화의 한 조각이 스민 그림. 그 모든 장면이 이제 열두 달 사계절 달력이 되었다.

워낙 세밀하게 작업하는 스타일로 그림이 A4 정도 사이즈고, 1월에는 더 많은 그림들과 함께 책이 될 예정인데 책 사이즈도 그림보다 크지 않다. 디자인 실장님과 나는 혜미 작가님의 그림을 더 크게 보고 싶은 마음에 A3 사이즈로 만들었다. 너무 잘한 일. 포스터 형식으로 그림에 무게를 두어 날짜는 비교적 작게 들어갔지만 절기며 중요한 날들(세계 고양이의 날 같은 것)도 놓치지 않고 넣었다.

달력은 내게 달마다 새로운 풍경이 되어주는 창문 같은 것. 벽에 붙은 사진 달력, 그림 달력들을 하나하나 바꿔 달 때, 바라볼 때 나는 내가 썩 잘 살아내고 있다고 느낀다. 그건 칸칸이 나누어진 탁상 달력을 볼 때와는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마음이다. 올해 칸칸이 빼곡한 타임라인을 쫓으며 그 산뜻한 기분을 놓친 적이 얼마나 잦았는지. 다행인 건 내년엔 절대로 놓칠 수 없을 거라는 믿음.

경애하는 그림으로 가득한, 계절의 풍경과 풍경 속에 깃든 미래의 기억이 펼쳐진, 한 해를 잘 살아내자는 기원을 담은, 오후의 소묘 첫 달력을 전합니다.

 

🗓️ [2025 사적인 계절 – 박혜미 달력]

달력이 되는 과정

 

 

 

글루미 웬즈데이. 지난 수요일은 종일 울적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너무 언빌리버블한 사건이라 충격이 더 컸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머리 위에 떠다니는 물음표를 지울 수 없었습니다. 정치공학이니 선거전략이니 하는 걸 따지기 전에, 유에스에이 피플은 불과 몇 년 전 일을 새카맣게 잊어버린 걸까요. 투표용지의 그쪽으로 손가락이 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전 세계의 인민들이 그놈은 안 된다고 악을 쓰며 반대하는데도 굳이 그래야만 했을까요.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남의 나라 프레지던트 뽑는 일로 내가 왜 열을 내지? 하지만 속에서 마그마가 부글거리는 걸 어떡하나요. 도로 한나라당이란 말은 들어봤어도 도로 T***p라니.. 오, F***ing 아메리카! 저절로 뒷목을 부여잡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되돌릴 길은, 헐크가 인피니티 건틀릿을 끼고 핑거 스냅이라도 해준다면 모를까, 없습니다. 게임 오버, 고생하셨습니다, 깔끔하게 GG…를 치자니 아직 전장에 남은 마린 여섯과 메딕 하나가 눈앞에 아른거리고.. 아, 시즈탱크라도 한 대 있었으면 아니 드랍쉽 한 대라도! 어라, 첫 문단부터 글이 산으로 가네요.

 

가끔은 현실을 부정하며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도망이 마냥 쉬운 일은 아닙니다. 최근에 인쇄소 한 곳이 폐업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저희 책들도 여러 권 인쇄한 곳이라 마음이 착잡해지려는 순간, 그 소식을 전해준 분이 이렇게 얘기하시더군요. 폐업이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면서, 정말 어려워서 망하게 됐을 때는 온갖 대출과 빚 때문에 폐업도 못 한다고요. 도망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망이라도 칠 수 있으면 다행입니다. 발 딛는 자리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다른 풍경이 보이고, 때론 다른 가능성이 보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뭐라도 믿는 구석이 있어야 도망을 가지, 진짜 최악의 순간에는 도망은커녕 그 자리에 주저앉거나 잘해야 눈을 질끈 감고 견디는 것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인생이 막힘없이 순탄하고 아무 걱정도 없다면 좋겠지만 그게 뜻대로 되나요. 언젠가는 삶이 팍팍해지는 때를 겪게 마련입니다. 게다가 한 번 지났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 팍팍함이 에누리 없이 차곡차곡 쌓여만 갑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최악이 도래하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최대한 도망쳐야 합니다. 작은 일에도 자주, 웬만하면 도망가기.

 

도망이 꼭 거창할 필요는 없습니다. 절연, 독립, 퇴사, 이주, 탈출 같은 절박한 도망도 있겠지만 지금은 작은 도망에 관해 얘기하고 있으니까요. 숨 쉬는 속도만 달라져도 성공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턱 밑까지 숨이 차올라 헉헉거리는 삶을,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는 일상을 벗어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여행하기, 운동하기, 책이나 영화의 이야기에 빠져들기, 음악 듣기, 노래 부르기, 손을 놀려 무엇인가 만들기 등 사람들 저마다의 방법이 있죠. 그중에서도 오늘 소개드릴 방법은 그림 보기입니다. 그림은 가장 직관적으로 관람자의 눈앞에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매체입니다. 실제 이미지를 똑같이 모사한 그림이라고 하더라도 그림으로 보는 세계는 현실과 다릅니다. 빛을 과장하고 그림자를 뒤틀고 때론 극도의 추상을 표현한 그림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때론 상상하지도 못한 세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림 앞에서 감탄의 들숨과 평온의 날숨으로 차분히 호흡하다 보면 깨닫게 됩니다. 아, 제대로 도망쳐 왔구나!

 

지금 여의도에는 고양이의 리듬으로 호흡할 수 있는 특별한 세계가 있습니다. 귀여우면서도 음침한, 기괴하면서도 친숙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탐험하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고양이 그림을 잔뜩 볼 수 있습니다. 10월 3일부터 12월 20일까지 열리는 <유코 히구치 특별展 : 비밀의 숲>(이하 <비밀의 숲>) 전시입니다. 유코 히구치는, 잠시만요, 뭔가 이상합니다. 왜 성하고 이름 순서를 바꿔놨을까요? 여긴 이름-성이 아니라 성-이름 순서를 사용하는 한국인데 말이에요. 로마자 표기라면 모르겠으나 한글로 저렇게 해놓으니 굉장히 어색하네요. 히구치 유코는, 이제야 좀 편안하네요, 화가이자 그림책 작가입니다. 일본에서 20여 권이 넘는 책을 냈으나 번역된 책은 3권밖에 안 되니까 한국에 그렇게 많이 알려진 작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히구치 유코라는 이름은 몰라도 그림을 보면 어디선가 봤다는 생각이 들 만큼 유명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림이 워낙 독특하기 때문에 슬쩍 곁눈질로 봤다고 해도 그걸 잊을 수는 없거든요. 고양이 그림을 그리는 작가지만 흔히 상상할 수 있는 고양이 그림은 아닙니다. 분명히 고양이가 맞긴 한데..!

 

[계속 읽기]

 

 

 

_📕 [사랑을 연습한 시간] 출간되었습니다💖_

책 소개 보러 가기

 

⭑ 리뷰어 모집에 정말 많은 분들이 신청해 주셨어요. 유진 작가님에 대한 애정과 믿음 가득한 신청 이유들 몹시 뭉클했지요. 하나하나 읽으며 저에게 그렇듯 여러분에게도 선물 같은 책이겠구나, 생각했어요. 제일 처음 신청해 주신 세 분의 다정한 메시지 공유해 봅니다. 고맙습니다.

• 유진 작가님이니 당연한..! 엄마와 여성, 그리고 나의 삶이라는 다리들에 벌써 마음이 몽글해지네요.. 저는 그 다리들을 어떤 마음으로 건너게 될까요. 작가님의 마음들이 저에게 어떤 모습으로 오래오래 남겨질지, 마냥 기쁩니다. :) _moajium_

• 신유진 작가님의 모든 책을 소장하고 있는 오랜 팬입니다 :) 레터 구독을 통해 작가님의 글을 접하면서 많은 위로를 받아 책이 나온다면 꼭 누구보다 빠르게 사야겠다 다짐했었어요. 서평단 참여를 통해 책을 좋아하는 많은 분들에게 작가님의 다정한 글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_syeon_note

• 그간 소묘에서 연재된 신유진 작가님의 글을 떨리는 마음으로 읽어왔어요. 늘 딸이 하는 엄마 얘기라면 눈물을 쏟가 마련이란 생각 때문에요. 유진 작가님의 글은 단순히 눈물흐르는 얘기가 아니라서 더 좋았네요. 마음이 떨리는 얘기들. 그리고 그 글들 안에 등장하는 다른 글을 통해 마음을 넓혀나가는 얘기들. 드디어 책으로 나온다니 반갑고, 또 누구보다 먼저 만나고 싶어 신청합니다. _kuchakulo

 

_🗓️ [2025 사적인 계절 – 박혜미 달력] 예약판매💫_

✨ 박혜미 작가의 신작 그림들로 선보이는 오후의 소묘 첫 번째 달력

그림책 <빛이 사라지기 전에>로 우리에게 한여름 빛과 파도를 선사했던 박혜미 작가가 열두 달 계절의 풍경을 담았습니다. 섬세한 시선과 세밀한 묘사로 사려 깊게 그려낸 빛나는 장면들을 곁에 두고 2025년 한 해 저마다의 ‘사적인 계절’을 펼쳐가기를 바라요.

달력 주문하기

• 예약판매 안내

– 혜택: 정가 23,000원 -> 할인가 21,000원

– 기간: 2024. 11. 4. – 11. 24. | 11월 28일부터 순차 발송

• 달력 정보

– 구성: 표지 1장 + 달력 12장 + 종이 케이스

– 사이즈: 290X420mm | 지종: 앙상블E클래스 190g

 

_🖼 [여전히 나는] 모니카 바렌고 특별전이 일산의 아름다운 책방 ‘너의작업실’에서 이어집니다._

• 일정: 11.10(일) – 12. 8(일)

• 장소: 너의작업실(일산로380번길63-36)

 

_✈️ [엔딩까지 천천히] 미화리 북토크 일본 진출!! 온라인 참여도 있으니 함께해 주시면 힘이 될 거예요 :)_

• 일정: 12. 5(목) 저녁 7시

• 장소: 책거리(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간다 진보초 1-7-3 산코도 빌딩 3층)

• Zoom 온라인 참여 가능 : 신청하기(일본어)

 

_[작가의 방] 11월 예약하기_

• 장소: 오후의 소묘 스튜디오(서울 은평구 응암동)

• 시간: 화-토 15:00~18:00 | 3시간 15,000원(다과 포함)

• 링크 : 네이버 예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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