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의 어느 오후,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한 중년 남성이 앉았습니다. 역을 출발하자마자 울리는 전화벨 소리. 그가 전화를 받아요. 큰 목소리, 경상도 억양. 자리를 옮길까 고민하는 사이 그의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오랜마➚이다. 어어, 집에 가는 길~ 오늘 일찍 마➚칬제. 아이고, 당분간 내리가기 어렵지 않겠➚나. 거도 난리났대➚. 니도 단디해라. 내? 내 그렇지 뭐. 가방 맨드는 거 계속하고 있➚다➘. 작년에 좀 잘돼➚가➘ 올해 거래처 솎고 할라캤드만 지금은 뭐 혼자 해도 널널하➚네➘. 다 힘들다 아이가, 마. 코로나가 좀 가야 일도 있고 내➚리➘가서 얼굴도 보고 할낀데. 그렇다. 그래, 새해 복 마이 받아라. 3호선 불광역에서 응암역까지, 그는 마스크 너머로 한숨과 걱정과 소망이 엉긴 얼굴을 하고 있었겠지요. 저는 평소 같으면 미간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을 텐데, 그날은 어쩐지 눈썹 순한 얼굴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얼굴을 보기 어려운 날들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타인과 타자의 얼굴을, 그러니까 저마다의 생김새, 표정, 주름들을 그려보며 그 안에 담긴 삶을 상상하게도 돼요. 새해 첫 편지에는 다양한 얼굴들을 담아 보냅니다.

 

“우리는 상처가 켜켜이 쌓인 이곳, 너무나 자주 지옥의 얼굴을 보이는 물리적이고 일시적인 천국을 함께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다정함을 잃지 않는 것, 서로 연대하는 것, 깨어 있고 열려 있는 것이다.”

– 올리비아 랭 <외로운 도시>

 

 

그는 뜬금없는 나의 칭찬에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 어머니는 이상하게 구두를 신으시던 모습이 떠오르네. 몸을 숙이시고 부은 발을 구두 속에 넣을 때 살짝 찡그리시던 얼굴. / 소년의 기쁜 얼굴만큼 우리를 흐뭇하게 하는 일이 또 있을까? 일리아는 ‘야호’를 외치며 단숨에 날아올랐다. / 제가 어렸을 때 어른들이 주근깨를 ‘행복한 얼룩’이라고 불렀는데, 그래서 그런지 남편의 얼굴에 주근깨가 생기는 것이 좋더라고요. 행복한 사람 같잖아요. / 꾸밈이 없는 과거가 있을까 싶지만 그의 얼굴과 말투에서 과장의 흔적은 보지 못했다. 그저 지나온 모든 것들을 예쁘지도 밉지도 않은 물건이 들어 있는 보따리를 풀 듯 내보였다.

 

이 책을 쓰고 엮은 두 저자는 평생 지내온 곳을 떠나면서, 혹은 17년간의 프랑스 생활을 정리하면서 그들의 마지막 시간을 그간 함께한 이들의 얼굴을 기록하는 데 썼습니다.

두부같이 순하고 유연한 마뉘, 삶의 어두운 면을 다양한 색채로 휘감으며 제 생기를 내뿜는 퀴퀴, 사는 곳의 계절을 꼭 닮은 겨울의 멜리사와 여름의 멜라니, 자연에 순응하고 친구에 기대는 장이브, 물건에도 얼굴을 부여하는 제롬까지.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니 본 적 없으나 그리운 얼굴이 떠오릅니다.

“정원일도 연극도 늘 실망만 안겨주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지.”라고 말하는 세르지(오)의 얼굴은 체념이 아니라 꿈꾸는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아요.

“단단한 눈빛으로 소년은 ‘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마음에 소나기가 내렸다.” 이 순간 소년 일리아를 바라보던 작가는 또 어떤 얼굴을 했을까.

“내 이야기를 어느 프랑스인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던 예술가 카티의 말을 이곳에 옮기며, 그에게도 답해주고 싶습니다. 당신들의 이야기로 나는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고, 당신의 말처럼 “그건 대서양에 빠진 기분”이었다고요. “건널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 건너편의 해변가로 가려면 아직 너무 먼” 아득한 얼굴로.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평생 헤엄치며 건너가려 애쓰는 것이겠죠. 신유진 작가는 그 대서양을 끝내 건넌 것 같습니다.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들이 가진 반짝이는 어떤 것, 그러니까 삶을 향한 마음들을. … 나의 마음은 시간을 접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서로를 생각하는 시간들이, 한 글자 한 글자 옮겨졌던 말들이 비로소 이야기가 되고, 이름이 있는 마음이 된 것이리라. 그러니 부디 우리 주름을 부끄러워 말자. 바람이 있다면 함께 나누고 싶다. 차곡차곡 접은 이 시간들을, ‘사랑’이라 부르는 마음을.

 

‘주름은 영혼의 모습’이라고 했던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말이 겹칩니다. 시간과 마음을 접어둔 주름을 하나하나 펼쳐 보이는 이 사랑스러운 책, 1월에 함께 읽어요. 기꺼이 새로운 주름을 생성해나가는 한 해 되길 바라며.

 

이달의 책 <우리가 사랑한 얼굴들>에서 M은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적었어요. “모든 삶은 커다랗고 고유하다.” 바르다의 영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영화 속에서 커다랗다는 말은 물리적인 실체로 표현됩니다.

큰 항구 마을의 화물 선착장에 수 개의 컨테이너가 건물 5층 높이로 쌓아 올려지고 그 거대한 벽에 그곳 노동자의 아내들이 거인처럼 서 있습니다. 그 압도적인 이미지. ‘남자들의 마을’로 불리는 ‘남성들의 일터’에서 바르다는 항만 노조의 투쟁하는 남편들 뒤에 가려진 일하는 여성들의 얼굴을 ‘마치 토템처럼’ 등장시킵니다. 바르다의 말. “이제 아내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려고요.”

바르다의 눈과 발은 말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마을, 사람, 염소에게까지 구석구석 닿습니다. 그의 파트너 JR은 바르다의 눈으로 평범한 존재들의 평범하지 않은 얼굴들을 찍고 뽑고 붙이죠. 모두 커다랗고 고유하며 아름다워요.

 

“다른 사람들을 향한 관심이었죠. 알려지지 않은,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 그래서 우린 평범한 사람들, 권력을 쥐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어요. 어느 마을에서나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는 사람들이죠. … 다들 평화롭게 지내면 좋겠어요. 이 영화의 테마는 ‘함께하기’예요. 그 느낌이 관객들에게 잘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 아녜스 바르다, 제퍼슨 클라인 <아녜스 바르다의 말> 중에서

 

자기만의 색깔을 지닌 작은 서점들을 찾아다니는 소소한 즐거움을 나눕니다. 책방에서 산 책을 함께 소개합니다.

 

작업책방 ‘ㅆ-ㅁ’

 

많은 책방이 생기고 사라지는 요즘입니다. 이번엔 12월에 정식 오픈한 작업책방 ‘ㅆ-ㅁ’으로 산책했어요. 읽고 쓰는 사람들이 꾸리는 공간에서 조용히 연결되고 지지받는 기분. 작가들의 사랑방으로 자리 잡을 것 같다는 예감이 크게 들어요.

‘남는 것은 언제나 일상이다’ 프로젝트. 회화 작가 김혜영이 동명의 타인을 인터뷰하고 매달 한 폭의 그림과 짧은 글로 풀어냅니다.

 

스스로의 고독과 개인의 이야기를 화폭에 옮겨온 김혜영 작가가 자신의 그림 앞에 선 관객과의 대화로 점차 넓어지는 세계를 감각하며 이제, 그림의 주인공이 될 관객을 직접 찾아 나서는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이달은 프리뷰로 프로젝트 소개와 구인 광고(?)를 전해요.

 

혜영 프로젝트의 첫 작품은 셀프 인터뷰로 탄생할 예정이다. 진행 중인 그림.

 

안녕하세요. 김혜영 작가입니다. 제 이름은 엄마 미혜, 아빠 영희의 이름을 이어 붙인 ‘미혜 영희’의 사이 글자로 지어졌어요. 그래서인지 평생을 부모님께 안겨 지낸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평범한 이름이지만 이러한 이유로 제게는 아주 특별한데요. 2021년에는 <남는 것은 언제나 일상이다>라는 가제를 가진 일명 ‘혜영 프로젝트’로 작업을 이어나가려고 해요.

저는 광목에 세밀한 묘사를 하는 노동 집약적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레 늘어나는 작업 시간 동안 자신에 대한 사유를 많이 하는 편인데요. 이 생각의 끝은 언제나 인간의 근간을 이루는 행복과 슬픔, 웃음과 눈물은 어느 순간에서 오는지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하던 질문을 저와 동명을 가진 혜영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한 달에 한 번 완전한 타인인 혜영을 만나 인터뷰하고, 대화 내용은 회화 작업과 짧은 글로 만들어질 거예요. 매달 월간소묘 레터에서 연재하고 이것들을 모아 2021년 연말에 전시할 예정입니다. 이듬해에는 책으로도 만나요.

각자의 삶을 사는 우리들이지만 고유하게 남게 되는 공통의 이야기와 감정의 공존을 보여주고 싶어요. 이 글을 읽고 계시는 혜영 님이 계시다면, 혹은 주변에 혜영 님이 계시는 분이시라면 아래 기재된 메일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자세한 인터뷰 질문 내용과 형식을 회신드릴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혜영들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mhaengm@naver.com

* 김혜영 작가의 기존 작품에 관한 이야기는 지난 ’11월의 편지’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https://stib.ee/Oyc2

제주 고양이 웹툰. <아홉 번째 여행>을 쓰고 그린 신현아 작가가 전지적 대봉 시점으로 동생 소봉을 관찰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개 누나들도 빠질 수 없고요.

 

여러분의 난로 앞 혹은 아랫목에는 누가 자리하고 있나요? 방석에는 누가 앉아 있고요? 고양이나 개를 여럿 반려하는 집은 비슷한 풍경이 펼쳐지지 않을까 싶어요. 저희 5묘+임보냥도 쟁탈전에서 어떤 말들 주고받는지 궁금해집니다. 각각의 캐릭터가 확실한 대봉이의 일기, 이번에도 담백하게 작은 웃음 터지는 네 편의 이야기를 전해요.

 

 

* * *

 

 

[대봉이의 일기]

집중력

미안 동생아

너도 당했냐

정기린 네 컷 만화. 오후의 소묘 그림책들을 옮긴 정원정 번역가가 그의 정원생활과 일상을 귀엽고 유쾌한 그림과 이야기로 담았습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겨울일까요? 12월부터 2월? 입동부터 입춘? 겨울의 시작이 언제더라 생각해봅니다. 고양이가 아랫목을 찾아 누울 때, 온수매트를 가동할 때, 스웨터를 꺼낼 때… 봄의 시작은 고양이가 바깥을 향해 킁킁거릴 때, 재채기가 심해질 때, 더 이상 코트를 입고 싶지 않을 때… 저마다의 겨울의 길이가 있을 거예요. 정원사가 이야기하는 겨울의 시작과 끝은 제가 나열한 것들과는 사뭇 다르네요. 길고 긴 시간을 지혜롭게 나는 겨울의 재료들, 겨울편 첫 이야기로 전합니다.

 

 

 

[일상백서]

37. 겨울의 길이

39. 고양이 장난감

40. 짜이 만들기

소묘는 아시다시피 ‘작은 고양이’고요. 오후의 소묘에서 고양이 실장을 맡고 있는 이치코의 글을 전합니다. 고양이 얘기만 합니다.

 

﹅ [원래 그런 게 어딨나요?]

 

지난 연재 속 어딘가에서 이치코의 정체가 밝혀진 적이 있지요. 기억하실까요? 이치코는 경상도 출신의 장남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우주가 자기 중심으로 도는… 에헴. 이 세계의 강자로 살아오면서 무심히 지나친 것들이 무수할 테죠. 그러나 꼭 경상도 출신의 대학을 나온 중년 남성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어느 면에서는 강자이고 어떤 부분은 무심히 지나치며 살아요. 나쁜 사람(;;)은 부러 무시하고 원래 그렇다며 그럴 수 있음을 공고히 할 테고, 착한 사람은(;;;) 무심했다 해도 다른 사람이 용기 내어 말하는 순간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을 거예요. 새해 벽두부터 참담한 소식이 또 들려오는데요. 이치코의 새해 바람을 옮겨 적어봅니다.

 

“도처에 만연해 있는 부조리함에 반대하며 용기 내어 말하는 이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그 용기에 모두가 박수칠 줄 아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힘없고 약한 이들이 최소한의 생존마저 위협받는 일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세상의 모든 길고양이가 잘 먹고 잘 싸고 잘 놀다가 늙어 죽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착한 사람들은 새해 복 많이 받고 나쁜 놈들은 한 해가 쫄딱 망했으면 좋겠어요. 2021년, 해피 뉴 이어.”

 

덧) 이번 편은 사진이 압권이에요.

 

지난 연재글들 보기

😸  ‘책방 사춘기 브랜드전: 사춘기가 사랑한 책들’이벤트

그림책방 사춘기가 사랑하는 12개 출판사에 오후의 소묘가 선정되어 브랜드전에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책방 사춘기 브랜드전 도서를 구입시 굿즈 달력을 증정하는데요, 달력에는 12개 출판사의 최신간 혹은 예정작 그림이 실려 있어요. 저희는 휘리 그림책 <허락 없는 외출>로 참여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책방 사춘기에서 확인해주세요.

https://www.instagram.com/sachungibook/

 

😸  #월간소묘_연말정산 참여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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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그림책, 올해의 자립 @hipiele_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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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끈기, 올해의 지속 @oroi

@hipiele_books, @toutletempstemps 두 분께 신간 그림책 <눈의 시> 보내드릴게요. 선물 받아보실 정보 본 메일로 회신 부탁드려요. :)

 

😸  차고 흰 공기 속에 존재하는 작은 온기를 담아낸 한겨울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 <눈의 시> 출간!

 

😸  휘리 <허락 없는 외출> 저자 온라인 북토크 다시 보기

 

😸  레터 리뷰 남겨주신 분들 중 매달 한 분을 선정해 작은 선물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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