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누구나 각자의 자리가 있어요. 그렇지만 모두가 똑같은 자리를 가진 건 아니에요. 왜인지, 언제부터인지 알 순 없지만 자리에는 높낮이가 정해져 있었어요. 높은 자리는 더 멀리 더 많은 풍경을 볼 수 있겠죠. 아마 낮은 자리의 풍경보단 좋은 풍경일 거예요. 높은 자리의 사람들은 말할 거예요. 각자의 높이까지 올라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때론 치열한 경쟁을 뚫기 위해 어떤 각오를 했는지에 관해서 말이에요. 맞아요. 높은 자리에서 보이는 풍경이 그렇게나 좋은 것이라면 아무 대가 없이 그저 주어질 리는 없죠.

 

낮은 자리의 풍경이 보잘것없다고 하더라도 그곳은 머물며 쉴 수 있는 안전한 곳이어야 해요. 각자의 자리란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이기 때문이에요. 비록 낮은 자리라도 세계와 단절되어선 안 돼요. 비좁고 뿌연 틈으로 비친 각박한 풍경일지언정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해요.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낮은 자리의 풍경을 빼앗을 순 없어요. 자신이 발 딛고 선 세계와 단절된다는 건 감옥에 갇히는 것과 같거든요. 자유를 빼앗긴 자리, 그건 낮은 자리가 아니라 절망의 자리일 뿐이에요.

 

Photo by Denny Müller on Unsplash

 

얼마 전, 50세대 이상의 공동주택을 지을 경우에는 경비원 등의 근로자를 위한 휴게시설을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는 법령 개정안이 시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런데 기사 제목을 보며 한참을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경비원, 미화원, 관리사무소 직원처럼 아파트에 고용되어 일하는 노동자를 위한 휴게실도 없었단 말인가. 아파트에 살아본 적이 없다 보니 눈여겨 보지 않았던 거예요. 친구의 집에 놀러가거나 길을 지나며 보았던 아파트의 경비실이 누군가의 격렬한 노동 공간임을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어요.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 나오는 아파트 경비실은 마치 살림의 공간처럼 보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거기서 라디오도 듣고 조그만 TV도 보고 라면도 끓여 먹으면서 마치 생활을 하는 것처럼 묘사되곤 했으니까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보이는 세상의 풍경이 어땠을까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진 거예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아파트란 공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을 거예요. 아파트가 곧 하나의 세계죠. 그 세계에서 누가 높은 자리이고 누가 낮은 자리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죠. 심지어 아이들마저 그 차이를 깨닫는 경우가 있어 우리 맘을 아프게 하곤 하죠. 물론 어디에나 선한 의지가 작동하는 예외들이 있으니, 어떤 아파트에는 노동자를 위한 휴게실이 설치된 경우도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누군가의 선의로 인해 존재한다는 건 언제나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에요. 선한 의도의 원천인 곳이 곧 악한 의도의 기원이기도 하니까요. 마음 말이에요. 사람의 마음은 완전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제도가 필요한 거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최소한의 권리, 어느 자리에 있더라도 세상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자유는 반드시 지켜져야만 해요.

 

Photo by 蔡 世宏 on Unsplash

 

그런데 고양이는요? 고양이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길에서 사는 고양이들은 어떤 자리에 있는 걸까요? 슬픈 일이지만 길 위의 고양이를 위한 자리가 따로 있지는 않아요. 수많은 길고양이들이 각자의 자리를 찾아 처절하게 떠돌고 있을 뿐이죠. 그 시도의 대부분은 아마 실패할 거예요. 인간이 만든 도시, 그곳의 모든 자리는 인간을 위한 것이거든요. 높은 자리건 낮은 자리건 상관없이, 행여 땅 속으로 푹 꺼진 어둠의 자리라고 해도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길고양이의 자리를 위해 밥을 챙기고 물을 챙기고 은신처를 챙기고 있지만 그 선의만으로 한 존재의 품위와 안전을 확보하기엔 역부족일 수밖에 없어요. 고양이가 길에서 살아간다는 건 자리 없는 자리를 찾는 일에 운명을 맡겨야 하는 끝없는 불안을 견디는 일이에요.

 

제가 삼삼이를 만난 것도 그 불안의 한가운데였어요.

합정 김씨에 이름은 삼삼, 멋진 선글라스를 쓴 얼굴과 삼색 무늬 몸통의 저희 집 첫째 김삼삼.

 

 

스트릿 시절, 예쁜데 꼬질꼬질한 삼삼이

 

To be continued…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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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코의 코스묘스]

시즌 1, 코스묘스의 오묘한 시작

Episode 1. 한낮의 작고 짙은 온기를 닮은 고양이, 오히루

① 반짝이는 삶   |   ② 막연한 기다림   |   ③ 기쁨의 크기

Episode 2. 잃어버린 시간에 관하여, 김삼삼

④ 각자의 자리   |   ⑤ 굴러온 돌   |   ⑥ 잃어버린 시간

Episode 3. 미래에서 온 카오스, 강모카

⑦ 빈 책상   |   ⑧ 혼돈의 카오스   |   ⑨ 오래된 미래

Episode 4. 이치코,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⑩ 화려한 시절   |   ⑪ 보내는 마음   |   ⑫ 이치코의 코스묘스   

Episode 5. 어느 날  갑자기 – 불쑥, 고미노

⑬ 뜻밖의 여정   |   ⑭ 회색의 미궁   |  ⑮ 약자의 마음 (1)   

Episode 6. D의 의지를 잇는 자, 송오즈

⑯ 소리치는 일   |   ⑰ 총체적 난국   |   ⑱ 엔드게임 and..

시즌 2,

길어질 게 뻔한 변명(1)   |   길어질 게 뻔한 변명(2)   |   길어질게 뻔한 변명(3) 

원래 그런 게 어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