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덕 할아버지, 평생 교사였던 데다 사회적으로 두루 존경받으셨던 터라 선생(님)이란 호칭이 더 알맞겠지만 이제 돌아가신 지도 오래되셨기에 조금 편안한 호칭을 붙여보았습니다. 실제로 저의 할아버지 연배셨기도 하고요. 아무려나, 이오덕 할아버지가 쓰신 <거꾸로 사는 재미>라는 책에는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가 (제 기억에 남아 있는 바로는) 두 번 등장해요. 한 번은 “고양이가 방에 들어온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서 고양이에 관한 세심한 관찰과 그들의 처지를 다룬, 소제목마저 ‘고양이’인 이야기예요. 다른 한 번은 ‘과자를 먹는 아이들’이란 꼭지에 “고양이는 땅을 발로 파서 똥을 누고는 묻어 버린다.”라며 언급되고 있어요.

 

아이들이 과자를 먹는 것과 고양이가 똥 누는 게 무슨 상관인지 궁금하실 수도 있겠네요. 두 번째 이야기에서 주제가 되는 건 아이들이 과자를 먹는 문제가 아니라(물론 그 얘기도 있긴 하지만요) 과자를 먹은 뒤 아무 데나 버리는 비닐 쓰레기예요. “무슨 일로 운동장 한쪽을 파보았더니 온통 비닐 쓰레기가 한도 없이 나왔다. 그것도 과자 봉지가 대부분이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농촌은 온통 비닐과 플라스틱으로 인해 추악한 모습이 되어 가고 있고 도시는 대문 밖에 내놓은 쓰레기들이 어디로 실려 가는지 염려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한탄하고 있어요. 무려 1982년 11월이라는 날짜가 적힌 글은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못하더라도 고양이가 제 새끼들에게 똥오줌 처리하는 걸 가르치는 정도의 시범은 아이들에게 해 보여야 할 것인데, 그게 안 되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았습니다.

고양이에게 배울 게 똥오줌 덮는 것 말고는 없는가?

당연히 있죠!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고양이한테 배우지 않아도 될 만큼 제대로 된 게 인간 사회에 있기나 한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았는데요. 그중 몇 가지만 살펴볼까 합니다.

 

1. 잠

고양이를 한 문장으로 표현해야 한다면 이렇게 쓸 수 있을 거예요.

잠자기 위해 태어난 존재.

 

 

고양이에게 신체활동을 측정하는 장비를 부착해서 지켜봤더니 하루에 스무 시간 넘게 잠을 자는 것으로 관찰되었다,라는 얘길 어디선가 보았습니다. 출처는 불명확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 말이 명백한 사실인걸요. 고양이와 함께 며칠만 살아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이 자는지, 얼마나 잠에 진심인지 말이에요. 뭐 하러 장비까지 동원해 관찰했는지 모르겠네요.

 

잠자는 시간을 너무 좋아해서 오직 이불 속에 파고들 생각만으로 하루를 버티는 저 같은 사람은 늘 생각합니다. 사람들도 고양이처럼 잠을 많이 잤으면 좋겠다. 간혹 이런 생각도 해요.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문제는 사람들이 너무 오래 깨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게 아닐까? 모든 사람이 하루에 열네 시간쯤 잔다면 지구에 평화가 찾아올 텐데… 아니라고요? 그렇게 게으르면 안 된다고요? 인생이 얼마나 짧은데, 시간을 아끼고 아껴서 열심히 살아야 후회가 없는 법이라고 반박하신다면, 러셀 포스터Russell Foster라는 신경과학자가 TED 강연에서 했던 말로 대답을 대신하겠습니다.

“제 경험상,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의 유일한 차이점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우쭐댄다는 것이다.”

 

2. 독립성

독립성을 사람에게 적용할 때는 어느 정도 선악의 관념 혹은 호오의 감정이 포함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독립적이라는 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어떤 관계가 존재해야 하고 그사이에 형성된 힘(권력이라고 해도 좋고요)이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분석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럴 거예요. 대체로 독립적인 게 선한 쪽, 지향해야 할 바에 속하고 종속적인 게 악한 쪽, 극복해야 할 바에 속합니다. 만약 선악이나 호오를 판단하기 모호한 상황이라면, 겉으로는 비록 독립적/종속적으로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전혀 다른 관계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갓난아기에게 너는 왜 독립적이지 못하니,라고 묻지 않고 예닐곱 살 아이에게 네 밥벌이를 스스로 해야 한다는 의미로 독립성을 강요하지 않듯이 말이에요.

 

고양이는 독립적인 동물입니다. 혹은 그렇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할 때는 늘 조심해야 해요. 독립성을 사람에 적용하듯이 취급하면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 고양이의 건너편엔 언제나 개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개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되물을 거예요. 고양이가 독립적이라면 개는 종속적인가? 개가 고양이보다 못 하단 말인가? 아니죠. 개도 고양이도 모두 온전히 독립적인 존재들이에요. 다만 독립성이 드러나는 양태가 서로 다를 뿐. 물론 고양이 녀석들이 조금 독특하긴 하죠. 그들은 어떤 관계에 기대지 않은 채 홀로 독립적일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대략 2,500년도 더 전에 이와 유사한 역사적 사례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네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씀이.

 

 

사람 사는 일이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고는 해도 사회가 복잡하게 발달할수록 관계의 무게에 짓눌려 고통 받는 이들이 늘어간다는 건 걱정스런 일이에요. 관계망 위에 투영되는 모습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내면이 텅 빈 껍데기의 인정 욕구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역시 위험한 징후일 테고요. 보통은 이쯤에서 명상과 구도의 길로 인도하는 등대의 불이 켜지는 법이지만, 이 글은 ‘이치코의 코스묘스’니까 그에 맞게 고양이의 유별난 독립성을 배우자는 말을 하고 싶어요. 고양이의 독불장군 같은 독립성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관계 속에서 표류하지 않을 수 있고, 또한 자기 존재를 잠식하지 않는 유연한 관계를 생성할 수 있을 거예요. 마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내가 최고이고 가장 존엄한 존재다’라는 자기도취적 선언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먼저 깨달은 붓다처럼)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인간 존중 선언인 것과 같은 얼핏 역설적으로 보이는 가르침으로 인해 말이에요.

그렇다면 어떻게 배울 것인가? 글쎄요.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진 않네요. 고양이와 공존하며 고양이를 사랑하고 고양이의 행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안 될라나요? 에이, 될 거예요.

 

3. 불화

가족이란 무엇인가?

쉽사리 대답하기 힘든 질문입니다. 그런데 답을 내놓긴 어려워도 왜 어려운지에 대한 이유는 의외로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애당초 가족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죠. 세상엔 수많은 가족의 형태가 있어요. 근대화 이전에 3대가 너끈히 모여 살았던 대가족부터 불과 삼사십 년 전까지만 해도 모범적 양식으로 여겨졌던 4인 가족을 거쳐 최근에 두드러지고 있는 1자녀 혹은 무자녀 가족까지,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비교적 표준 형태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가 하면 표준에서 벗어났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가족도 존재하죠. 동성애자 부모에게 입양된 이성애자 자식으로 구성된 가족(애석하게도 한국에서는 아직 불가능한 일이지만요), 노부모와 장애인 아들로 구성된 가족, 조부모와 손주로 구성된 가족, 부부와 여섯 고양이로 구성된 가족(!) 등등. 이렇게 다양한 현실을 마주하고도 대체 가족을 하나의 개념으로 묶을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마저 듭니다. 이 상황을 두고 가치를 판단해버리는, 이를테면 정상 가족과 결여된 가족으로, 문제는 곤란하기까지 하고요.

 

기왕 가족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으니 하나만 더 짚어볼게요. 가족의 개념은 시간의 흐름과 무관한 것일까요? 젊은 부모와 한 살배기 아기로 구성된 가족이 나중에 중년의 부모와 이십 대 아이가 되었을 때, 더 시간이 흘러 노년의 부모와 장년의 자식이 되었을 때, 만약 그들이 여전히 한집에서 살고 있다면 그 세 시간대의 가족을 같은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사람도 그대로고 장소도 그대로고 오직 시간만 흘렀을 뿐인데.. 저는 똑같은 가족이라고 부를 순 없지,에 가까운 편인 것 같아요. 하지만 어떻게 다른 것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을 못하겠어요.
아, 도대체 가족이란 무엇일까요?

 

 

고양이는 화목함이란 걸 모르는 동물입니다. 집사들은 고양이가 야기하는 불화에 종종 당황하곤 해요. 어젯밤에 다정하게 한 이불을 덮고 잠들었다가 아침까지도 기분 좋게 인사를 나누고 집을 나왔는데, 밤에 돌아와서 문을 열었더니 마치 처음 보는 사이인 양 슬금슬금 피하며 소파 밑으로 숨을 때가 그렇습니다, 미노야! 오즈야! 6년을 함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감기에 걸려 코 한 번 세게 풀었다고 무슨 천둥번개를 만난 것처럼 부리나케 이불 밑으로 파고들어가 몇 시간이고 꼼짝하지 않을 때가 그렇습니다, 모카야! 8년을 동고동락했지만 여전히 인간의 기분일랑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오직 자신의 쾌락과 짜증을 발산하는 데 여념 없는 모습과 대면할 때가 그렇습니다, 삼삼아! 물론 화목한 시간도 있긴 합니다만 그 잠깐을 만끽하려는 순간 고양이는 여지없이 불화를 일으키곤 해요. 나는 저들에게 어떤 존재인가,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어떨 땐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나와 고양이들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 기능적으로 결합한 사이가 아닐까? 신뢰와 사랑과 배려로 맺어진 우애 깊은 관계가 아니라 상호 합의된 계약으로 유지되는 건조한 관계, 이를테면 직장 동료 같은 관계. 인간은 고양이의 건강과 밥과 똥오줌과 기분을 살뜰히 챙기는 역할에, 고양이는 그저 고양이로 존재하는 역할에 각자 충실하며 동일한 공간에 함께 있을 뿐인 거죠. 신뢰와 사랑과 배려는 관계의 형성 조건이 아니라 관계 맺음이 산출하는 여러 결과 중 하나일 뿐이고요. 그런데 살아보니 그것도 좋은 관계입니다. 기능적 결합으로도 충분히 우애가 깊어집니다. 고양이가 화목함을 거부하고 불화를 야기하는 존재라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열심히 고양이들의 밥을 챙기다 보면, 부지런히 화장실을 치우다 보면, 그렇게 집사로서의 기능을 잘 수행하다 보면.. 회사에서도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되실 거예요.

 

가족이란 결국 의무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싶어요. 가족이라는 관계에는 크고 작은 무수한 의무들이 존재하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횡행하는 폭력, 자기 위안에 불과한 위로, 오직 본인만을 위해 발동하는 옹졸한 용기를 눈앞에 펼쳐 보였다. 그래서 어려웠다. 뒤틀린 사랑을 알고도 사랑을 믿는 일이, 위로와 용기의 이면을 알면서도 위로하거나 위로받거나 용기를 내는 일이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우울이라 쓰지 않고>에서 문이영 작가가 우울에 관해 말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저 문장의 앞뒤에 가족을 붙여 놓아도 매끄럽게 읽힐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의 온갖 좋은 말들을 다 끌어다 가족을 설명할 수 있지만, 한편으론 가족이기에 강요되는 의무 앞에서 그 좋은 것들이 처참하게 일그러질 수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러한 의무 중 가장 강력하면서 한편으론 제일 큰 상처를 남길 수도 있는 것이 바로 화목함의 의무일 거예요. 가족끼리 화목해야 한다는, 절대적 의무, 무서운 말.

 

 

저는 여섯 고양이와 함께 삽니다. 지면에 미처 다 써내려 갈 수 없을 만큼 긴 불화의 시간과 살랑거리는 바람에도 툭 끊어질 만큼 부실하고 위태로운 화목함 사이를 횡단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섯 고양이 모두 부정할 수 없는 제 가족으로 여기고 있어요. 가끔 서로가 너무 기능적인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지만 그게 의무로서의 화목함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신뢰할 수 있는 명확한 기능으로 맺어진 관계, 사람 가족도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서로 강요하지 않고 평등하게, 정중하게, 섬세하게 각자의 기능에 충실할 수 있다면.

연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가족 불화의 계절이네요. 화목하지 못함에 자책하고 상처받고 좌절하는 이들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힘들 땐 고양이를 생각하세요. 불화의 아이콘, 독립성 강한 잠탱이들. 새해에는 관계에 짓눌리지 말고 불화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푹 잠드는 날들이 이어지기를 바랄게요.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2023년에 다시 뵙겠습니다. 조금 이른 감은 있지만 어쨌거나, 해피 뉴 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