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나 일본 드라마를 즐겨 보는 편입니다. 딱히 의도한 게 아니라 OTT 서비스 환경에서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 재밌다고 하면 웬만하면 찾아보는 편입니다. 올해 본 목록만 해도 <웬즈데이 S2>, <더 베어 S4>, <오오마메다 토와코와 세 명의 전 남편>, <바라카몬>, <가공 OL 일기>, <안도르 S2>, <데어데블: 본 어게인>, <핫 스팟>, <세브란스: 단절 S2>, <사일로 S2>, <슬로 호시스 S4>, <리전 S1 S2>, <블랙 도브>, <아수라처럼>, <엄브렐러 아카데미 S4> 등이 있습니다. 영국은 어떤 작품이 영국 드라마인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미국에 업혀 가는 걸로 하고, 그 외 국가의 드라마는 접할 기회가 드물다 보니 최근 몇 년을 통틀어도 얼마 안 됩니다. <종이의 집>(스페인), <다크>(독일), <뤼팽>(프랑스) 그리고 <상견니>(대만)!! 정도가 기억날 뿐이네요. 그렇다면 한국 드라마는?

 

안 봅니다. 거의. <정년이>(2024)와 <악귀>(2023)(김태리가 나오니까!!) 정도가 기억나고 그전에 봤던 마지막 드라마는 <킹덤: 아신전>(2021)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본 게 없습니다. 이상하게 한국 드라마는 손이 안 갑니다. 브라운관에, 요즘엔 OLED나 QLED라고 해야 하려나요, 아무튼 화면 속에서 재현되는 한국적 상황을 못 견디는 편입니다. 등장인물의 ‘한국적’ 대사, ‘한국적’ 감정, ‘한국적’ 갈등, ‘한국적’ 화해와 용서 등등을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시대적 배경이 조선이거나 서기 3000년이라도 소용없습니다. 한국의 연장선일 뿐이니까요. 저는 그냥 한국을 싫어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미국이나 일본은 좋아하느냐고요? 그럴 리가요. 거긴 트XX 같은 놈들이 있는 곳인데. 두 나라 모두 어쩔 땐 한국보다 더 꼴 보기 싫은 나라들입니다. 그래도 드라마 속 상황들이 ‘미국적’, ‘일본적’이기 때문에 거리를 두고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미드, 일드를 보는 동안엔 적어도 “아, 젠장 내가 한국에 살고 있지”라며 화들짝 놀라진 않으니까요. 한국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내 말 좀 믿어주면 안 돼?”

 

그런 제가 최근에 한국 드라마 두 편을 연달아 보고 있습니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다 봤고 <은중과 상연>은 3화까지 달렸습니다. 재밌더구만요!! <은중과 상연>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10대부터 함께한 은중과 상연. 동경과 질투, 애증이 20대, 30대를 채우다 결국 돌이킬 수 없이 멀어졌다. 이제 마흔둘, 은중은 상연의 죽음에 동행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공식 소개 글) 아직 3화까지밖에 못 본 터라 주인공 은중과 상연의 나이가 (만으로) 스물에 머물러 있습니다. 서른까지 어떻게 둘의 삶이 포개지고 엇갈리는지 알 수 없지만 스물까지의 이야기는 무척 좋았습니다. 저에겐 왠지 모르게 한국적이지 않은 느낌이었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지 않고 이야기를 거칠게 휘두르지 않으면서도 두 여성의 삶을 섬세하고 풍부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주연 배우들의 연기는 물론이고 아역의 연기도 좋았고요. 아직 열두 편이나 남아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이대로라면 충분히 좋은 드라마로 기억에 남을 듯합니다.

 

다만 <은중과 상연> 역시 피해 가지 못하는 한국적 상황이 있긴 했습니다. 그놈의 나이. 92년에 은중과 상연이 처음 만났을 때 몇 학년이었지? 천상학이 97년 수능에 합격했으니까 78년생인가? 은중이 01학번이니까 2024년엔 (만으로) 마흔둘, 그럼 상연은 그 나이에 백상예술대상 특별상을 받는 건가? 등등. 미드나 일드를 볼 때는 한 번도 의식해 본 적 없는 그놈의 나이를 본능적으로 머릿속에서 셈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정말 뼛속부터 한국 사람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대체 그게 왜 궁금한 건데?? 그리고 특정 연도에 대한 본능적 반응은 주인공의 나이 계산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92년, 1994년, 1997년, 2001년 이런 식으로 화면에 자막이 등장할 때마다 당시 제 개인의 과거사와 한국의 현대사가 자동적으로 재생되었습니다. 머릿속의 강제 회상 신으로요. 1992년, 입학, 황영조 금메달, 대통령 선거,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비준, 성수대교 붕괴, 학생회장 선거, 1997년 졸업, IMF.. 드라마를 보는 데 방해가 될 정도로 말이에요. 그러다가 그 일들이 몇 년 전이었는지를 생각하곤 갑자기 우울해졌습니다. 아직 생생한 것 같은데 한참 전의 옛날 일이구나.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어. 정말로.. <응답하라> 시리즈(안 봤음)라면 몰라도 <은중과 상연>이 이런 기분을 느끼라고 만든 드라마는 아닐 테지만 아무튼 그런 기분이 들고야 말았습니다.

 

“난 너무 염세적인 것 같아.”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은중과 상연>보다는 조금 복잡한 드라마였습니다. “국내 최고의 프로파일러가 수사 중인 살인사건에 얽힌 딸의 비밀과 마주하고, 처절하게 무너져가며 심연 속의 진실을 쫓는 부녀 스릴러.”(공식 기획 의도) 아버지와 딸 사이를 가르는 미묘한 감정과 태도의 변화가 중요하긴 하지만 극을 이끌어가는 핵심 사건이 있고 그 살인범을 잡아야 한다는 미션이 분명했습니다. 한국 드라마를 이렇게 만든다고?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 역시 한국적 상황에 대한 각성을 피해 갈 수는 없었습니다. 주인공인 장 팀장은 마지막에 사표를 제출합니다. ‘경찰로서 선을 넘었을 때 이미 결심했던 일’이라고 하면서요. 딱히 놀랄 일은 아니었습니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저 양반은 이 사건 끝나면 그만두겠구나 싶었거든요. 문제는 그렇게 최종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다음이었습니다. 갑자기 장 팀장이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드라마에서 묘사된 걸 봤을 때 경제적으로 여유 있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딸이 고등학생이면 아직 돈 들어갈 데가 많을 텐데 퇴직하고 뭘 하려나? 경찰 연금으로 가능한가? 그 성격에 자기 전공 관련된 일을 할 것 같진 않고.. 식당을 차리려나? 아니면 카페, 치킨집? 드라마 캐릭터한테 참.. 오지랖도 넓다 싶긴 했지만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어떤 식으로든 노후를 준비해야 하고 거기다 고양이가 여섯이나 있는데..

 

그러다 갑자기 노후준비가 궁금해졌습니다. 노후준비란 뭘까요? 언제부터 사용된 개념일까요? 한국을 벗어난 나라들에서도 노후준비란 걸 하고 있겠죠? 영어로는 뭐라고 하나 검색해 봤더니 retirement planning 혹은 preparing for retirement라고 알려주네요. 은퇴라는 단어가 들어가니 훨씬 직관적으로 이 개념이 자본주의에서 나왔음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종결점이 정해져 있는 경제활동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조선시대 농부한테 은퇴가 어딨나요. 소수의 지배계급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생계 활동의 시작부터 죽음까지 특별한 단절 없이 똑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늙었을 때를 대비해 무언가를 준비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늙어감이 서러웠을 수는 있겠으나 늙었다고 굶어 죽을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 시절은 지금과 달랐습니다.

 

밥을 안 준다니.. 그건 말도 안 되지!

 

지금의 도시 사회보다 그때의 마을 공동체가 더 나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고려했을 때 현대 도시 사회의 장점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자유롭고 다양하며 때론 예측 불가능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을은 그렇지 않죠.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개인의 특성이나 활동이 어느 범위를 넘지 않아야 합니다. 개인의 삶에 좀처럼 선택지를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을 공동체가 도시 사회보다 확실하게 좋은 점이 하나 있습니다. 개인의 안전과 생존을 (어느 정도는) 확실히 보장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노후준비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늙은 몸으로 할 수 있는 만큼 일을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일을 적게 한다고 밥을 덜 주고 일을 못 한다고 밥을 안 주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때보다 지금이 더 발전한 사회인 건 부정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노후준비 하나만큼은 완벽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체로 인류의 역사는 발전의 과정이라고들 합니다. 개인의 인권은 물론 사회적 생산력, 기술력 모두 과거에 비하면 눈부신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왜 노후준비는 더 퇴보했을까요.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공동체의 든든함이 사라진 자리를 돈이 대신했습니다. 오직 돈만이 노후를 보장합니다. 노후준비는 노후에 대한 종합적인 준비가 아니라 노후를 위한 자금 마련과 동일한 뜻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나이가 충분히 들어 내가 노인이란 걸 인정하게 되었을 때 어떤 사회적 활동을 할지에 대한 준비, 어떻게 친구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교류할지에 대한 준비, 여가와 취미를 꾸준히 이어가기 위한 준비는 소외되어 있습니다. 가능하면 노후 이전과 급격하게 단절되지 않는 이러한 삶을 위해선 당연히 돈이 필요하지만, 돈이 준비됐다고 해서 노후가 준비된 것은 아닙니다. 충분한 돈을 손에 쥐는 데 성공한 노인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돈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내가 내 모습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싶습니다.

 

노후는 친구들과 함께

 

저에게 가장 중요한 노후준비는 고양이에 대한 계획입니다. 계산을 해 봤습니다. 도서관육묘의 막내인 시월이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나는 몇 살인가? 스무 살에는? 시월이가 열여덟 살이 되는 해에 저는 법적으로 노인이 됩니다. (노인의 기준 나이를 올리자는 말들이 나오고 있으니 어찌 될지 모르긴 하지만 아무튼요.) 국민연금을 내는 게 아니라 받게 되고 지하철도 무료로 타게 되고 등등. 그렇게 노인이 되었다고 해도 요즘엔 다들 육체적으로 젊은 편이어서, 게다가 저는 요가를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스무 살의 시월이를 돌보는 데 큰 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일상적인 돌봄은 물론이고 혹시 병간호를 하게 되더라도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뭐 한 방에 훅 가는 수도 있긴 하겠지만 부디 그러지 않기를 바라며..) 노인이기 때문에 생기는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

 

나는 노인이다. 하지만 비교적 쌩쌩하다. 대략 67세라고 하자. 길을 가다 혼자 있는 아깽이를 발견했다. 다가가 보니 허피스가 심해 눈과 코과 온통 짓물렀다. 근처에 어미는 없거나 있다 해도 아이를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다. 어떡하지?

 

치코, 미노, 오즈, 시월이를 구조할 때 제 마음은 똑같았습니다. 끝까지 책임진다. 꼭 식구로 맞아서 함께 살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좋은 곳에 입양을 보낼 수 있다면 그것도 한 고양이의 생명을 끝까지 책임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치코, 미노, 오즈, 시월이 모두 입양을 보내려고 했습니다. 적극적으로 입양 홍보를 하지 않아서(치코) 그 예쁜 눈을 보고 도저히 보낼 수 없어서(미노) 신뢰할 수 있는 문의가 없어서(오즈) 입양을 갔다가도 돌아오는 바람에(시월) 같이 살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구조 후 첫 번째 옵션은 입양 보내기였습니다. 고양이가 둘에서 셋으로 (중간 생략) 다섯에서 여섯으로 늘어나는 사건이 처음이라, 매번 ‘고양이가 여기서 더 늘어도 되나?’라는 걱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대실패였지만..) 아무튼 그렇게 입양을 보내겠다고 했지만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는 다른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입양이 안 되더라도 끝까지 책임진다. 함께 살면 되지 뭐!

 

팔천..그람이 될 때까지 책임진다!

 

그래서 67세쯤의 저 자신이 벌써 걱정되기 시작합니다. 아깽이를 구조해서 만약 입양을 못 보내게 되면 그 아이를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 아이가 열다섯 살만 되어도 82세가 되는데.. 제대로 돌볼 기력이 있을까? 기대 수명이 아무리 늘었다고 하지만 그때까지 살아는 있을까? 아니 살아 있고 싶기는 할까? 생각만 해도 난감합니다. 그리고 슬퍼집니다. 언젠가는 고양이 없이 살아야 할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요. 고양이가 없는 삶이라니. 그것도 삶은 삶이겠으나.. 제 노후준비의 목표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마지막 고양이를 떠나보내고 하루 더 살다 죽는 것. 당연히 쉽지 않습니다. 집고양이의 일반적인 수명이 13~20년이라 막내인 시월이 나이를 기준으로 하면 그때 제 나이는 60세에서 67세, 딱히 장수에 대한 욕심은 없지만 그 나이에 죽는 건 좀 빠른 것 같아 아쉽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고양이와 함께 새 인생을 설계하기에도 애매한 나이인 것 같고.. 물론 시월이가 서른 살까지 초장수 고양이로 살아주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 기왕이면 삼삼이도 서른여덟 살까지! 그러면 그때 제 나이는 77세, 그 정도면 적절한 것 같기도 한데.. 불가능하겠죠. 아마도.

 

가능하면 오랫동안 고양이와 함께 살고 싶다는 마음, 어느 순간 이것이 엄청난 욕심임을 알아버렸습니다. 수백 억의 자산으로 은퇴하고 여유롭게 살겠다는 계획보다 더 큰 욕심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저만의 노후준비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삼삼, 모카, 치코, 미노, 오즈, 시월이가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도록 잘 보살피고 저 역시 살아 있는 동안은 고양이를 돌볼 기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잘 준비하고, 그리고 혹시 고양이와의 새로운 인연이 아직 남아 있지는 않을까 설레며.. 언제까지라도 고양이를 사랑하는 노인이 되기 위해.

 

사랑하는 우리 자매님들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구독하기

 

[이치코의 코스묘스]

시즌 1, 코스묘스의 오묘한 시작

Episode 1. 한낮의 작고 짙은 온기를 닮은 고양이, 오히루

① 반짝이는 삶   |   ② 막연한 기다림   |   ③ 기쁨의 크기

Episode 2. 잃어버린 시간에 관하여, 김삼삼

④ 각자의 자리   |   ⑤ 굴러온 돌   |   ⑥ 잃어버린 시간

Episode 3. 미래에서 온 카오스, 강모카

⑦ 빈 책상   |   ⑧ 혼돈의 카오스   |   ⑨ 오래된 미래

Episode 4. 이치코,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⑩ 화려한 시절   |   ⑪ 보내는 마음   |   ⑫ 이치코의 코스묘스   

Episode 5. 어느 날  갑자기 – 불쑥, 고미노

⑬ 뜻밖의 여정   |   ⑭ 회색의 미궁   |  ⑮ 약자의 마음 (1)   

Episode 6. D의 의지를 잇는 자, 송오즈

⑯ 소리치는 일   |   ⑰ 총체적 난국   |   ⑱ 엔드게임 and..

시즌 2,

길어질 게 뻔한 변명(1)   |   길어질 게 뻔한 변명(2)   |   길어질게 뻔한 변명(3) 

원래 그런 게 어딨나요? 

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1)   |   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2) 

고양이의 버킷리스트 

떨림이 멈추지 않는 세계에서(1)   |   떨림이 멈추지 않는 세계에서(2) 

시즌 1, Again

• Episode 7. 고양이, 장소, 환대, 시월이

⑲ 1, 2, 3, 4, 5, 6, 북적북적   |   ⑳ 혁명의 선봉   |   ㉑ 앙시앵 레짐    |   ㉒ 우정과 환대      

시즌 2, Again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고양이에게 배운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 고양이 책 #1 총, 균, 쇠 다정한 반복 치코의 일기 선물 같은 시간 마지막 겨울길고양이 돌봄 지침(가이드라인)  •  특별 임무: 고양이 여섯을 데리고 이사하기 ①  •  특별임무: 고양이 여섯을 데리고 이사하기 ②  •  만수무강  •  완벽한 하루  •  복잡계 이론: 다묘가정에 관한 수학적 고찰   •  그것도 척추라고   •  노후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