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건 재미없잖아요. 많은 사람이 정치적 견해 혹은 사건에 대해 (특히 선거철만 되면) 키보드가 부서져라 열변을 토하곤 하는데, 그렇게 에너지를 쏟을 만큼 중요한 것이라 생각지도 않아요. 단지 어떤 정치인들을 보고 있으면 궁금한 게 좀 있을 뿐이에요. 젊었을 때 권력의 반대편에 서서 격렬하게 맞서다가 나중에 권력의 핵심에 안착하게 된 사람들에 관해서요.(민주화운동이나 학생운동을 하다가 국회의원이 된 이들이 대표적인 사람들이죠.) 젊은 시절 그들이 보여주었던 말과 행동은 얼마큼 진심이었을까? 그때의 뜨겁고 격렬했던 마음이 진심이었다면 지금은 왜 이런 모습일까? 어느 정도의 거리만큼 변한 걸까? 혹시 그저 운동‘권’이라는 세력의 중심에 있는 걸 좋아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사람은 결국 바뀌지 않는다는 건가? 잘 모르겠어요. 어떤 때는 알 것 같다가도 돌아서면 전혀 이해할 수 없기도 하고 그래요. 그들 머릿속에 들어가 보지 않고서야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사실 그만큼 궁금하지는 않아요. 뭐 하러 그 머릿속에 굳이…) 다만 생각하면 할수록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아요. 그들이 저와는 뭔가 다르다는 사실 말이에요.

 

20대 시절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 늘 고민이었는데 최근에야 정리가 좀 되었어요. 20대는 ‘어릴 때’였어요.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젊음이 넘치는 시기였으니 ‘젊을 때’라고 해도 상관은 없겠으나, 그렇게 부르기엔 너무 어렸던 것 같아요. 지금은, 늙었다고 하긴 애매하지만 젊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젊을 때’는 ‘어릴 때’와 지금의 중간쯤 어디라고 할 수 있어요. 이 구분이 나이가 들어가는 방향을 따라가긴 하지만, ‘어릴 때’보다 ‘젊을 때’가, ‘젊을 때’보단 지금이 더 고상하고 성숙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사실 나이가 든다는 건 세월의 흔적이 육체에 누적되는 물리적 작용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생각해요. 나이를 먹고 철이 든다거나 늙으면 현명해진다는 건 다 뻥이에요. 철없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현명한 판단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변화가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냥 미숙한 철부지 상태로 나이만 먹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의 ‘어릴 때’와 ‘젊을 때’를 구분하는 기준은 어떤 완성도와는 상관이 없어요. 돌이켜 생각해 봤을 때, 기억에서 지우고 싶거나 이불 속에 숨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다면 ‘어릴 때’이고, 여전히 부끄럽긴 해도 그간의 사정을 한번 살펴봐 줄 만하다면 ‘젊을 때’예요. 그렇게 하니까 20대 후반을 기준으로 나뉘게 되더라고요.

 

오즈, 어릴 때

 

열정이 사라졌던 것 같아요. 20대 후반에 말이에요.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열정은 아니었어요. 그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거라… 20대에는 외부의 자극에 반응해 내부에서 불타오르는 무언가가 존재했어요. 세상은 바뀌는 것이라 믿었고 어느 정도는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고 믿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사회적인 이슈에 관해 무척이나 열정적이었어요. 격동의 시절은 이미 지나가 버려 민주주의의 가치는 당연한 것이 되었고 혁명은 낡고 촌스러운 것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살기 좋은 사회였던 건 아니었어요. 특히 20대가 시작되던 때엔 구세대의 흔적이 짙었어요. 아물지 않은 아픔(아직 5.18이 폭동이라 불리고 있었고)과 제도적 폭력(여전히 빨갱이라는 말이 누군가를 처벌하기 위한 낙인으로 작동하던)이 도처에 널려 있었어요. 독재에 맞서다 목숨까지 잃을 뻔했던 이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무언가 변하는가 싶었더니 IMF라는 난리와 함께 신자유주의의 세련된 폭력이 다시 세상을 덮쳤어요. 어쨌거나 20대의 중반까지는 혼란스러운 시기였고 방황의 연속이었지만 길 잃은 발걸음의 진폭만큼 열정이 넘쳤어요.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믿음이 명백한 신념의 형태로 존재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열정이 사라지는 건 한순간이었어요. 물론 믿었던 가치들이 모조리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중요한 것이 빠졌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열정은 구멍 뚫린 풍선처럼 빠르게 쪼그라들어 결국 사라지고 말았어요. 열정에 가득 차 있을 때는 크기와 중요함이 비례한다고 여겼어요. 사회를 한 번에 변화시킬 만한 큰 의제, 자신의 주장을 더 크게 알리기 위한 방법, 세력을 키우기 위한 경쟁 같은 것에 온통 시선이 뺏겨 있었죠. 그러다 어느 순간부턴가 조금씩 느끼게 되었어요. 열정적으로 외쳤던 구호에, 분노로 불끈 쥐었던 주먹에 작은 목소리들이 빠져 있다는 걸요. 크다고 무조건 중요한 게 아니더라고요. 작다고 하찮은 것도 아니고요. 약자보다 더 약자인 채로 소외된 존재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점점 심하게 파괴되어 가는 자연의 목소리, 마치 존재가 지워진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장애인의 목소리 등이 그제서야 들리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에도 목소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요. 오직 큰 이야기만 좇으며 그게 세상을 바꾸는 중요한 일이라 믿었던 게 부끄러워졌어요. 그 부끄러움이 찾아왔을 때 ‘어릴 때’와 천천히 작별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오즈, 젊을 때(아직 어림 – 식빵 잘 못 구움)

 

‘젊을 때’는, 30대 전부와 뒤의 몇 년을 포함해 꽤 길었어요. 괜히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고 함부로 나서지도 않았어요.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어요. 신문의 1면을 장식하는 일들로부터 자연스럽게 멀어졌어요. 정치는 관심이 없을뿐더러 정치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 기대하지도 않았어요. 그렇다고 속세와 단절한 수도승처럼 살았던 건 아니에요. 누가 봐도 사기꾼에 범죄자인 인간이 대통령이 되었을 땐 분노가 치솟았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 과정(광우병 논란)에서 청소년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서는 걸 보고는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어 열심히 거리로 나가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세상이 바뀔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하고 억울해 미칠 것 같지만, 이런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싶었어요. 일상의 작은 것들에서 느끼는 절망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어요.

 

공공장소에서 무례하게 큰 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들이 꼴 보기 싫어졌고, 지하철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리기도 전에 먼저 타려고 밀치며 들어오는 모습에 화가 났고, 버스를 타려고 앞문에 오밀조밀 몰려 있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빈자리를 차지하려 뒷문으로 쪼르륵 달려가는 이들에게 짜증이 났어요. 이게 어쩌면 우리의 진짜 모습일 수도 있는데 정치에 분노한다고, 광장에 나선다고 세상이 과연 바뀔까? 큰 목소리 몇 개가 달라질 순 있겠지만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걸까? 모두가 제 아파트값이 합당하게 오르기를 바라며, 아파트값의 상승에 방해가 된다면 피도 눈물도 없는 마귀로 돌변하는 나라에서 정의와 평등이 존재할 수 있기는 한 걸까? (온전히 개개인의 잘못이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사람들의 탐욕과 무례함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어떻게 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렇다고 완전히 낙담한 건 아니었어요. 사회적 주목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작은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보였고 저도 그런 흐름에 함께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환경, 생태, 인권, 공동체 등에 관한 책을 읽으며 공부했고 여기저기에 후원금도 내기 시작했어요. 그 작은 일들이 언젠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바꾸고 세상도 바꾸게 되리라 막연히 기대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우선은 나 하나라도 제대로, 아니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할 수 있는 게 어쩌면 그것뿐이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덜 부끄러웠을 순 있지만 한편으로 떳떳하지도 못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열정이 빠져나간 자리에 냉소를 그득 채운 채 살았던 건 아닌가 싶어서요. 세상의 변화를 바랐고 몇 가지 작은 일들을 실천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기도 하고요. 이런다고 세상이 바뀌겠어, 라는 말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한 채 말이에요.

 

오즈, 지금(여전히 어림 – 도른 눈빛 강렬해짐)

 

열정에 빠져 큰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 세상이 변하지 않듯이 작은 목소리로 냉소하는 것으로도 세상은 변하지 않아요(당연히요!). 세상이 꼭 변해야 하느냐, 라고 물을 수도 있겠네요. 역시나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하겠어요. 진보와 발전을 말하는 건 아니에요. 소외된 채 고통받는 존재가 있는데도 꿈쩍 않은 채 변하지 않는 세상은 너무 끔찍하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그 소외와 고통이 개인의 의지와 행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게 아니라 구조적 문제 때문이라면 세상을 바꾸는 것 말곤 방법이 없잖아요. 모두가 근심 없고 행복한 세계가 가능하다고는, 지금은 냉소를 멀찍이 밀쳐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아요. 다만 조금이라도 덜 불행했으면, 조금이라도 세상의 고통이 줄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에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당연히 몰라요. 하지만 방향에 대해서는 조금씩 배워가고 있어요.

 

‘어릴 때’는 세상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어요. 세상의 선명한 모습이 소리, 냄새, 감촉과 함께 그대로 전달되었고 제 목소리가 세상 모두에게 가닿을 거라 생각했어요. ‘젊을 때’가 되어서는 높고 두터운 벽 너머에 세상이 있는 것 같았어요. 소리는 들리지만 형상을 볼 수는 없고 냄새가 나지만 만져볼 순 없는 무언가의 세계였죠. 그런데 지금은 뿌옇게 때가 낀 유리창 밖으로 세상을 보는 기분이에요. 유리창도 일종의 벽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세상과 직접 연결될 수는 없지만, 벽만큼 견고하진 않아서 바깥에서 부는 바람에 유리창이 흔들리기도 하고 창틈으로 세상의 냄새가 전해지기도 해요. 선명하진 않아도 세상의 모습을 응시할 수 있기도 하고요. 그 불완전함 속에서 바깥의 존재와 공명하는 걸 배워가는 중이에요. 확신에 가득 찬 마음보다는 다양하게 공명하며 떨리는 마음이 더 끈질긴 것 같아요. 조금 불안해 보여도 쉽게 지치거나 꺾이지 않기에 오래갈 수 있는 거죠. 미동도 없이 고요한 마음보다 상대의 떨림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어쩌면 더 섬세한 눈을 가졌을지 몰라요. 떨림으로 인해 흐릿하기에 그 모습을 더 오래 지켜봐야만 하니까요. ‘젊을 때’와 작별했던 건 그렇게 마음이 떨리기 시작한 순간이었어요.

 

나 불렀냥?

 

혹시 눈치채셨을까요? 작은 목소리, 작은 존재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언급되지 않은 작은 목소리의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요. 동물 그리고 여성이에요. ‘어릴 때’는 물론이고 ‘젊을 때’까지도 제 관심의 바깥에 있었던 셈이에요. 지금에 와서야 조금씩 알고 공감하려고 애쓰고 있어요. 그런데 예전과는 공감의 계기가 달라요. 폭발하는 열정으로 순식간에 대상의 문제에 몰입하거나 이성적인 판단으로 상황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으로부터 미세하게 전해지는 진동을 느끼며 마음속에서 발생한 떨림이 서로 공명하는 방식으로 공감하는 것 같아요. 떨리는 마음은, 앞서 말한 것처럼 불완전하면서 불안한 상태에 놓인 마음이에요. 공감하면서도 그것이 진심인지 확신할 수 없고 위태로운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마음이죠. 그런데 이 불완전하고 불안한 떨림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을 바꾸는 방향이란 어떤 대상과 함께 존재해주는 게 아닌가 싶어요. 열정과 냉소 모두 상대에 대한 성급한 해석의 결과예요. 하나는 마음의 해석이고 하나는 이성의 해석이죠. 그렇게 서두르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이해하려 하기 전에 그 존재의 떨림을 먼저 느껴야 해요.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도 같은 떨림이 생겨나 서로 공명할 수 있어야 해요.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그다음 문제라고 생각해요.

 

(여성에 관해서는 아직 공감이 부족하고 자격도 안 되는 것 같아서 뭔가를 말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글에서는 여태 고양이가 등장하지 않았지만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고양이 얘기 ‘만’ 하는 글이니까요.)

동물이라고 했지만 저에게 제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역시 고양이에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고양이보다는 길고양이가 동그라미 가장 안쪽에 존재하고 있어요. 삼삼이가 제 발로 걸어 들어오며 고양이와 함께 사는 생활이 시작되긴 했지만 길고양이라는 존재의 위태로움에 마음이 떨리기 시작한 건 봉산아랫집으로 이사를 오고 난 뒤였어요. 물론 그전에도 길고양이를 볼 때면 안쓰러움이 있었어요. 하지만 길고양이의 밥을 챙겨주면서도 제대로 먹고 다니는지 걱정을 하고, 늘 보이던 아이가 하루 이틀만 보이지 않아도 마음이 불안하고, 멀쩡히 건강하던 녀석이 어느 날 푸석푸석한 털에 너저분한 얼룩이 잔뜩 묻은 몰골로 나타났을 때 자책으로 며칠씩 괴로워하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길고양이의 여린 생명이 발산하는 떨림이 제게 전해지기 시작한 건 ‘코코’를 만나고 나서부터였어요.

코코는 봉산아랫집에 이사 와서 처음으로 이름을 붙여준, 까만 턱시도 무늬에 자그마한 몸집의 여자아이, 길고양이예요.

 

봉산길냥, 코코

 

To be continued…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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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코의 코스묘스]

시즌 1, 코스묘스의 오묘한 시작

Episode 1. 한낮의 작고 짙은 온기를 닮은 고양이, 오히루

① 반짝이는 삶   |   ② 막연한 기다림   |   ③ 기쁨의 크기

Episode 2. 잃어버린 시간에 관하여, 김삼삼

④ 각자의 자리   |   ⑤ 굴러온 돌   |   ⑥ 잃어버린 시간

Episode 3. 미래에서 온 카오스, 강모카

⑦ 빈 책상   |   ⑧ 혼돈의 카오스   |   ⑨ 오래된 미래

Episode 4. 이치코,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⑩ 화려한 시절   |   ⑪ 보내는 마음   |   ⑫ 이치코의 코스묘스   

Episode 5. 어느 날  갑자기 – 불쑥, 고미노

⑬ 뜻밖의 여정   |   ⑭ 회색의 미궁   |  ⑮ 약자의 마음 (1)   

Episode 6. D의 의지를 잇는 자, 송오즈

⑯ 소리치는 일   |   ⑰ 총체적 난국   |   ⑱ 엔드게임 and..

시즌 2,

길어질 게 뻔한 변명(1)   |   길어질 게 뻔한 변명(2)   |   길어질게 뻔한 변명(3) 

원래 그런 게 어딨나요? 

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1)   |   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2) 

고양이의 버킷리스트 

떨림이 멈추지 않는 세계에서(1)   |   떨림이 멈추지 않는 세계에서(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