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투 하나 바꿨을 뿐인데>라는 책이 있어요. 읽어보진 않았지만, 책 소개를 보니 40가지 심리 기술을 활용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투의 심리학’에 관한 책이라고 해요. 사람의 관계에서 말투는 중요하죠.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는 식상한 속담이 의미하는 바도 말의 ‘내용’에 따라 천 냥 빚이 변제될 수 있다는 건 아닐 거예요. 천 냥이 현대의 화폐 단위로 얼마일지 알 수는 없으나 제법 큰 돈이 분명할 텐데요, 그걸 한 방에 털어낼 정도라면 그저 좋은 말로는 어림도 없을 거예요. 아무리 좋은 말이더라도 그 의미와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려면 말하는 이의 말투와 태도가 함께 좋아야겠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정도로 훌륭한 말투와 태도라면 천 냥 빚이 아니라 만 냥 빚이라도 충분히 갚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가 말로 의사소통을 할 때는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있는 것 같아요. 말의 내용, 말투, 태도. 이 세 가지 요소 중 하나라도 방향이 어긋나면 커뮤니케이션이 허공을 맴돌거나 잘못된 길로 빠져들기 십상이에요. 예컨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상황이라면 아무리 적절한 말투와 풍부한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한다고 해도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거예요(화장실이 급해요, 같은 신호는 빼고요).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상황에 맞는 적절한 말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해도, 전화로 의사소통을 할 때는 서로의 말이 전달하려는 뉘앙스를 완전하게 포착하기 힘든 상황이 발생하곤 하죠.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건, 말과 말투가 서로 밀접히 연관된 반면 태도는 언어의 메커니즘에서 비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소통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Photo by Volodymyr Hryshchenko on Unsplash

 

최근 TV에서 수어 통역이 등장하는 화면을 자주 보셨을 거예요. 코로나19 관련해서 매일 질병관리본부의 브리핑이 생중계되고 있는데 발표자 옆에 수어를 통역하시는 분이 항상 함께 있어요. 그런데 어느 신문의 칼럼(<한겨레> ‘왜냐면’, 2020. 3.11.)*을 보니까 사람들이 수어통역사에게 왜 마스크를 쓰지 않느냐, 표정을 왜 그리 사납게 짓느냐, 라는 말을 한다고 해요. 그런데 수어통역사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통역을 하는 데는 사정이 있어요. 수어는 손의 모양이나 움직임뿐만 아니라 얼굴 표정까지 활용하는 언어이고 실제 의사소통에 기여하는 비중을 따지자면 손짓은 30~40%에 불과하고 나머지 60~70%는 표정이나 몸의 방향 등 다른 요소가 좌우하기 때문이래요. 같은 동작이라도 표정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고 하니 마스크를 쓴 채 수어를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죠.

 

의사소통에서 표정이나 몸짓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게 꼭 수어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에요.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구어에서도 비언어적 요소가 의사소통에 기여하는 비중이 높은 편이에요. 메라비언의 법칙이라고 알려진 이론에 따르면 상대방에 대한 인상이나 호감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몸짓이나 표정 같은 시각 정보가 55%, 목소리나 억양 같은 청각 정보가 38%의 역할을 하고 말의 내용 자체는 7%밖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해요. 굳이 사회학 이론에 의존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이 경험적으로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일 거예요. 이를테면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라거나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 같은 속담들에서 표정이나 태도가 커뮤니케이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말하고 있으니까요.

 

이러한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수없이 겪어서 익숙한 것이에요. 목소리의 톤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상태인지 우울한 상태인지 곧바로 알 수 있음은 물론이고 말하는 자세나 시선의 방향만으로도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건성으로 하는 말인지 대개는 구별할 수 있곤 해요. 말하는 내용에 상관없이 말이에요.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사이일수록 더 직관적으로 알 수 있죠. 어떤 말을 무시해도 되는지 어떤 말을 흘려들으면 안 되는지를 결정하는 건 말의 내용이 아닌 경우가 훨씬 많아요. 누군가 다른 사람의 집에 방문했을 때, ‘이제 그만 가 볼게요.’, ‘아뇨, 조금 더 있다 가세요.’라고 하는 두 마디 대화의 내용만으론 손님이 정말 가려고 하는지, 집주인이 진짜로 방문자가 조금 더 머물다 가길 원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저 대화는 ‘좀 더 있다 가도 될까요?’, ‘아뇨, 이제 그만 가세요.’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말하는 이의 표정, 목소리, 몸짓을 빼고 남은 언어는 의사소통에 사용할 수 없는 죽은 언어일지도 몰라요.

 

Photo by Pavan Trikutam on Unsplash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이 그렇다면 사람과 동물의 커뮤니케이션은 어떨까요? 서로의 종이 다르니 언어적 기준은 물론 비언어적 기준도 소용이 없는 관계에서 어떻게 의사를 소통해야 할까요? 고양이를 예를 들면요, 음.. 고양이는 커뮤니케이션 대상이 아니네요. 인간이 일방적으로 해석을 해야만 하는 단방향 관계니까요. 고양이가 송신탑이라면 사람은 단지 신호를 수신하고 해독하는 단말기에 불과할 뿐이에요. 고양이는 수신 장치가 없어요. 우리가 아무리 말과 표정과 몸짓으로 신호를 보내도 절대 가닿지 못하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양이가 보내는 신호를 최대한 정확하게 해석해서 그들의 심기가 불편하지 않도록 잘 보살피는 일뿐이에요. 약간 억울할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어요. 고양이란 원래 그런 존재니까요.

 

아무튼 고양이의 일방적 송신 행위를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치면, 거기에도 의사소통을 위한 규칙이 있기는 해요. 사람과 고양이 모두 같은 종과 의사소통을 할 때 사용하는 방법 중 일부가 사라져 버리는 거예요. 사람은 표정으로부터 읽어내는 정보를 거의 포기해야 해요. 고양이라고 표정이 없는 건 아니고 유심히 관찰하면 사람이 알아챌 수도 있지만, 그건 의사소통이 아니라 분석 작업에 가까우므로 일상적인 정보라고 보긴 어려우니까요. 고양이 입장에서는 후각에 정보를 전달하는 신호(페로몬)가 무용지물이 되는 게 안타까울 거예요. 사람이 구분할 수 있는 후각 정보란 게 똥 냄새와 오줌 냄새를 구분하는 정도라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요. 그러면 남는 건 소리와 몸짓뿐이에요. 고양이의 울음소리와 고양이의 몸짓.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람은 수신기.

 

Winter: Cat on a Cushion, Théophile-Alexandre Pierre Steinlen [출처]

 

그래도 동물이 행동하는 패턴을 읽을 수 있다는 건 다행한 일이에요. 그들이 원하는 걸 해석할 수 있게 해주니까요. (개나 고양이의 경우라면) 귀의 각도, 꼬리의 움직임, 머리의 방향, 발의 위치, 반복된 행동의 리듬 등으로 지금 어떤 상태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짐작하고 이해할 수 있어요. 거의 언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다양한 의사소통이 가능해요. 물론 사람끼리의 관계에 비하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있어요. 꼬리가 어느 정도의 높이에 있는지, 꼬리의 끝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귀가 어느 방향으로 쫑긋한지, 발을 어떻게 모으고 있는지, 고개를 어디로 돌리고 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보아야 할뿐더러 동물의 종에 따라 같은 행동이라도 다른 뜻을 의미할 수도 있으니까요.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과 마찬가지로 동물과의 의사소통에서도 개인화된 습관들이 언어의 역할을 수행하곤 해요. 사실 이것 때문에 의사소통의 범위가 훨씬 넓어지는 효과가 있어요. 반려동물이 있는 집이라면 으레 오랫동안 함께 생활한 반려인만 알 수 있는 신호들이 존재해요. 예컨대 집의 특정한 장소에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초롱초롱한 눈을 깜빡이고 있는 개를 보았을 때, 그 광경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정확한 의미를 알기가 힘들 거예요. 하지만 반려인이라면 단번에 알 수 있죠. 산책하러 나가자는 말인지, 밥이나 간식을 달라는 말인지, 장난감을 꺼내 달라는 말인지 이해할 수 있는 건 개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특정한 장소’에서 반복된 습관 때문이니까요. 저희 치코도 지극히 개인적인 습관이 하나 있는데요, 책상에 올라가 네 귀퉁이 중 하나에 떡하니 버티고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박치기를 하고 싶다는 뜻이에요. 궁디팡팡은 절대 아니에요. 치코는 그것보단 박치기하는 걸 백 배쯤 더 좋아하니까요. 치코랑 오래 지내보아야만 알 수 있는 치코의 언어예요. 그리고 꼭 제가 박치기의 대상이 되어야 해요. 다른 사람은 가 봤자 아무 소용이 없더라고요.

 

동물의 몸짓과 행동이 의사소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분명하지만 실제로 반려동물과 생활하다 보면 소리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고양이와 함께 살기 전까지만 해도 저 역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그저 ‘야옹’이라고 알았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런데 길에서 가끔 만나는 고양이라도 울음소리를 들어보면 실제로는 여러 종류가 있잖아요. 그때는 다양한 ‘야옹’이 있는 줄 알았어요. 배 고픈 야옹, 화가 난 야옹, 기분이 좋은 야옹, 졸린 야옹…. 아이들과 함께 살기 시작한 뒤에야 제대로 알게 되었어요.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야옹’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요. 야옹, 니야옹, 니이잉, 이야옹, 이잉, 양, 냥, 먕, 미옹, 미이웅, 미양, 미잉, 냐아앙, 끼이잉, 꾸으응… 못해도 수백 가지는 될 거예요. 그것들 모두가 각각의 의미가 있더라고요. 심심하다, 졸리다, 덥다, 춥다, 화장실 치워라, 밥 내놔라, 저리 가라, 이리 와라 등등 갈수록 알아듣는 단어의 수가 많아지고 있어요.

 

집에서 그렇게 많은 울음소리를 듣고 또 의미를 알아들으며 지내고 있지만 평소에는 결코 들을 수 없는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있어요. 그건 무척이나 낯선 소리예요. 하지만 그냥 지나쳐버릴 수는 없는 소리예요. 처음 듣는다고 해도 어떤 의미인지 곧바로 알 수 있는 소리거든요. 아깽이들이 엄마와 떨어졌을 때 내는 울음소리는 고양이와 함께 살지 않는 사람이라도 금세 알 수 있어요. ‘근처에 아기 고양이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드는 소리가 들린다면 그건 분명 아깽이가 엄마와 떨어져 있는 상황이에요. 보통은 엄마가 먹이를 구하러 잠시 자리를 비운 새를 참지 못하고 울어 대곤 하지만, 가끔은 정말로 혼자가 되어버려서 애타게 우는 경우도 있어요. 그건 위기 상황이에요. 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혼자 돌아다니다 길을 잃었거나(미노처럼요..), 엄마가 아이를 버리고 갔다는 뜻이니까요(아이의 건강 상황이 좋지 않을 때, 다른 아이들이라도 제대로 보살피기 위해 그러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해요).

 

Photo by Urtnasan Tuvshinzaya on Unsplash

 

2018년 10월 25일, 늦은 밤이었어요. 그날은 술자리가 있었고 적당한 취기로 일과를 마친 무거운 발걸음에 겨우 리듬을 실어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었어요. 버스에서 내려 대로변의 상가 건물을 끼고 돌아 동네의 골목길로 들어섰을 때였어요. 어디선가 아깽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어요. 낯선, 하지만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소리. 주변을 한참 두리번거리다 겨우 방향을 찾았어요. 길에서 한참 떨어진 곳의 공터 주차장에서 나는 소리였어요. 조금 기다리며 상황을 지켜볼까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어요. 울음소리에 묻어 있는 절박함이 너무 크게 느껴졌어요. 곧바로 소리 나는 곳으로 가서 휴대폰 플래시를 비춰 보니 주차된 차 아래에 손바닥만 한 아이가 애처롭게 울고 있었어요. 엄마한테서 떨어져 혼자된 지 오래돼 보였어요. 앞뒤로 양말만 신은** 치즈 태비였는데 양말이 아주 새까맣게 얼룩져 있었어요. 언뜻 보기에도 삐쩍 말랐고 허피스 때문에 코가 짓물러 있는 데다 한쪽 눈은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있었어요. 와중에 배는 아주 동그랗게 볼록했어요(이게 어떤 사태를 불러올지 그때는 몰랐지만요).

 

고민할 여지가 없었어요. 당장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엄마에게 버려진 게 분명해 보였으니까요. 아니 주변에 엄마가 있다고 해도 구조를 해야만 했어요. 엄마의 젖과 그루밍과 보살핌만으로 허피스가 낫지는 않으니까요. 몇백 그램에 불과한 아이가 코가 짓무르고 눈을 뜨지 못할 만큼의 허피스를 스스로 극복하고 생존할 가능성은 없을 테니까요. 차 밑으로 몸을 집어넣고 팔을 뻗어 아이를 붙잡았어요. 울다가 지쳐서인지,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별다른 반항 없이 순순히 붙잡혔어요. 조심스럽게 꺼내서 품에 안았어요. 눈대중으로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웠어요. 피부밑에 딱 붙은 뼈의 굴곡이 그대로 만져졌어요. 그래도 다행히 기력이 있었고 체온은 따뜻했어요. 아이와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고 안도의 한숨이 나왔어요. 한편으론 고맙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에요. 그날 오즈가 혼자서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곤 사력을 다해 소리치는 일뿐이었을 거예요. 오즈의 목소리는 정말 강했어요. 누구라도 가던 걸음을 멈추고 소리 나는 곳을 찾아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는 소리였어요. 오즈가 힘껏 소리쳐 준 게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런 일인지 몰라요. 이미 가을의 쌀살한 밤기운이 내려앉은 터였고 바로 다음날 비가 많이 내렸어요. 오즈가 그 상태에서 하루를 보내고 비를 맞았더라면 큰일날 뻔했으니까 말이에요.

 

응? 도른.. 뭐?

 

저와 오즈의 첫 대화는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소리로 시작되었어요. 소리치는 일이 전부였던 오즈와는 이제 훨씬 많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오직 오즈만의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게 되었고요. “꾸르릉”, “꾸우웅”. 도른자의 소리 말이에요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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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링크 :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932143.html

**고양이의 무늬를 설명하는 용어에 익숙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 설명해 드리자면, 고양이가 ‘양말을 신었다’는 건 몸의 다른 곳은 색깔이 있는 털로 덮여 있는데 발의 끝부분만 흰색이라 마치 흰 양말을 신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에요. 흰색 부위가 아주 작을 경우엔 ‘발목 양말’, ‘발가락 양말’을 신었다고 말하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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