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루와 모아 이야기 보기]

 

히루가 아깽이 티를 어느 정도 벗었을 때, 태어난 공방에 데려간 적이 있었어요. 히루의 엄마 모아가 아직 그곳에 있을 때였어요. 엄마라는 걸 알까? 모아는 히루를 기억할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히루를 안고 모아에게 인사를 시키려 했어요. 그랬더니, 히루가 모아를 보고 어찌나 격렬하게 하악질을 해대는지.. 모아 역시 히루를 알아보지 못한 채 시큰둥했고요. 아, 둘 다 기억을 못 하는구나.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니 안쓰러웠어요. 그래도 모유 수유까지 다 마치며 생후 8주 가까이 함께 살았던 서로를 조금은 기억해줘도 좋을 텐데.

 

시월이를 다시 데려오게 되었을 때, 혹시 봉산아랫집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는 전혀 없었어요. 100% 다 까먹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말이 쉽지, 오묘가 사는 공간에 350g의 아깽이가 들어오는 거랑 5kg이 훌쩍 넘는 캣초딩이 들어오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어요. 해결해야 할 관계가 최소 5개(오묘 각각 vs 시월)인데 시월이의 등장으로 인해 기존 오묘들끼리의 관계마저 어떻게 흔들릴지 몰랐기 때문에 봉산아랫집은 혼란의 도가니탕이 되기 직전이었어요. 육묘가 되고 나서야 고양이의 합사에 관해 처음 고민하게 되었어요. 히루부터 오즈까지, 무려 다섯 번이나 집에 고양이가 있는 상황에서 새 식구를 맞았지만, 그때 새로 들어온 아이들은 모두 몇백 그램짜리 아깽이였기 때문에 합사에 큰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었어요(삼삼이-치코처럼 나중에 원한 관계로 발전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매번 큰 사건 없이 (삼삼이가 늘 짜증을 내기는 했지만) 자연스럽게 식구과 되었어요. 미노는 오히려 (땅콩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나서서 엄마 역할을 하기도 했어요. 돌이켜보면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죠. 고양이들은 희한하게 아기 생명체에게 관대한 것 같아요. 봉산아랫집의 경우를 봐도 그렇고 SNS에 돌아다니는 영상에 등장하는 사람 아기를 대하는 고양이들을 봐도 그렇고요.

 

볼품없던 350g 시월이

 

하지만 시월이는 다른 문제였어요. 비록 묘생 7개월 차였지만 입장과 동시에 육묘 중 3위에 해당하는 몸무게를 자랑할 만큼 우람해져 있었으니까요. 삼삼이는 예상대로였어요. 다가오면 짜증을 내지만 대체적으로 무관심. 치코도 그냥 치코다웠고요. 무슨 일이 생겼는지 파악도 못 하고 그저 멀뚱멀뚱. 그런데 모카와 미노의 대응은 좀 의외였어요. 모카는 시월이한테뿐만 아니라 애꿎은 다른 아이들한테도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어요. 모카가 치코, 미노, 오즈와 친밀하게 지내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어요. 치코가 장난(이지만 공격에 가까운)치려고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데면데면 지내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시월이가 오고 나서는 시월이뿐만 아니라 치코, 미노, 오즈한테까지 살벌하게 성질을 내기 시작했어요. 심지어 저 멀리 있는 치코나 오즈한테 굳이 찾아가서 하악질을 해대질 않나,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하악, 하악, 하악 모카의 짜증으로 가득 찬 봉산아랫집이 되어버렸어요. 그 와중에 삼삼이한테는 단 한 번의 짜증도 내지 않는 게 신기하기도 했지만요.

 

미노는 봉산아랫집의 베이비 시터다운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시월이를 임보할 때도 그런 기미를 보여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왔을 때도 응석을 잘 안 받아주더라고요. 오즈나 토리(효선), 차장이(봉석)는 그렇게나 엄마처럼 살뜰하게 돌보더니 웬일인지 시월이는 지나가는 옆집 개똥이 보듯이 대했어요. 시월이가 꼬리를 붙잡고 깨물거리거나 하면 그루밍을 해주는 게 아니라 슬쩍 몸을 빼 자리를 피했어요. 때론 시월이한테 하악거리기도 했고요. 그 친절하던 미노의 모습은 사라지고 마치 치코처럼 변하고 말았어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하지만 미노도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할 수는 있는 법이니까요.

 

오즈한텐 이랬으면서…

 

시월이를 임보 중이었을 때 미노의 빈자리를 메꾼 건 의외로 오즈였어요. 평생 막내일 것만 같은 우리 도르니. 물론 미노처럼 의젓하게 시월이를 케어한 건 아니었어요. 아깽이 시월이의 (비록 점프는 잘 못 했지만) 넘치는 에너지를 오즈 특유의 도른자 모드로 받아주는 쪽에 가까웠죠. 둘이서 얼마나 투닥거리며 집안을 휘젓고 다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어요. 살갑진 않았어도 어쨌거나 오즈와 시월이는 대체적으로 잘 어울려 놀았어요. 그런데 오즈도 임보가 아니라 새 식구를 맞는 건 처음이라 그랬을까요? 시월이가 다시 왔을 땐 완전히 돌변해 있었어요. 시월이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마치 삼삼이가 치코 대하듯 했어요. 시월이가 근처에 오려고만 해도 질겁을 하곤 했어요. 덩치에서 밀리니 힘으로 시월이를 누를 수는 없고, 그저 내려치지도 못할 앞발을 치켜든 채 하악질만 해댔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시월이는 무조건 직진이었고요.

 

시월이 입장에서는 오즈가 제일 만만했던 것 같아요. 미노랑 치코는 덩치부터가 수컷이어서 왠지 함부로 뎀비면 안 될 것 같고, 삼삼이랑 모카는 딱 봐도 까칠하고 성질 더럽게 생겼으니 말이에요. 시월이의 임보 시절 발동되었던 도른자 모드가 마치 타노스한테 한 방 맞고 쪼그라든 헐크처럼 깊은 곳에 봉인된 채 오즈는 시월이를 피해 도망 다니기 바빴어요. 둘이 그러고 있는 걸 보면 뭐랄까, 얘들아 그렇게까지 할 일이니,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오즈는 막내를 벗어나는 통과의례를 혹독하게 겪어야만 했어요.(지금은 한결 나아지긴 했지만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어요.)

 

못된 송오즈

 

봉산아랫집으로 돌아왔을 때 시월이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 ‘환대’였지만 애석하게도 봉산아랫집 오묘는 충분히 환대해주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시월이가 좌절하고 힘겨워했다는 건 아니에요. 시월이에겐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밥(!)이 있었으니까요. 시월이는 맛난 밥을 먹으면서 환대 없는 곳에서 우정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어요. 아무리 하악거려도 물러서지 않고 들이받으며, 언니들 자고 있을 때 슬쩍 옆에 가서 궁뎅이를 걸치며,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무리 밥이 좋아도 언니오빠들의 밥그릇은 절대 탐하지 않는 불굴의 자제력을 발휘하면서 말이에요.

 

* * *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는 ‘사회적 성원권’에 관해 서술하고 있는, 작가 소개 글에 따르면 “학술 논문에도 대중적인 에세이에도 속하지 않는” 책이에요.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는 제목을 단 프롤로그에서 책이 말하려는 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어요. “이 책은 […] 다시 말해 ‘사람’의 문제를 다룬다.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오고, 사람이 되는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받아들여진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이 된 것인가? […] 조건부의 환대 역시 환대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환대가 언제라도 철회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하게 환대되지 않은 게 아닐까? 이것이 이 책이 제기하는 질문들이다.”

 

언제라도 철회될 수 있는 환대라는 말에, 시월이가 떠올랐어요. 임보를 마치고 입양 갔던 곳에서 시월이가 받은 환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입양이 결정되었을 때, 시월이를 직접 데려가서 낯선-그렇지만 집이 될-곳에 두고 돌아서 나올 때, 시월이를 맞아준 건 분명히 환대였을 거예요. 제가 본 것도 그랬고요. 아무 데나 입양을 보내지는 않겠다는 조심성이 있었기에 고심을 많이 한 결정이었어요. 그래서 그 환대가 철회될 거라곤 생각조차 못 했어요. 화가 치밀어 올랐고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의 크기만큼 자책했고, 차라리 이럴 거면 보내지 말걸, 봉산아랫집은 오묘에서 육묘가 되었어요. 육묘라니..

 

시월아, 미안해..

 

물론 <사람, 장소, 환대>에서 말하는 환대를 사람과 고양이 사이에 적용할 수는 없을 거예요. 책에서는 환대가 “우정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우정의 개념부터가 상호 대등한 관계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니까요. “우정은 연애처럼 안전한 정박지를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우정은 맹세의 말이나 서약의 징표, 의례와 기념일, 증인과 보증인, 시작과 끝을 공식화하는 서류들을 알지 못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만의 관계로 머문다(반면 결혼은 하나의 계약으로, 모든 계약이 그렇듯이 그 효력을 보증하는 제삼자를 포함한다). 우정을 지탱하는 것은 당사자들의 기억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정을 순수한 시간으로 환원할 수 있다. 이는 우정이 그만큼 많은 결별의 계기들을 품고 있다는 말도 된다.” 맹세나 징표, 서류가 아니라 둘만의 관계로만 머물고 순수한 시간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사람과 고양이 사이에도 우정이 가능할 것 같지만, 당사자들의 기억보다 현재의 교감으로 지탱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결별할 수 없는(결별 대신 버림만 존재하는) 관계니까요.

 

책에서 말하는 절대적 환대 역시 마찬가지예요. “절대적 환대라는 말로써 나는 데리다가 그랬던 것처럼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적의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환대를 가리키려고 한다.” “데리다는 이 어려움을 강조하면서, 절대적 환대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 타자가 당신에게서 가정이나 지배력을 빼앗는다 해도,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만, 그것이 무조건적인 환대의 조건이다. […]’ 순수한 환대가 그런 것이라면, 과연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데리다의 오류는 환대를 사적 개인이 다른 사적 개인에게 자신의 사적 공간을 개방하거나 개방하지 않는 문제와 결부시킨다는 점이고 […]” 그러니까 <사람, 장소, 환대>에서 말하는 절대적 환대란 개인이 사적 공간에서 낯선 존재를 환대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공동체적 차원에서 타자에게 성원권을 부여/유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라고 볼 수 있어요. 이렇듯 사람에게 성원권을 부여하는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머리를 싸매고 있는 우리들 사회/공동체에 고양이에 대한 성원권 문제를 요구하는 건 언감생심일 거예요.

 

절대적 환대!

 

만약 <고양이, 장소, 환대>라는 책이 있다면 거기에 등장하는 환대는 <사람, 장소, 환대>에서 말하는 절대적 환대보다는 데리다가 말한 개념에 더 가까울 거예요. 우리들 개인이 자신의 사적 공간을 고양이에게 개방하거나 개방하지 않는 문제, 그 고양이가 우리의 가정이나 지배력을 빼앗는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문제, 거기에 덧붙여 영원히 결별할 수 없는 관계가 형성되는 문제까지. 이 환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단호하고 과격하며 불공정한 것이라 일단 환대하고 나면 우리는 모든 결정권을 잃게 될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양이를 환대할 것인가? 넵! 해야죠. 당연히. 안 한다는 선택지 없음. 그리고 <고양이, 장소, 환대>라는 책에는 이 내용이 꼭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고양이에 대한 환대를 철회하는 인간들이 나중에 어떤 벌을 받게 되는지 말이에요. 이탈리아 사람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하와이안 피자를 강제로 먹게 하는 것만큼 끔찍한, 불교의 팔열지옥과 팔한지옥에서 겪을 법한 고통에 관해 자세하고 섬뜩하게 묘사되어 있기를.

 

비록 봉산아랫집 오묘가 시월이에게 우정과 환대의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그건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짜증내고 피해다니고 뚜까패고(ㅠ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니오빠들의 존재 자체가, 인간은 결코 줄 수 없는 커다랗고 절대적인 환대였다는 걸 시월이도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삼삼이, 모카, 치코, 미노, 오즈도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거예요.
시월아, 환대해!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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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코의 코스묘스]

시즌 1, 코스묘스의 오묘한 시작

Episode 1. 한낮의 작고 짙은 온기를 닮은 고양이, 오히루

① 반짝이는 삶   |   ② 막연한 기다림   |   ③ 기쁨의 크기

Episode 2. 잃어버린 시간에 관하여, 김삼삼

④ 각자의 자리   |   ⑤ 굴러온 돌   |   ⑥ 잃어버린 시간

Episode 3. 미래에서 온 카오스, 강모카

⑦ 빈 책상   |   ⑧ 혼돈의 카오스   |   ⑨ 오래된 미래

Episode 4. 이치코,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⑩ 화려한 시절   |   ⑪ 보내는 마음   |   ⑫ 이치코의 코스묘스   

Episode 5. 어느 날  갑자기 – 불쑥, 고미노

⑬ 뜻밖의 여정   |   ⑭ 회색의 미궁   |  ⑮ 약자의 마음 (1)   

Episode 6. D의 의지를 잇는 자, 송오즈

⑯ 소리치는 일   |   ⑰ 총체적 난국   |   ⑱ 엔드게임 and..

시즌 2,

길어질 게 뻔한 변명(1)   |   길어질 게 뻔한 변명(2)   |   길어질게 뻔한 변명(3) 

원래 그런 게 어딨나요? 

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1)   |   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2) 

고양이의 버킷리스트 

떨림이 멈추지 않는 세계에서(1)   |   떨림이 멈추지 않는 세계에서(2) 

시즌 1, Again

• Episode 7. 고양이, 장소, 환대, 시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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