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임무: 고양이 여섯을 데리고 이사하기 ①편 보기

 

페로몬pheromone은 같은 종의 동물끼리 특정한 사회적 반응을 유발하기 위해 배설하는 화학 물질을 말합니다. 동물, 특히 개미를 비롯한 곤충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잘 알려져 있죠. 인간은 페로몬을 감지할 수 없는데, 페로몬을 수용하는 후각기관인 야콥슨 기관이 퇴화되어 흔적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고양이나 개 같은 동물은 이 기관을 사용해 페로몬을 감지하는데 코에 있는 게 아니라 입천장에서 비강으로 이어지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합니다. 입안에 존재하는 후각기관이기 때문에 동물들이 이 기관을 활성화시켜 페로몬(또는 페로몬과 유사한 냄새)을 감지하려고 할 때 평소와 다른 독특한 표정을 짓게 됩니다. 많이들 알고 계신 표정일 거예요. 특히 고양이는요. 고양이를 반려하는 사람에게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익숙한 장면일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집사의 발냄새를 맡고 충격받은 고양이! 라는 짤로, 잊을 만하면 SNS에 피드에 한 번씩 등장하는 단골 밈이니까요. 입을 반쯤 벌리고 윗입술을 들어 올려 페로몬을 감지하는 이 동작을 플레멘 반응이라고 하는데, 고양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포유류 동물들에게서 볼 수 있는 행동입니다.

 

페로몬을 의사소통 수단이라고 했지만 인간 기준의 의사소통과는 조금 다릅니다. 사람들이 소통이라고 할 때는 보통 메시지를 서로 주고받는 걸 의미하니까요. 페로몬은 의사 ‘전달’ 수단입니다. 어느 한 개체가 발산한 페로몬은 그걸 수용하는 다른 개체의 특정한 행동/반응을 유발할 뿐이니까요. 고양의 경우에는 얼굴 쪽에서 분비되는 페로몬(F1~F5)과 수유기 어미의 유선에서 분비되는 페로몬(달래기Feline appeasing pheromone), 소변에 포함된 MMB([3-Mercapto-3-methylbutan-1-ol]이라는 냄새 물질) 등이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F2 페로몬은 짝짓기, F3는 영역 표시, F4는 친근감 표시, 달래기 페로몬은 모성 유대감과 새끼 고양이의 안정감 형성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소변에 포함된 MMB는 특이하게 쥐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쥐는 (당연히!) 고양이 소변 냄새를 엄청 싫어하지만 ‘톡소플라즈마 곤디Toxoplasma gondii’라는 기생충에 감염되었을 경우에는 이 냄새에 호감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고양이 페로몬 관련 내용은 모두 영문 위키 ‘Cat pheromone’ 항목 참고)

 

그런데 웬만큼 검색을 해 봐도 고양이가 스트레스 상황에서 페로몬을 분비한다는 자료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상하다, 분명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상황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닌데… 다묘의 집사라면 이 페로몬의 정체를 모를 수가 없는데…. 과학적으로 밝혀진 건 아니지만 일단 있다고 치겠습니다. 이름도 붙여야죠. 이동장 페로몬Carrier pheromone, 고양이를 이동장에 넣을 때 발산되는 페로몬으로 다른 고양이들의 혼비백산, 숨기 행동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들 아시잖아요. 병원에 데려가려고 한 아이를 이동장에 넣을라치면 다른 아이들까지 흥분해서 이불 속으로 소파 밑으로 냉장고 위로 난리를 치며 숨는 모습을요. 그날, 저희 육묘가 이사 가는 날 봉산아랫집도 이동장 페로몬으로 가득했습니다.

 

오즈야…

 

이동장 페로몬의 가장 적극적인 발신자는 오즈였고 최고의 수용자는 모카였습니다. 긴장 상태에 돌입한 모카에게 약한 수준의 진정제는 아무 효과도 없었습니다. 평소보다 더 날카로운 시선으로 경계 중인 모카를 붙잡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안 되겠다. 일단 진정시키자. 시간을 더 두고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먼저 이동장에 넣어두었던 오즈의 상태가 이상했습니다. 과호흡이 왔나 싶을 정도로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모카를 상대하느라 이동장에 오래 있는 바람에 스트레스가 심했나 봅니다. 그렇다고 밖으로 꺼내면 이 카오스가 더 혼돈에 빠져들 것 같아 급하게 택시를 불러 오즈 먼저 사무실로 옮겼습니다. 오즈야, 혼자라서 새로운 공간이 더 당황스럽겠지만 조금만 참아라. 모카 언니 얼른 데려올게.

 

집으로 돌아와 다시 모카 붙잡기에 집중합니다. 오즈가 없어졌다고 해도 집은 여전히 혼란에 빠진 상태입니다. 시월이와 미노도 한참 전에 이동장에 들어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시월이는 갑갑함을 견디지 못해 계속 이동장을 발로 차고 머리로 밀어대며 격렬하게 꿈틀거리고 있었고 미노는 목청을 최대한 높여 쉴 새 없이 울어대고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층간소음으로 경찰을 불러도 할 말 없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모카는 붙잡아야죠. 시끄럽게 울어대는 미노를 다른 방에 넣고 문을 닫아놓아서인지 모카가 덩달아 흥분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경계 모드이긴 해도 옆에 가서 쓰다듬을 수 있을 정도로는 진정이 된 것 같았습니다. 모카도 지칠 때가 되긴 했죠. 오즈를 이동장에 넣은 시점부터 벌써 두 시간 넘게 지났으니까요. 이불을 통째로 덮어서 잡아보자. 작전을 세우고 살며시 다가가 이불과 함께 온몸을 날려 모카를 덮칩니다. 여기까진 성공. 이제 이불을 돌돌돌돌 잘 말아서 모카를 싸맨 다음에 옮기면 되는데… 어느 틈으론가 모카의 머리가 삐죽 나옵니다. 어? 방금까지 이쪽엔 엉덩이가 있었는데 왜 머리가? 급하게 자세를 바꿔 다시 붙잡을 새도 없이 모카는 후다닥 이불 밖으로 탈출합니다. 아, 앞으로 한 시간은 손도 못 대겠네. 망했다.

 

미노야, 화장실에서 왜…

 

마냥 시간을 보낼 순 없어 이미 이동장에 들어 있던 미노와 시월이를 먼저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뽀나스 치코까지 셋을 지인의 차에 태워서 사무실로 옮겼습니다. 1박을 해야 하므로 고양이들만 옮긴다고 될 일은 아니었습니다. 다시 차를 돌려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챙겼습니다. 화장실 大자 2개 中자 1개, 화장실에 있던 모래 대략 40~50kg(20리터짜리 폐기물마대자루로 3개), 평소 즐겨 사용하던 박스+방석 4세트, 사료 4종(치코와 미노의 방광염 처방식, 삼삼이의 소화불량 처방식, 주사료, 보조사료), 장난감 약간, 아이들 체취가 묻어 있는 담요와 이불 약간.. 차를 가득 채워 가져온 냥필품을 사무실에 부렸습니다. 그동안 고양이 접근금지 청정구역으로 유지해 온 사무실이 순식간에 고양이 집단 서식지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 넷이나 이곳에 와 있는데. 오즈와 시월이는 각자 최고의 구석을 찾아 숨는 바람에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치코와 미노는 화장실 모래 위에 납작 엎드려 미동도 없습니다. 유월 말이라 이미 여름은 시작되었고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아이고 힘들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집과 사무실을 세 번 왕복하며 고양이 넷을 사무실로 옮겼으면, 한숨 돌릴 만도 하지만 그럴 새가 없습니다. 최종 보스 모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다시 집으로 향합니다. 그나마 집과 사무실이 가까워서 다행이지… 하면서요.

 

고양이 이사 시작으로부터 네 시간 정도 지났습니다. 아직 둘이 남았네요. 동생들이 속속 사라지는 상황에 어리둥절할(어쩌면 귀찮은 녀석들이 없어졌다고 좋아했을 수도 있지만..) 모카에게 다시 시간을 줍니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요? 작전은 아까와 동일했습니다. 이불로 덮어 어떻게든 꽁꽁 싸맨다. 조금 진정되어 보이는 모카 옆으로 가서 다시 이불을 휙 덮으며 몸을 던집니다. 몸으로 누른 상태에서 이불을 말기만 하면 되는데, 아차, 아까처럼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모카의 머리가 삐죽 튀어나옵니다. 큰일이다. 급한 마음에 이불 밖으로 노출된 모카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습니다. 휙휙- 촥촥- 울버린 등장. 피로 선명한 발톱 자국을 남기고 모카는 또 이불 밖으로 탈출합니다. 아, 모카야.. 쫌!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로 시간을 보냅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멍한 정신을 추슬러 시계를 보니 자정이 다 되어갑니다. 지금 몇 시간째지.. 마지막으로 힘을 내 이불을 불끈 쥡니다. 모카야, 이판사판이다. 제발 가자!

 

모카야…

 

그렇게 여섯 시간 가까이 씨름한 끝에 가까스로 모카를 붙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동장에 넣어 (모카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남아 있던) 삼삼이와 함께 사무실로 옮기고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쉽니다. 휴, 힘들다. 그다음 날 이사는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을 제대로 못 자 비몽사몽인 채로 이사를 마쳤습니다. 고양이 여섯 옮기는 거에 비하면 사람 짐 (이사트럭 용량 기준) 6톤 옮기는 거야 식은 죽 먹기였지요.(포장이사라 제가 한 건 없지만요..)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이사가 끝났습니다,로 마무리되면 참 좋을 텐데 아직 고양이 여섯 옮기기가 한 번 더 남았습니다. 세상에…

 

1박을 예정했던 육묘의 사무실 생활은 4박 5일 동안 이어졌습니다. 화장실 모래부터 방석, 담요, 이불, 장난감 등을 최대한 챙겨 와서 F3, F4 페로몬으로 안정을 주려고 했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육묘 모두 너무 긴장하고 움츠러들어 있어서 하루 만에 또 옮길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자기가 집안의 대장이라고 생각하는 삼삼이와 치코는 이틀째부터 조금씩 사무실에 적응한 모습을 보였지만 나머지 쫄보 넷은 사흘을 지나 나흘째가 되어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5일째 되는 날 저녁에 사무실을 나와 새집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모카를 또 붙잡아야 하는데 어떻게 되었냐구요? 천운이라고 부를 만한 도움을 받았습니다. 1차 시도에서 울버린이 또 등장해서 피칠갑 사태를 겪긴 했지만, 숨어서 꼼짝도 안 하던 선반 공간의 아래쪽에 캐리어를 받쳐놓고 슬금슬금 모카를 밀었더니 버둥거리는 듯하다가 쏙 들어가더라고요. 아니, 이렇게 쉽게?? 선반수납장의 구조적 도움이 아니었다면 4박 5일이 아니라 14박 15일이 되었을 수도 있는 일인데.. 땡큐 IKEA.

 

역시 집이 최고지!

 

이번에 육묘를 데리고 이사하면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습니다. 고양이가 우리 생각보다 페로몬에 민감하다는 것! 인간의 후각세포 수가 200~1,000만 개인 데 비해 개는 8,000만~2억 2,000만 개, 고양이는 6,000만~7,000만 개에 달할 정도로 후각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이미 과학적으로 알려진 사실입니다만, 수치로 드러나는 코의 후각 기능과 별개로 페로몬이 정서적/육체적 균형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사무실에서 사나흘이 지나도록 경계+혼란 상태를 유지하며 꼼짝도 안 하던 아이들이 새로 옮긴 집에서는 하루 정도 만에 모두 경계+탐색 모드로 전환하면서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사할 때, 사용하던 가구와 물건을 거의 다 가져왔고 3,000여 권이 넘는 책도 그대로 옮겨왔는데 그게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평소 책장에 테이블과 의자 다리에 서랍장 모서리에, 또한 책장을 오르내리고 넘나들며 책에다가도 얼마나 얼굴을 부벼댔는지를 생각하면, 곳곳에 스며들었던 페로몬이 새집의 낯선 냄새를 누르고 아이들의 심리적 안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도 아마 책의 역할이 꽤나 컸을 것 같습니다. 30권도 아니고 300권도 아니고 3,000권이면 그 부피만 해도..!

 

고양이와의 이사 덕분에 책의 새로운 역할을 발견했습니다.

 

책의 효능 : 나무(펄프)를 원료로 만들어진 책은 그 재료의 특성으로 인해 고양이 페로몬을 수용하는 데 탁월한 성능을 가졌다. 다량의 책을 보유할 경우 고양이의 정서적 안정에 큰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이 효능은 독서로는 절대 얻을 수 없습니다. 물리적 존재로서의 책이 있어야만 합니다. 고양이 반려인 여러분, 지금은 아니지만 언제 반려인이 될지 모르는 여러분, 그러니까 우리 모두 책을 많이 삽시다!!

고양이 여섯을 데리고 이사하기, 행복하게 마무리 :)

 

삼삼이는 사무실 또 오고 싶으면 얘기해.

 

 

*개 코 못지않은 고양이 후각…페르몬 감지 기관도 있다[경향신문]

**이 자리를 빌려 여섯 고양이의 이사를 걱정하고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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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코의 코스묘스]

시즌 1, 코스묘스의 오묘한 시작

Episode 1. 한낮의 작고 짙은 온기를 닮은 고양이, 오히루

① 반짝이는 삶   |   ② 막연한 기다림   |   ③ 기쁨의 크기

Episode 2. 잃어버린 시간에 관하여, 김삼삼

④ 각자의 자리   |   ⑤ 굴러온 돌   |   ⑥ 잃어버린 시간

Episode 3. 미래에서 온 카오스, 강모카

⑦ 빈 책상   |   ⑧ 혼돈의 카오스   |   ⑨ 오래된 미래

Episode 4. 이치코,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⑩ 화려한 시절   |   ⑪ 보내는 마음   |   ⑫ 이치코의 코스묘스   

Episode 5. 어느 날  갑자기 – 불쑥, 고미노

⑬ 뜻밖의 여정   |   ⑭ 회색의 미궁   |  ⑮ 약자의 마음 (1)   

Episode 6. D의 의지를 잇는 자, 송오즈

⑯ 소리치는 일   |   ⑰ 총체적 난국   |   ⑱ 엔드게임 and..

시즌 2,

길어질 게 뻔한 변명(1)   |   길어질 게 뻔한 변명(2)   |   길어질게 뻔한 변명(3) 

원래 그런 게 어딨나요? 

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1)   |   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2) 

고양이의 버킷리스트 

떨림이 멈추지 않는 세계에서(1)   |   떨림이 멈추지 않는 세계에서(2) 

시즌 1, Again

• Episode 7. 고양이, 장소, 환대, 시월이

⑲ 1, 2, 3, 4, 5, 6, 북적북적   |   ⑳ 혁명의 선봉   |   ㉑ 앙시앵 레짐    |   ㉒ 우정과 환대      

시즌 2, Again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고양이에게 배운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 고양이 책 #1 총, 균, 쇠 다정한 반복 치코의 일기 선물 같은 시간 마지막 겨울길고양이 돌봄 지침(가이드라인)  •  특별 임무: 고양이 여섯을 데리고 이사하기 ①  •  특별임무: 고양이 여섯을 데리고 이사하기 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