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걸 보라’고 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다. 가리키고, 빛을 밝히는 것. 하지만 우리의 주목을 요하는 건 이미 밝게 빛나며 손짓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목격하기 위해, 감성—존 버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는 법’—을 발전시킨다. 나긋나긋한 희망과 꿈, 기쁨, 취약함, 슬픔, 두려움, 갈망, 욕망을—인간은 저마다 하나의 풍경이다. … ‘저걸 봐.’ 인간의 위기를, 누적된 평범한 축복을, 혹은 견딜 수 없는 상실을. 그리고 여전한 한 줄기 햇살을, 빨래하는 여자를, 도살된 소를. 우리를 붙드는 삶을. 우리가 아는 삶을.

—대니 샤피로 <계속 쓰기>

 

 

“버섯 소녀는 이끼 숲에 살아”

 

이달 출간 예정인 김선진 작가의 그림책 [버섯 소녀]의 작은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전에는 큰 심상 없이 읽은 한 문장이 각별하게 다가왔어요.
버섯 소녀가 태어나고 살고 또 떠난 곳을 새삼 그려보게 됐습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전시 오픈 날에 비단이끼, 서리이끼, 꼬리이끼, 깃털이끼, 털깃털이끼, 나무이끼를 심고 있지 뭐예요. 다녀가신 분들은 이끼 숲(?)의 버섯 소녀를 보셨을지도 모르겠어요.

 

이끼와 버섯이 이다지도 친한 건 무슨 연유일까요. 꽃도 씨앗도 없는 이끼는 잎과 줄기의 구분이 모호하고 관다발도 없어서 물기가 많은 축축하고 그늘진 곳, 바위 틈, 고목에서 자라는 1에서 10센티미터 사이의 작고 부드러운 식물입니다. 버섯은 식물도 동물도 아닌 균류지요. 다양한 생태가 있지만 대개 생물의 사체에서 양분을 얻어 사는 ‘부생腐生’ (때로는 기생) 생활을 하기 때문에 이끼처럼 역시 고목이나 부엽토, 그늘진 곳에서 자란다고 해요. 국어사전과 위키백과를 짜깁기한 이 서술을 김선진 작가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생을 다한 숲의 곤충들은 고목 아래에서 날갯짓을 멈추고 쉬었어

소녀는 그 오래된 나무 곁에서 태어났어

 

한 번의 밤은 고목의 나뭇잎을 덮고

두 번의 밤엔 고목 아래 곤충들이 썩은 날개를 내어주었지

 

아름답다는 말을 아니할 수 없겠죠. 무루 작가는 EBS 팟캐스트 <무루의 이로운 그림책>에서 [버섯 소녀]에 대해 “무척 기묘한 판타지인 동시에 매우 과학적인 이야기”라고 소개하기도 했어요. “이야기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무척 중요한 방식일” 거라고 말이죠.

 

 

폭우가 쏟아진 다음 날, 산책길에서 어제는 보지 못했던 동그랗고 하얀 버섯을 만났습니다. 반나절의 햇볕은 뜨거웠고 돌아오는 길에 그 버섯은 사라지고 없었어요.

 

[버섯 소녀]의 에필로그에는 이야기의 시작점이 적혀 있어요. 나타났다 사라진 버섯. 무엇에 홀린 걸까, 그게 아니라면 버섯은 어디로 갔을까. 그것을 이해해보려, 찰나의 만남과 신비에 골똘한 작가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의 초기 드로잉과 더미북을 거쳐 지금의 책에 이르기까지 작업 과정을 살펴보면, 처음엔 환각버섯을 먹은 양 어둠으로 가득했던 이야기가 어떤 특이점을 거쳐 지금의 말갛고 투명한 세계로 변모해요. 첫 구상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은 작가 자신으로 보여요. 안갯속에 빠져 있던 ‘나’가 타자인 ‘버섯들’로부터 자기를 따먹으라는 시끄러운 호소를 듣고 그 버섯들을 취하면서 자아가 분열 혹은 복제됩니다. 나는 다른 ‘나들’에게 떠밀려 어디론가 떨어지고 땅에 박혀 버섯이 되어버려요. 그리고 또 나른 ‘나’가 버섯이 된 ‘나’ 앞에 나타납니다.(전시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세상에 나오게 된 이야기는 ‘버섯 소녀’가 주인공이에요.(물론 버섯 소녀도 작가의 페르소나일 수 있겠죠.) 버섯 소녀의 태어남과 사라짐을, 그사이의 여정을, 관찰자처럼 찬찬히 또 담담히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버섯 소녀가 저녁 노을을 바라보는 것을 함께 보고, 먼 곳에서 온 새로부터 듣는 것을 함께 듣고, 꽃밭이 끝없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을 함께 바라면서요.

전복이라 할 만한 크나큰 변화에 대해 작가께 물었더니, 초기 구상의 더미북을 만들고 원화 작업에서 첫 그림을 완성하자마자 장르의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답하셨어요. 그 그림 속에서 버섯 소녀들(애초에는 ‘나와 나들’)은 마치 유니콘 같은 말 위에 앉아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나의 다른 자아들과 화해하지 못한 채 불편한 동승을 하고 있던(끝내 추락으로 이어지는) 호러의 장면이, 사라진 줄만 알았던 버섯 소녀가 친구들과 함께 나타나 아름다운 세계로 떠나는 판타지의 장면으로 맥락을 달리한 것이에요. 이 과정에는 어떤 신비가 작동한 것일까요.(다음 편에, 아마도…)

 

어느 날 내 앞에 나타났다 사라진 버섯을 두고서 이야기는 나에서 버섯으로, 분열된 자아에 대한 탄식에서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한 송가로, 불화의 발화에서 관찰의 이해로, ‘먼저 가 있어’에서 ‘먼저 가서 기다릴게’로, 안개에서 이끼로, 부생腐生에서 부생復生(다시 삶)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이전의 것을 모두 버린 것은 아니에요. 맥락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였지만, 초기 작업의 많은 장면들이 지금의 책에도 남아 이야기를 겹겹으로 두껍게 만들어줍니다. 버섯 소녀를 감싸준 ‘고목의 나뭇잎’처럼, 죽은 ‘곤충의 날개’처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있게 한 이끼처럼. 그야말로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네요.

그러니 사라진다는 것은 어쩌면 일종의 변신일까요.

 

 

다시 무루 작가의 말을 이어서 들어봐요.

“어차피 다 사라져버릴 텐데 무슨 소용일까, 라는 생각 혹은 태도의 가장 먼 곳에 사라진 것들이 먼저 가서 존재하는 세계가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장소를 상상하는 일은 끝내 흘러가버린 것들이 실은 전부임을 아는 것이기도 하겠죠. 가만히 들여다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거나 기록하고 이야기로 만드는 일이 새삼 무척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야기로 만드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사라진 것들의 세계로 먼저 가서 기다리는 사람인가 싶어집니다. 우리에게도 어서 오라고, 이 세계를 보자고.
그 곁으로 가서 사라짐을 지금 봐요. 사라진 것들이 먼저 가서 존재하는 세계를 목격해요. 사라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만히 느끼고 생각하고 함께 이야기해요. 유년을, 떠나버린 사랑하는 존재들을, 신비를, 구름을, 사랑을, 모험하는 마음을, 어젯밤의 나를, 지난달의 우리를, 내일 사라질지도 모를 종들을, 별들을, 춤을,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을, 멀고도 가까운 곳으로부터의 이야기들을,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것들을.

 

덧.

저는 이끼를 볼게요. 그 속에서 버섯 소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요.

 

 

[부록] 그리고 버섯과 이끼의 문장들

‘잔나비걸상’은 담자균류 민주름버섯목 불로초과의 버섯 이름이다. 텔레비전에서 이 버섯을 처음 보던 날,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어쩜 저렇게 이름부터 모양까지 희한한 버섯이 있담. 게다가 불로초라니! 세상엔 많고 많은 생명체가 있다지만 특히나 버섯은 너무나도 신비로운 존재 같다. 사실은 ‘균’의 일종이라는 것, 이따금 독을 품고 있다는 것, 죽은 나무에서도 잘 자란다는 것도 모두 다 신비의 세목들이다. …

잔나비는 원숭이이고 걸상은 의자를 뜻하는 말이니까 ‘원숭이가 잠시 앉았다 갈 만한 의자’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일까? 하기는 생긴 게 의자처럼 판판하기는 하다. 버섯 도감에서도 이 버섯의 형태를 반원, 낮은 산, 발굽에 묘사하는 걸 보면. … 체계가 있든 없든 설명이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름은 그 자신의 비밀을 품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

잔나비걸상은 자신의 이름이 잔나비걸상이라는 것에 만족할까. 이해할까. 아무려나 잔나비걸상은 나에게 하나의 상징으로 남을 것 같다. 그 기원을 상상할수록 더더욱 신비로워지는 미지로서.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더욱더 놀라워지는 이름 그 자체로서.

—안희연 <단어의 집> ‘잔나비걸상’ 중에서

 

초키가 환각버섯 다섯 개를 가져왔다. 첫 번째는 사슴뿔같이 생긴 붉은색 버섯이었다. 두 번째는 악마의 손톱 세 개가 붙어 있었다. 세 번째는 흰색 버섯 모양으로 윤기가 흘렀다. 네 번째는 침대 밑에 뭉쳐 있는 먼지덩어리에 검은색 후추를 친 것 같았다. 다섯 번째는 검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들을 프라이팬에 올렸다. 트러플 기름을 붓고 센 불로 볶기 시작했다. 다섯 번째 버섯이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고 사슴뿔은 검게 변했다. 나머지는 기름에 젖어 먹음직스러웠다. 우리는 어제 배달시킨 카레에 버섯을 올려서 먹었다. … 지금은 일단 쉬고 이 버섯이 끝나면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 초키가 소파에 완전히 뻗어서 점점 소파 밑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그가 소파 밑으로 스며들 때마다 그를 건져 올렸다. 나중에는 놔두었다가 바닥에 흐른 그를 걸레로 몇 번 닦았다. … 우체부는 모자를 눌러쓰며 인사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편지를 뜯었다. 사랑하는 아빠에게, 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초키에게 돌아가는 대신 방으로 들어갔다. 창문 밖으로 새들이 줄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고민형 <엄청난 속도로 사랑하는> ‘초키의 연료’ 중에서

 

베란다에 조금씩 식물이 들어차게 된 것은,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받아온 방울토마토 모종을 심으면서부터였다. … 빨갛게 토마토가 익어갈 때 아이는 햇빛처럼 밝게 산란하는 목소리로 엄마, 이거 봐 우리 따먹을 수 있겠다 이거 내가 가져온 거지? 방울방울 웃었다.

애플 민트는 문지르면 사과 냄새가 난단다. 엄마 이거 봐 예쁘지, 여기 꽃에 묻어 있는 건 꿀 같은데 찍어 먹어볼까? 이끼가 구름 같아, 예쁘니까 파가지고 가 기르자, 엄마. …

기르는 일은, 돌아보고, 대답하고, 얼마나 컸는지 커서 휘청거리지는 않는지 날마다 알아보고, 더운지 아픈지 무서운지 차가운지 감지하는 일이다. 그럴 때 어떤 마음이 되는지, 자기도 잘 모르겠는 마음을 꺼내어 말할 수 있도록, 시간과 눈길을 천천히 쏟으며 기다려야 하는 일이다.

—<어린이의 마음으로>, 하재연, ‘이끼가 구름 같아, 엄마’ 중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엄마의 구식 재봉틀이 의식 위로 떠오른 건 방송에 소개된 어느 핀란드인 가족을 통해서였다. 핀란드 북부 발티모 숲에서 십수 년째 자급자족 중인 가족의 보금자리는 눈으로 덮인 깊은 침엽수림 한가운데 놓여 있다. 라세 씨와 마리아 씨, 이들의 두 자녀로 구성된 가족은 손에서 시작해 손으로 끝나는 생활을 영위한다. … 휴지 대신 질 좋은 이끼를 사용해 뒷일을 처리하는 화장실 사용법은 시청률을 겨냥한 하이라이트 장면처럼 등장하지만 어디까지나 관찰자의 시선일 뿐 다섯 살 유스투스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낡았지만 깨끗하게 관리된 세간살이와 선반장의 말린 버섯들, 몸에 잘 맞게끔 늘어진 스웨터, 찬 공기를 덥히는 난롯불.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나는 내내 심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자급자족 라이프에 대해서라면 더 이상의 환상도 로망도 없는 데다 결정적으로 나는 스스로가 영 미덥지 못하다. …

그러자 지금껏 수백 수천 번 같은 질문을 받아왔다는 듯 화면 속 라세 씨가 입을 연다.

“양말부터 꿰매보세요.”

—송은정 <비건 베이킹> ‘양말부터 꿰매보세요’ 중에서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이끼가 되고 싶어. 밑거름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 정선에서 사람들 장례 치르고 이장을 많이 했어.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가. 너그럽게 산 사람들이 죽어서도 미소 짓고 있어. …

죽는 건 흙으로 돌아가는 거야. 꽃이 되니까 헛산 건 아니야. 열매도 되고 나무도 되니까. 기뻐, 기뻐, 항상 기뻐.”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혹은 너무 멀거나 너무 가까워서 사람을 보지 못한다. 세상이 축소해서 못 보고 지나치는 사람도 많다. … 나는 이런 사람을 크게 그리고 싶었다. 모두가 쳐다보는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라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지 사유를 자극하는 사람들. 누구나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가는 일 자체로 모두의 해방에 기여하는 사람들.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들.

—은유 <크게 그린 사람>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 김용현’과 ‘책 머리에’ 중에서

 

 

며칠 전 송해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어요. 대체자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상징적인 인물이라 뉴스와 방송, SNS에까지 추모의 마음과 목소리가 넘치며 마치 온 나라의 이목이 쏠린 듯했어요. ‘전국노래자랑’을 34년간 진행하셨다고 하니 일요일마다 방송을 보며 웃고 즐겼던 분들이라면 그 상실감이 무척 컸을 것 같아요. 저는 지난 34년 동안 TV를 거의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아끼는 음악 프로그램의 사회자가 돌아가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요. 할아버지의 명복을 빌며 평온히 안식하시기를 바랍니다.

 

글을 쓰면서 누군가의 이름 뒤에 ‘씨’나 ‘선생(님)’이나 직함이 아닌 다른 호칭을 붙이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평소라면 송해 선생님이라고 했겠지만 오늘은 할아버지란 말이 좀 필요해서 송해 할아버지라고 불러보았어요. 어느 때부턴가 누군가를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부를 일이 사라졌어요. 관습적인 호칭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없진 않지만 실제 나이 차이를 따져 보면 아무래도 아주머니, 아저씨에 가까운 때가 훨씬 많죠. 인간의 기대 수명이 아무리 늘어났다고 해도 그걸로 상쇄하기에는 제 나이가 이미, 조선시대 같았으면 할아버지..가 된 상황이다 보니까요. 송해 할아버지는 올해 95세로 1927년생이셨다고 해요.

 

저희 할머니는 1918년에 태어나셨어요. 한국 현대사의 굴국을 온몸으로 겪으셨고 20세기의 마지막 해에 돌아가셨어요. 벌써 20년도 더 되었네요. 그래서인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많이 희미해졌어요. 여섯 살에 부모님과 함께 도시로 나온 이후로는 1년에 서너 번 명절이나 방학 때나 얼굴을 뵈었던 터라 가족공동체로서의 에피소드나 기억 같은 게 거의 없기도 하고요. 그런데 얼마 전에 할머니에 관한 어떤 장면이 갑자기 떠오른 적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그때까진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어요.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전화라는 물건과 결코 친숙해지지 못하셨어요. 흐릿한 기억이긴 하지만 분명 그랬던 것 같아요.

 

할머니가 혼인과 함께 시집살이를 시작한 뒤 평생을 사셨던 곳은 시골이었어요. 지금도 여전히 시골인 동네고요. 하지만 완전히 깡촌이거나 두메산골은 아니었어요. 불과 1.5km 남짓한 거리에 근방에서는 제일 번화한 축에 속하는 읍내가 있었고, 전기나 도로 등의 문물도 (다른 지방에 비하면) 비교적 이른 시기에 보급된 (경상도의) 무난한 촌락이었어요. 전화만 해도, 시골이니까 아무래도 도시에 비해 늦게 보급되긴 했겠지만 80년대 중후반을 지나며 결국은 집마다 한 대씩 있는 물건이 되었던 것 같아요.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십수 년 이상 전화를 사용하셨던 셈이고요. 그런데도 할머니는 전화라는 기계를 끝내 어색하게 대하셨어요.

 

할머니에게 전화는 용건을 전달하는 수단이었어요. 하지만 그걸 응용해 누군가와 (용건 없이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며 때론 함께 슬퍼하고 침묵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는 못하셨던 것 같아요. 할머니는 언제나 무언가에 쫓기듯 상대방의 용건을 확인하고 딱 필요한 만큼의 말을 마친 뒤, 상대가 더 할 말이 있거나 궁금한 것이 남았거나 하는 정황은 상관하지 않은 채 다급히 수화기를 내려놓으시곤 했어요. 마치 그걸 오래 붙들고 있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말이에요. 할머니는 왜 그렇게 전화를 어색해하셨을까요? 기계에다 대고 말을 하는 게 익숙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가난한 살림에 전화요금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고, 그렇게 말을 나눌 만한 상대방이 없었을 수도 있고.. 직접 여쭤본 적이 없으니 영원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네요. 할머니와 전화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며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혹시 나도 나중에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서 새로운 문명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내 불화를 겪으며 거부하게 될까? 그렇다면 그 대상은 무엇이 될까? 글쎄요.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이미 유튜브라는 신문명과 심각하게 불화하고 있지만 말이에요..)

 

[계속 읽기]

 

 

🍄 [버섯 소녀] 알라딘 독자 북펀드 ~6.16(목)

 

🍄 북펀드 인증/응원 이벤트

인스타그램 피드나 스토리 통해서 북펀드 참여를 인증해주세요. 오후의 소묘 계정(@sewmew)을 꼭 태그주세요. 5분께 [버섯 소녀] 아트 포스터(40X30)를 보내드립니다. 많은 참여 기다려요.

• 기간: ~ 6월 15일(수) | 발표: 6월 17일(금)

 

🍄 [버섯 소녀] 작은 전시 X 오후의 소묘 오픈 스튜디오 성원 속에서 무사히 마쳤습니다. 사슴책방 합정점에서 6월 22일부터 전시 이어갈 예정입니다. 추후 인스타그램 통해서 안내할게요.

전시 후기 감사합니다. 아래 세 분께는 [버섯 소녀] 아트 포스터 작가 사인본을 보내드릴게요 :)

“… 스산한 기운 속 피어나는 버섯은 어둠이 어둠으로만 끝나지 않음을, 어둠에 숨겨진 생동을 깨닫게 한다. 작가님의 색과 결이 목마른 계절에 솨아 쏟아진 소나기 같았다. 한모금 내린 소나기로 오늘은 우리동네 버섯 소녀들도 오랜만에 나들이 나오겠네.”@anasdrawer

 

“따뜻함이 가득했던 전시. …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부터 작가님의 스케치, 그림 등 귀여운 버섯 소녀 오브제까지! 폭우가 쏟아진 날 버섯 소녀를 만나고 온 것 같다.” @hyojeong_designer

 

“… 모든 그림에는 처음이 있다는 것, 자기만의 두려움을 맞닿고 앞으로 나가는 것. 이 이야기의 버섯 소녀도 그렇다. 초기의 더미부터 독립 출판, 가제본을 이어서 최종 출판물을 보며 더욱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증폭되는 과정이 감동. 이 사이에 얼마나 많은 누움과 일어남이 있을지 아주 조금 상상이 갔다.” @kasaharamay

 

🏆 오후의 소묘 3주년 기념 백일장 당선자 분들께 상장과 상품을 전했습니다.(장려상 상품인 신간 그림책은 차차 전할게요.) 수상자 분들 모두 축하드리고 또 감사합니다 :)

 

 

🍄 [버섯 소녀] 출간기념 전시

  • 장소: 사슴책방 합정점 (마포구 토정로3길 16, 카페그레이랩 뒤편 / 아크갤러리 옆공간)
  • 일정: 6.22. ~ 7.22. (수~일 2:00~7:00, 변동 있을 시 사슴책방 인스타그램으로 공지)
  • 전시 풍경
    – https://www.instagram.com/p/CfF8dCLJr8e/
    – https://www.instagram.com/p/CfQxrCAPONH/

 

🍄 [버섯 소녀] 출간

[책 소개 보러 가기]

 

  • 리뷰로 만나보세요.

   – “작은 발을 흔들며” 걸어온 버섯 소녀. …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보다 더 커다랗게 닿는다. 작지만 커다란 존재들이 매일 더 많이 피어나길. —moya

   –  홀린 사람처럼 마지막 장에서 첫 장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동안 책장 사이에서 나뭇잎과 곤충들의 썩은 날개와 호수 바닥의 노래와 구르는 빗방울을 살피는 가만한 눈길을 보았다. 발목이 젖는 것도 모르고 수풀 속을 거닐며 몸을 숙여 무언가를 발견하는 사람의 그림자를 보았다. … 나는 아직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는 이곳에서, 사라진 것들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기억하는 다정한 사람들을 좇아 나의 여정을 시작할게. —littlestitches__

   – 아련아련하고 독특한 색감과 이미지가 아름다운 오후의 소묘 신작 그림책. … 시간이 흐르고 나면 지금 이곳의 이야기도 그렇게 멀고 아름답게 사라져가겠지. 사라지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마음을 남긴 채로.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것들을 위한 시를 쓰듯 하루를 살고 싶다. —hipiele_books

 

🐻🍋 지금 오후의 소묘는 파니 뒤카세 그림책 작업 중 [곰들의 정원] & [레몬 타르트와 홍차와 별들]

  • https://www.instagram.com/p/CfG2nnxJdKg/

 

 

“고양이의 시간은 밀도가 높고 속도가 빠릅니다.”

고양이와 동거생활을 하면서 점점 익숙해져 잊고 있었네요, 제 가슴속에도 비수를 꽂았습니다. 그저 건강하길..

— Summer.

 

적당한 거리를 두되 꾸밈 없이 사랑하며 기대를 바라지 않는 자세. 결국은 인간으로부터의 상실감에서 좀 더 편해지라는 가르침을 주는 고양이는 작지만 큰 존재임에는 틀림없는 거 같아요.

오랜만의 늦은 글 보며 위로 되는 오후 되겠어요 ^^ 감사합니다.

— Flyingmimi._.i

 

백일장 우수작으로 띄워 보낸 <우리의 현재는 지극히 괜찮다는 걸>에 대한 감상을 두 분이 보내주셨어요. 글 써주신 정혜 님께도 선물과 위로가 될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올 때 됐는데, 하며 기다리게 되는 소묘 레터ㅎㅎ 추앙—해요🤍

 

이름 밝혀주시진 않았지만 감사의 마음 전해요. 기쁘게 웃었어요 🤍

 

내 얘기 하듯, 부담 없이 읽어 내려지니 좋네요.

—gen_cloud

 

앞으로도 우리의 작은 이야기들 찬찬히 전할게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유월의 편지에 깊은 위로를 받았어요. “어서 오라고, 이 세계를 보자고” 손짓하는 소묘 곁에 웅크리고 앉아 같은 것을 보려 애쓰는 동안 얼굴을 덮고 있던 두터운 안개가 조금 걷힌 것 같아요. 아껴두었던 인사를 전합니다. 고마워요.

—준

 

유월의 준일까요 :) 얼굴을 덮고 있던 두터운 안개가 푸른빛을 띠고 머리 양옆으로 날개를 단 모습 상상해봅니다. 답장을 읽는 동안 제가 꼭 그랬어요.

 

 

6월의 편지,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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