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얘길 나누다가 오후의 소묘에 관해 설명해야 할 일이 있었어요. 어떤 책을 만들고 있는지, 지금까지 몇 권이 출간되었는지, 책이 어느 정도 팔리는지 등에 대한 간단한 얘기였어요. 친구가 책에, 특히나 그림책엔 별 관심이 없어서 자세하게 설명할 만한 건 없었어요. 그저 대화의 중간에 안부처럼 몇 마디가 오갔을 뿐이고 ‘올해는 에세이 책들도 내보려고 해.’라며 얘기를 마칠 참이었죠. 그런데 친구가 갑자기 ‘에세이’란 단어에 반응을 하더군요. “에세이? 그거 자기 자랑할라고 쓰는 거 아닌가?” 그러게요. 자기 자랑이 맞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많은 에세이들이 자기 자랑삼아 쓴(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기도 하고, 그런 의도로 쓰지 않았다고 해도 글쓴이의 개인 이야기가 솔직하게 담길 수밖에 없는 장르의 특성상 누군가에게는 영락없는 자랑으로 읽힐 수도 있는 거니까요.

 

<이치코의 코스묘스>도 에세이예요. 그리고 분야의 전통에 따라 자랑을 하는 글이 맞아요. 심지어 목표가 최대한 자랑을 해보자,이기도 해요. 누구나 그런 순간들이 있잖아요. 내면에서 요동치는 벅찬 희열을 더 이상 억제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아, 남들한테 자랑을 해야겠다!’라고 결심하게 되는 순간들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맛있는 음식을 마주했을 때, 다신 못 볼 것처럼 절규하며 떨어지는 붉은 노을을 보았을 때, 온 세상을 뒤엎을 듯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 출근길에 여유 있게 들른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받아 들었을 때, 망설임 없이 스마트폰을 열어 손가락이 가장 잘 닿는 곳에 자리한, 그라데이션 살짝 먹인 분홍색 그 아이콘을 누르게 되는 것처럼 말이에요. <이치코의 코스묘스>도 그런 환희의 순간을 담고 있어요. 봉산아랫집 오묘와 매일 얼굴을 맞대며 살다 보면 자랑하고 싶은 맘을 주체할 수가 없어요. 고양이가 하나도 둘도 셋도 아니고 다섯이나 되는데! 게다가 자랑 중의 자랑은 고양이 자랑이랬는데! 지금까지 쓴 건 전부 고양이를 자랑하는 글이에요.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자랑을 하든지 말든지…

 

그런데 말이에요.

고양이 이야기를 하려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사람 살아가는 얘기를 해야만 하는 때도 있는데 하필이면 지난번 ‘원래 그런 게 어딨나요?’ 편에서 그랬고 이번에도 연달아 그러게 생겼네요. 결국은 고양이 자랑글이 되겠지만 아무튼 시작은 제 얘기로 출발해 볼게요.

 

사주팔자, 별자리, 혈액형부터 MBTI 테스트까지 어떤 유형을 정해놓고 개인의 특징(혹은 인생)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항상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요. 과학적 근거는 중요치 않죠. (간혹 신앙처럼 받아들이는 경우도 없는 건 아니지만) 절반은 재미로 절반은 들뜬 기대감으로 소비하는 콘텐츠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카테고리로 나뉜 설명을 볼 때마다 제대로 맞는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매번 했어요. 그럴듯한 몇 마디 단어의 조합이나 두루뭉술한 문장들이 어떻게 한 인간을 설명할 수 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런 종류의 콘텐츠를 즐기고 있으며, 심지어 꽤 그럴듯하게 믿기까지 한다는 게 현실이었어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죠.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어요. 자신을 제대로 설명할 언어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싶었어요. 스스로의 내면에서 만들어지고 현실과 부딪치며 다듬어지고 단단해진 자기표현의 언어가 없기 때문에 이미 만들어진 (심지어 어떤 건 조잡하기까지 한) 분류 체계에 쉽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동시에 제가 왜 그런 분류 놀이에 전혀 관심이 없는지도 함께 알게 되었어요.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확고한 언어가 있는 편이었거든요. 저는, 감정이란 센서가 제거된 ‘기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I am a machine!

 

공감 능력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에요.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로로 살아왔으니 사회생활을 못 할 정도는 아니고요. 감정을 느끼거나 표현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즐거울 때 웃고 슬플 때 울고, 상황에 따라 걱정하거나 좌절하며 화내고 분노할 줄 아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타인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순간에는 이상하게 감정이 잘 작동하지 않아요. 감정을 못 느낀다는 게 아니라 감정이란 센서를 통해 정보가 제대로 수집되지 않는 편이에요. 혹은 너무 뒤늦게 수집되거나요. 언어를 통해 표현된 객관적 정보에만 의존해 커뮤니케이션을 하다 보니 딱딱한 태도로 인해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기 일쑤였어요. 그걸 잘 모르고 그냥 살았더랬어요. (주로 상대방에게) 약간의 불편함이 있을지언정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끼게 되었어요. 제가 하는 말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를테면 이런 상황이에요. 업무와 관계된 누군가와 대화하다가, 상대방이 최근에 아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그다음 첫 마디가 (정답이 있는 건 아니겠지만)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보통은 공감의 표현일 거예요. 어머 어떡하니, 아휴 이런.. 같은 반응과 함께 어쩌다 그랬는지, 많이 아팠는지, 지금은 괜찮은지를 물어보며 대화를 이어가겠죠.

 

그런데 전 그게 아니었어요. 제 다음 말은 ‘그렇군요. 그래서 일은요?’였어요. 아마 ‘아이고,’ 혹은 ‘저런..’ 같은 가벼운 추임새 정도가 있었을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의 공감 센서가 발동하지를 않았어요.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방이 아팠다는 사실이 불필요한 정보로 처리되었던 것 같아요. 참 희한한 일이지만 그때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일 얘기를 하는 거니까요.(물론 사적 대화라고 해도 공감 센서가 제대로 작동했을 리 없겠지만요..) 그러다 갑자기 깨닫게 된 거죠. 딴 사람들은 안 그러네? 내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특히 여성들의 대화를 통해 많이 배웠어요. 즐겁고 유쾌한 대화의 대부분은 상대방의 말에 먼저 공감을 표하고 그 공감에서 출발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다음 자신이 하고픈 말은 한참 뒤에 할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정보를 직선적으로 주고받는 대화가, 그것도 커뮤니케이션이고 어쩌면 효율적일 수도 있지만, 참 초라하게 느껴졌어요. 제 대화 방식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어요. 경상도 출신, 장남 등의 성장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그걸론 다 설명이 안 되더라고요. 참 희한한 일이었어요. 혹시 내가 소시오패스?!..는 아닐 테니까(아니겠죠? 아마..) 어쨌거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대체 어떻게?

 

뭔 일 있는가?

 

감정의 센서가 발동하질 않으니 사고 회로를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었어요. 공감을 통해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게 아니라 논리적 생각을 통해 감정적 반응이 결정되는 거죠.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감정이 센서로 작동하질 못하는 것일 뿐 감정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서(아마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요. 다만 조금 복잡했을 뿐이죠. 앞선 예를 보자면, 상대방이 아팠다는 말을 들었을 때, 1-1)우선 공감을 해야 하는 상황인지 판단한다, 1-2)그리고 어떤 공감이 필요한지 결정한다, 그에 따라 2-1)아픔의 감정에 동조하거나 2-2)위로를 하거나 2-3)격려를 하고 3-1)필요할 경우 질문을 통해 상황을 자세하게 알아보고 3-2)비슷한 내 경험을 덧붙이거나 3-3)관계된 요소(제3의 인물이나 사건)를 이야기에 편입해서 대화를 이어가며 4)상대방이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관심을 기울인 채 2과 3의 과정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써놓고 보니 정말 기계 같네요. 누군가에겐 감정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의 과정이겠지만 저에겐 마치 백분토론이라도 되는 것처럼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 하는 복잡한 사고의 과정이었어요. 새로운 도전이긴 했지만 실패할 확률이 없는 시도였기 때문에 부담은 없었어요. 뭘 어떻게 해도 감정 센서가 고장 난 기계적 대화보단 낫지 않겠어요.

 

한참을 그렇게 살다 보니 이제는 익숙해졌어요. 감정의 센서가 남들처럼 작동하게 되었다는 건 아니고요, 공감 프로세스를 실행하는 사고 과정이 제법 매끄러워졌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아요. 여전히 사람을 만나는 일이 어렵긴 해요. 딱딱한 관계일 경우엔 별문제가 없지만, (사무적인 관계라도) 친밀감이 오가야 하는 경우라면 긴장의 끈을 늦출 수가 없으니까요. 어떨 땐, 혹시 남들도 나처럼 이렇게 머리를 굴려서 공감을 표현하며 대화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던 적도 있긴 했지만, 별로 그렇진 않은 것 같았어요. 자연스럽게 공감하며 대화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까, 아니더라고요. 아무튼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며 마치 정상적인 사람(?)인 것처럼 살아가던 와중에, 또 문득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저도 자연스럽게 상대방에게 공감하는 게 가능했어요! 어느 순간, 갑자기,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상대방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감정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가 그냥 느껴지는 거예요. 세상에나. 보통의 사람들은 이렇게 느끼는 거구나, 정말 신기했어요. 그렇게 되니까 상대방과의 거리도 훨씬 가까워지는 것 같았어요. 커뮤니케이션도 더 풍부하고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었어요. 상대방이 고양이일 경우에만 감정의 센서가 작동한다는 것, 사람일 경우에는 여전히 작동불능.

 

센서 가동!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첫째 삼삼이만 있던 시기에 그렇게 되었다는 건 분명해요. 히루가 왔을 때 이미 고양이의 감정에 이상하리만치 잘 공감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왜 고양이한테만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긴 해요. 사람과 고양이는 언어에 기반한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잖아요.(개들은 잘되는 것 같던데..) 서로 소리쳐봤자 소용없다는 걸 아니까 남는 건 몸을 부딪쳐 의사소통을 하거나 내 맘을 알아주길 바라며 쳐다보는 것밖에 없죠. 게다가 고양이 녀석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자고 있으니 제 입장에선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유일한 대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대화가 하고 싶어 아쉬운 쪽 역시 저니까 그저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마냥 기다리면서요. 사람을 대할 때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서로의 주장을 명확하게 확인해야 하고 얼른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고나 할까요. 관계마저 효율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아무 말 없이 몇 시간이고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마치 고양이를 대하듯, 서로의 존재가 있는 듯 없는 듯 편안히 각자 있을 수 있는 관계라면 제대로 된 친구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그런 친구를 만나기가 어디 쉽나요. 대신에 고양이라면 어떤 고양이라도 가능한 일이죠. 얼마나 다행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대화 좀 해!

 

삼삼이나 모카, 치코, 미노, 오즈를 멀뚱하게 쳐다보고 있으면 마치 아이들의 생각이 전해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요. 물론 아무 생각 없음,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기는 해도 간혹, 날씨를 즐기고 있는지, 수상한 소리의 정체를 궁금해하는지, 5분 뒤에 무얼 하고 놀까 고민 중인지, 밥을 먹을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지 등이 보일 때가 있어요. 눈동자의 방향과 미묘한 표정, 수염의 움직임이나 꼬리의 찰랑거림을 통해 알 수 있어요. 가만히 보고 있으면 포착되는 찰나의 순간이 있어요. 무릎에 폴짝 올라오거나 다리를 감싸고 빙그르르 돌거나 엉덩이를 번쩍 들어 쓰다듬어 달라고 하는 등의 스킨십보다 오히려 더 강하게 감정이 전달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고양이의 스킨십도 많은 얘기가 오가는 커뮤니케이션이긴 하지만 그건 얼른 결론을 내리기 위한 토론 같은 느낌이에요. 서로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편안한 대화처럼 여겨지는 건 역시 고양이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일이 아닐까 싶어요. 조용하면서 깊고 부드러운 대화. 그런데 이 느낌을 저만 경험한 건 아닐 거예요. 고양이와 함께하는 이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많이들 이렇게 표현하곤 하는 것 같아요. “사람보다 고양이가 낫지.” 네, 그럼요. 백만 배쯤 말이에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느껴지는 순간

 

 

To be continued…

 

*작년 12월의 편지, ‘길어질 게 뻔한 변명(3)’편에서 입양을 홍보했던 시월이는 임보 90일을 꽉 채운 뒤 1월 14일에 새로운 가족을 만났어요. 너무 좋으신 분이 시월이를 식구로 맞아주셨고, 한 살 많은 오빠도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염려하고 응원해주신 마음에 감사드려요.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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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코의 코스묘스]

시즌 1, 코스묘스의 오묘한 시작

Episode 1. 한낮의 작고 짙은 온기를 닮은 고양이, 오히루

① 반짝이는 삶   |   ② 막연한 기다림   |   ③ 기쁨의 크기

Episode 2. 잃어버린 시간에 관하여, 김삼삼

④ 각자의 자리   |   ⑤ 굴러온 돌   |   ⑥ 잃어버린 시간

Episode 3. 미래에서 온 카오스, 강모카

⑦ 빈 책상   |   ⑧ 혼돈의 카오스   |   ⑨ 오래된 미래

Episode 4. 이치코,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⑩ 화려한 시절   |   ⑪ 보내는 마음   |   ⑫ 이치코의 코스묘스   

Episode 5. 어느 날  갑자기 – 불쑥, 고미노

⑬ 뜻밖의 여정   |   ⑭ 회색의 미궁   |  ⑮ 약자의 마음 (1)   

Episode 6. D의 의지를 잇는 자, 송오즈

⑯ 소리치는 일   |   ⑰ 총체적 난국   |   ⑱ 엔드게임 and..

시즌 2,

길어질 게 뻔한 변명(1)   |   길어질 게 뻔한 변명(2)   |   길어질게 뻔한 변명(3) 

원래 그런 게 어딨나요? 

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1)   |   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2) 

고양이의 버킷리스트 

떨림이 멈추지 않는 세계에서(1)   |   떨림이 멈추지 않는 세계에서(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