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읽었어요. 읽기 전엔 무슨 내용의 책인지 전혀 몰랐어요. 그래도 소설이 아니란 건 알 수 있었어요. 표지에 큼지막하게 ‘르포르타주’라고 적혀 있었으니까요. 조지 오웰의 에세이는 어떨까, 하는 궁금증으로 읽기 시작했어요. 마치 조지 오웰의 소설에 대해서는 제법 아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동물농장>이나 <1984>의 목차도 펼쳐 본 적이 없었어요. 워낙 유명한 작품들이라 읽지 않아도 읽은 것 같은 착각이 들긴 하지만요. (왜 샀는지 기억나진 않고) 책장에서 먼지만 쌓여 가던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긴 했어도 그걸 소설이라고 하기는 또 애매하잖아요. <카탈로니아 찬가>가 카탈루냐 지역과 연관이 깊은 (스페인 내전) 얘기인 것처럼 <위건 부두로 가는 길>도 위건 부두에 관한 얘길 거라 짐작했어요. 위건 부두, 처음 들어 보는 지명이고,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영국에 있겠죠, 아마도요, 얼핏 들으면 여행 에세이 같기도 한데요, 어쨌거나 위건 부두는 대체 언제 나오나 기대를 하면서 끝까지 봤지만 결국 안 나오더라고요. 아참, ‘~로 가는 길’이라고 했지요…

 

가자!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조지 오웰이 영국 북부의 탄광 지역을 취재하고 쓴 글이에요. 그런데 책의 1부만 탄광 지역에 관한 이야기이고 2부는 그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요. 저는 1부보다 2부의 내용이 더 재미있었는데요, 2부의 앞부분 1/3 정도는 조지 오웰의 자서전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자기 삶에 관해 얘기하고 있고 나머지 2/3는 (소설가가 아니라) 사회주의 이론가의 글인가 싶을 정도로 사회주의에 관한 다양한 얘기를 늘어놓고 있어요.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사람 참 열성적인 사회주의자였구나, 라는 생각이 들 만큼요. 하지만 사회주의자와 어울리지 않는 얘기도 종종 등장하곤 해요. 그중에 인상에 남았던 건 냄새와 억양에 관한 얘기였어요. 하층민 특유의 냄새에 관해, 상류층에서만 나타나는 H 발음과 억양에 관해 아주 길게 말하고 있죠. 사회주의자라면 노동자와 자본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로 계급을 구분하는 게 일반적일 거예요. 귀족과 하층 계급의 구분에 관해 얘기하는 건 그다지 사회주의자답지 않은 태도인 것 같기도 한데, 그건 아마 조지 오웰이 영국인이라서 그랬던 게 아닐까 싶어요(성장 환경과도 관계가 있을 테고요).

 

조지 오웰은 자신의 뚜렷한 H 발음과 억양으로 인해 아무리 노동자 무리에 자연스럽게 섞이려고 해도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감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또한 노동자의 삶에 짙게 배어 있는 냄새(악취)는 자신도 참아내기 힘들다고 고백하고 있어요. 조지 오웰이 머리로만 사회주의자인 척하고 마음속으론 기득권의 안락한 삶에 안주하려 했던 이중적인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하층 계급 사이에는 (어쩌면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셈이라서 약간 놀랐어요. 그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었어요. 극단적인 행동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요. 스페인의 파시즘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전쟁터로 향했다가 총을 맞기도 했고, 자발적 선택으로(실제로 가난하기도 했다고는 해요) 부랑자 생활을 경험하기도 했어요. 생의 마지막까지 확고한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이 왜 극복하기 힘든 계급적 차이에 관해 말하고 있는 걸까요? 저는 그게 교감의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지난번 글에서 공감에 관해서 얘기했다면 이번에는 교감에 대한 얘길 해볼까 해요. 조지 오웰로 폼나게 시작했지만 결국은 또 고양이 얘기로 끝나게 될 거예요.

 

교감… 이런 거?

 

공감과 교감은 모두 대상을 필요로 해요. 그런데 대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 다른 것 같아요. 국어사전에서 ‘교감하다’의 뜻을 찾아보면 ‘서로 접촉하여 따라 움직임을 느끼다’라고 되어 있어요. ‘공감하다’는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다’라고 설명하고 있고요. 공감은 대상의 시간적, 공간적 속성에 영향을 받지 않아요. 역사 속 인물이나 가상의 인물에게도 공감할 수 있다는 말이죠. 반면에 교감은 대상이 눈앞에 존재하지 않으면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열악한 탄광 마을의 처지에 분개하며 사회주의에 관해 열변을 토하는 조지 오웰에게 공감할 수는 있을지언정 조지 오웰과 교감할 수는 없어요. 조지 오웰과 접촉할 수도 따라 움직일 수도 없으니까요.

 

국어사전은 ‘남의 감정..’이라며 사람에 대한 행위(동사예요!)인 것처럼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대상이 식물이나 동물 심지어 무생물일 경우에도 공감하기는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 대상과 깊은 관계가 형성되었다면 감정, 의견, 주장 따위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고 봐요. 앞산의 바위가 대상이라고 해도 말이에요. 식물은 바위에 비한다면야 자신을 훨씬 적극적으로(비록 미묘할지라도) 표현하는 대상이니 더 수월하게 공감할 수 있겠죠. 동물은, 어떤 동물이냐에 따라 조금 다를 것 같은데요. 이를테면 개나 고양이처럼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동물이라면 ‘남’의 자리에 곧바로 동물의 이름을 넣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해요.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뿐 실제로 감정을 표현하고 의견과 주장을 명확하게 내세울 줄 알잖아요. 사람하고 다를 게 전혀 없죠.

 

공감이 그렇게 무언가를 (상대방의 입장에서 혹은 상대방과 동일하게) 느끼는 것이라면 교감은 그 느낌이 외부로 뻗어 나가 만들어진 길이라고 생각해요. 이건 접촉이나 움직임이라는 개념만으로는 설명이 안 될 것 같아요. 이를테면 조지 오웰처럼 하층민과 밀접하게 접촉하고 함께 움직였지만 결국 교감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교감이란 서로의 공감이 흐르는 일종의 통로이고 거기에 함께 서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어요. 조지 오웰이 교감에 실패한 원인도 자신이 공감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층 계급이 자신에게 공감한다는 걸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차라리 대상이 바위였다면 일방적인 의인화를 통해 상대가 내 처지를 공감한다고 여길 수도 있었을 거예요. 우리가 느긋하게 숲속을 거닐며 자연과 교감하는 기분을 느낄 때 마치 숲이 나를 안아주고 다독여주고 감싸주는 것 같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요. 숲이 나를 이해하고 나에게 공감하는 듯한 기분 말이에요.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다면 대상이 나무든 돌덩이든 상관없이 교감할 수 있을 거예요. 동물이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겠죠. 그런데요, 어디나 예외란 있잖아요. 우리에게 고양이가 있다는 사실을 깜빡하면 곤란하지요…

 

응? 교, 뭐?

 

‘개발새발’이란 말을 아시죠? 글씨를 삐죽빼죽 들쭉날쭉 엉망으로 써 놓은 상태를 이르는 말이에요. ‘개발새발’이라고 하면 그건 잘못된 표현이고 ‘괴발개발’이 맞는 것이라고 하실지도 모르지만, ‘개발새발’은 무려 ‘짜장면’과 함께 2011년에 표준어로 등재된 나오는 단어예요. ‘괴발개발’이 원래 있던 말이었는데 사람들이 ‘괴’가 무슨 뜻인 줄 잘 모르고 발음하기 쉬운 ‘개발새발’을 더 많이 쓰게 되어 두 낱말이 복수 표준어가 되었다고 해요. 저 역시 어릴 적부터 ‘개발새발’이란 말만 들었고 ‘괴발개발’이란 단어를 들어본 건 얼마 되지 않았어요. ‘괴’가 무슨 뜻인지는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몰랐고요. 그러다 ‘괴’가 고양이(성묘)를 뜻한다는 걸 알았을 때 깜짝 놀랐어요. 소-송아지, 말-망아지, 개-강아지처럼 다 큰 동물과 새끼를 구분하는 규칙이 (인간의 생활 반경에 있는 동물 중에서) 오직 고양이한테서만* 사라지고 새끼를 칭하는 이름만 남았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깨달은 것이었어요. 심지어 닭-병아리도 있는데, 역시 고양이놈들이란!

 

왜 ‘괴’란 단어가 사라졌을까 생각해 봤어요. 의외로 금세 답이 나오더라고요. 다 큰 동물과 새끼 동물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는 건 둘의 차이를 만드는 어떤 요소가 있다는 얘기일 거예요. 그 요소가 단지 덩치의 차이만은 아닐 거라 생각해요. 사람도 어른과 아이를 단지 몸 크기의 차이로 구분하지 않는 것처럼요. 어른이 아이를 이해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서로의 세계가 다르니까요. 아이들의 행동이 즉흥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걸 어른이 되지 못한 미숙함으로 치부해선 안 될 거예요. 어른의 세계에서는 합리성의 범주를 벗어난 행동이라고 해도 아이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고유한 인식 방법과 사고 체계에 기반해 판단을 내린 합리적인 행동일 수 있으니까요. 조심스럽게 말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아이는 어른이 들어갈 수 없는 천방지축의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까 싶어요. 개와 강아지 사이에도 이와 비슷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송아지, 망아지도 아마 마찬가지일 거예요). 강아지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아이와 별다른 바 없는 난해한 존재란 걸 알 수 있어요. 언제나 하이 텐션에다가 지치지 않는 지구력에 끝없는 호기심까지. 그런데 강아지가 자라서 개가 되고 나면 달라지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점잖은 모습이 되어 우리의 친구이자 동료로서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잖아요.

 

얘 어떡하니…

 

그렇다면 고양이는 어떨까요? 고양이(아이)와 괴(어른)는 어떻게 다를까요? 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어요. 나이가 들고 자라서 괴가 되었으면 의젓하고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여야 할 텐데 이놈의 고양이들은 덩치만 커졌지 천방지축에 호기심 대마왕에 언제나 자기들 멋대로인 성격 그대로니까요. 괴나 고양이나… 그러니 ‘괴’라는 단어가 사라질 수밖에요. 이런 특징 때문에 고양이는 개에 비해 교감하기가 정말 어려운 존재인 것 같아요. 가끔 개들이 사람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모습을 보면 깜짝 놀라곤 해요. 개들은 어쩜 저렇게 사려 깊고 이해심이 많을까 하면서요. 사람도 언어가 다르면 의사소통이 힘들어지고 공감하기 위한 장벽이 높아지는데 개들은 그런 차이 따위는 가볍게 뛰어넘는 것 같아요. 만약 제가 개(이름은 치코라고 할게요)와 함께 살고 있다면,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을 만나 의사소통을 하는 것보다 치코와 소통하고 공감하는 게 훨씬 편안하다고 느끼지 않을까 싶어요. 개들은, 정말로 대단한 존재가 틀림없어요.

 

고양이가 교감하기 힘든 난감한 존재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가끔은 예외적 사건이 발생하곤 해요. 봉산아랫집에선 삼삼이가 그래요. 오묘 중 유일하게 교감하기가 가능한 아이예요. 아무 때나 그런 건 아니고요. 하루에 딱 한 번만 가능해요. 저는 밤에 자려고 누웠을 때가 제일 행복해요. 멋진 하루였건 엉망진창인 날이었건, 잠자리에 누워 이불을 폭 뒤집어쓰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모든 소원을 이룬 듯한 기분이 들어요. 어쩌면 오직 잠자는 시간을 맞이하기 위해 매일매일을 살아간다고 해도 될 것 같아요. 그 행복한 시간을 몇 배나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게 바로 삼삼이예요. 자려고 누워서 노곤한 몸을 뒤척이고 있으면 어느 틈엔가 삼삼이가 옆에 와서 똑똑, 하며 노크를 해요. 어느 날엔 얼굴을 똑똑, 다른 날엔 어깨를 똑똑, 또 어떨 땐 머리를 똑똑, 베개를 똑똑, 삼삼이답게 신경질이 약간 섞인 채 보채기 시작해요. 그러면 저는 이불을 살포시 들어 올려요. 삼삼이는 킁킁 냄새를 맡아 보는 듯하다가 들린 이불 속으로 재빠르게 들어와요. 그리곤 머리를 제 겨드랑이 아래에 두고 몸을 동그랗게 말아서, 제가 팔을 내리면 자연스럽게 엉덩이가 손바닥에 살포시 감싸지는 자세로 자리를 잡아요. 그렇게 새근새근 잠이 들 때까지 둘이서 포근포근.

 

동글동글 김삼삼 선생

 

딱 그 순간이 제가 삼삼이와 교감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에요. 대단한 걸 교감하는 건 아니에요. 편안함, 안도감, 무기력함이 적당히 섞인 어떤 기분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그 기분은 혼자서는 결코 느낄 수 없고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여야만 알 수 있는 감정이에요. 오랫동안 세월을 쌓아 온 친구와 같이 있을 때 간혹 이런 생각을 해 보신 적 있지 않으세요? 얘랑은 뭘 같이 하는 것도 아닌데 함께 있으면 뭔가 이룬 것 같은 기분이 든다거나,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지만 내가 뱉어낸 단어 하나하나가 친구에게 모두 흡수되는 것 같다거나,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좀 더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들 말이에요. 정체를 설명하긴 힘들지만 그런 교감의 상태가 있는 것 같아요. 꽉 조이지 않아 느슨하고 편안하지만 그렇다고 물렁거리진 않고 단단하게 이어진 듯한 느낌요. 저는 (거의) 매일 밤 삼삼이를 옆구리에 끼고(?) 그렇게 교감을 나눠요. 한편으론 어중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과연 삼삼이도 나처럼 공감하고 있는 게 확실한가? 나는 그냥 박스의 대체품 같은 건 아닌가?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요. 마치 오랜 친구처럼 제 곁엔 삼삼이가 있고 삼삼이 옆에 제가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니까요. 오늘 밤에도 삼삼이와 함께 이불 속에서 교감을 나누며 잠들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하네요. 삼삼아, 얼른 밤이 왔으면 좋겠다. 그치?

 

 

마침.

 

* ‘돝-돼지’도 있지만 고양이에 관한 글이니까 슬쩍 넘어갈게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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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1)   |   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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