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는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했어요. 고양이 얘기만 하는 에세이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이번엔 수학 이야기를 할 거예요.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라며 당황하실 거란 걸 알아요. 하지만 제대로 들으셨어요. 수학. 산수란 녀석의 형님인데 동생보다 백만 배쯤 괴상하고 난폭한, 그 수학이에요.

 

미적분이라는 게 있어요. 혹은 있다고 해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 이과와 문과로 나뉘는(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네요) 기형적인 교육과 입시제도 탓에 미적분이란 존재의 무서움(?)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이들도 많을 테지만, 그렇더라도 그 강력한 보스의 횡포에 대해서 한 번쯤은 들어들 보셨을 거예요. 저는 애석하게도 미적분, 그러니까 미분과 적분을 모두 배웠어요. 무모하게도 이과를 선택했던 탓에 미분과 적분을 피해갈 방법이 없었어요. 당시의 미적분은, 정보통신이나 과학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20세기의 미적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의 최첨단 미적분 못지않게 어려웠던 것 같아요.

 

미적분만큼이나 오묘한 오묘의 세계

 

미적분 문제와 씨름하면서(그렇다고 다른 교과목들과 원만한 사이였던 건 아니지만..) 보낸 학창 시절이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순식간에 모든 걸 잊었어요. 머릿속에서 미적분에 관한 것만 쏙쏙 골라 꺼낸 다음에 휴지통에 집어넣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휴지통 비우기를 실행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 미적분 얘길 꺼내려 하고 있네요. 미적분이 그렇게 흉측한 악당인 것만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어요. 물론 시험 문제로 맞닥뜨리는 한에서는 여전히 공포의 존재겠지만, 미분과 적분이라는 논리적 개념 자체는 우리의 삶에 매우 유용한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에너지 보존에 관한 열역학 제1법칙을 통해서, 일상의 풍요로움을 위해서는 회사에 갖다 바치는 에너지를 줄여야 한다는 걸 ‘워라밸’이라는 신조어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요.(열역학 제1법칙에 의하면 에너지는 형태가 변할 수 있을 뿐 새로 만들어지거나 없어질 수 없다고 해요)

 

혹시나 뭐라도 생각나는 게 있을까 싶어 인터넷에 ‘미분’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하고 설레는 맘으로 엔터키를 눌렀어요. ‘미적분에 대한 쉬운 이해’라는 제목의 검색 결과가 있길래 클릭했어요. 어디가 쉽다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어요. 애초에 미분을 자세하게 설명하려는 의도가 없었기에 다행이지 뭐예요. 하마터면 <수학의 땡땡>을 공부하느라 ‘이치코의 코스묘스’ 연재가 종료될 뻔했어요. 수학식으로 미분을 계산하는 법을 모두 까먹었다고 해도 다행히 미분의 개념은 기억에 희미하게 남아 있어요. 미분은 비선형 함수를 선형 함수로 표현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y=x²처럼 그래프가 곡선으로 그려지는 함수를 미분하면 곡선의 한 점에서의 1차 함수, 직선으로 된 기울기(미분계수)를 구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한 점에서 기울기를 구하기 위해서는 곡선을 무한히 잘게 나눈다는 개념이 필요해요. 미분의 한자 표기를 봐도 알 수 있죠. 微分, 작게 나누다. 미분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에요.

 

y=x²

 

어떤 현상의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부분으로 나누어 보는 일,이라는 그럴듯한 일상 언어로 표현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미분이라는 수학적 개념을 말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일상의 언어로 풀어쓰는 것만으로도 수식을 통해서는 알기 힘들었던 사실을 발견하게 돼요. 바로 전체와 부분은 어떤 관계인가에 대한 것이에요. 부분으로 나누어 봄으로써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요. 첫째는 부분이 전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분에는 전체의 특징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이 전제가 성립하지 않으면 전체와 부분은 서로 상관하지 않는 별개의 것이 되어버리거나 동일한 개념의 반복이 되어버릴 뿐이에요. 전체를 이루지 못하는 부분의 파편이거나 부분 없는 전체의 덩어리일 거예요.

 

한자어 微分이 아니라 영어 diffrential에서 미분의 개념을 훨씬 역동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다름, 차이를 뜻하는 diffrent에서 파생된 많은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연관되니까요. 미분은 단지 잘게 나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차이에 주목하는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이 말은 언뜻 들어도 철학적이란 걸 알 수 있어요. ‘생성의 철학자’라 불리는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들뢰즈가 이러한 미분의 개념을 파고든 대표적인 인물이에요. 들뢰즈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은 누가 보도라도 미분의 개념이 담긴 제목이라고 할 수 있죠. 사실 수학과 철학이 연결되는 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에요. 미분의 발명자인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모두 철학자이기도 했고 플라톤, 데카르트, 러셀 등의 유명한 사람들도 철학자이자 동시에 수학자였으니까요. 철학이 우리 삶을 탐구하는 학문인 것처럼 그러니까 수학도, 과학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학창 시절에 핍박(?) 받았던 기억 때문에 회피하며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 달리 실제로는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학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진작에 깨달았더라면 혹은 누군가 알려줬더라면 수학 공부가 훨씬 흥미로웠을 텐데, 억울할 따름이에요.

 

차이와 반복

 

고양이와 함께 살아가는 일의 기쁨을 미분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꼭 고양이가 아니라도 우리가 느끼는 기쁨이란 감정이 그런 걸지도 모르겠어요. 기쁨은 그 총합으로 느껴지거나 기억되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이를테면 제가 삼삼이, 모카, 치코, 미노, 오즈와 함께하며 느끼는 기쁨의 총량이란 게 분명히 존재할 테지만,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건 기쁨의 사건이 발생하는 개별적 순간들뿐이에요. 잘게 나누어진 조각만이 의미를 생성해요. 이를테면 외출을 마치고 집에 들어갔을 때 삼삼이가 꼬리를 치켜든 채 안아달라고 보채는 소리, 무릎을 내어주면 냉큼 올라와서 고로롱거릴 때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 몸을 동글게 말아서 자고 있을 때 살며시 삐져나온 몇 가닥의 수염 같은 것들 말이에요. 어떨 땐 삼삼이를 둘러싼 세계의 모습이 기쁨으로 기억되기도 해요. 창가에 앉은 삼삼이를 포근하게 덮고 있던 햇빛, 잠자는 삼삼이를 감싸던 빗소리, 삼삼이가 코를 벌름거리며 쫓던 봄바람의 여운들. 삼삼이가 주는 기쁨이라는 말은 분명히 기쁨의 총량에 관한 말일 거예요. 하지만 그 기쁨이 무엇인지, 왜인지, 어떻게인지 알기 위해선 잘게 쪼개진 기쁨의 순간을 느끼는 수밖에 없어요. 기억에 남는 것도 결국엔 그 조각들이고요.

 

기쁨이 왜 그렇게 미분의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기쁨이 깊은 곳에서 끌어 올려진 감정이 아니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날이 조금만 가물어도 금세 메말라 바닥을 드러내는 작은 실개천처럼 말이에요. 기쁨은 화려하고 역동적인 만큼 즉흥적이고 휘발성 강한 감정인 것 같아요. 그래서 기쁨의 크기라는 말은 흐르는 모래 위에 세워진 성처럼 위태롭게 존재하는 개념이에요. 기쁨은 오직 순간일 때 그 실체를 명확히 알 수 있는, 미분방정식을 거쳐야만 존재를 드러내는 곡선의 기울기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슬픔은, 슬픔은 말이에요.

 

삼삼이의 순간

 

미적분으로 시작한 글인데 아직 적분 얘기를 하지 않았죠? 적분은 미분의 반대 개념이에요. 미분을 통해 곡선을 잘게 나눠서 한 점에서의 기울기를 알 수 있다면, 적분을 통해서는 잘게 나눠진 일정한 구간을 누적시켜서 곡선의 면적을 알 수 있어요. 흥미로운 건 미분과 적분이 수학적으로는 쌍을 이루는 개념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인류가 적분을 탐구한 역사가 훨씬 오래되었다는 거예요. 사각형, 삼각형과 달리 외곽 형태가 곡선인 물체의 면적을 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꽤 오래전부터(심지어 고대 이집트 시절부터?)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해요. 아, 수학 얘기는 이제 그만.. 아무튼 미분처럼 적분도 그럴듯한 일상의 언어로 표현해보자면, 부분의 합을 통해 전체를 파악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슬픔을 기억하는 방식이 적분과 비슷한 것 같아요. 물론 슬픔이 생겨난 원인, 슬픔이 쏟아져 나왔던 순간, 슬픔으로 무너졌던 세계의 파편, 들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기억하는 경우도 있기는 할 거예요. 하지만 그보다 보편적으로, 슬픈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은 슬픔의 크기가 우주의 시작처럼 한순간에 폭발해 모든 걸 압도해버리는 시간인 경우가 훨씬 많을 거예요. 가슴 한구석에 먹먹함이 느껴지나 싶다가 어느새 마음이 꽉 붙들려 옴짝달싹 못 하게 되어버리죠. 방금까지 공기로 숨을 쉬다 갑자기 물속에 던져진 기분, 지구의 중력이 실체가 되어 짓누르는 느낌. 슬픔이란 언제나 적분의 결과물로만 존재하는 감정 같아요. 기쁨이 전체의 크기가 아닌 순간의 사건으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면, 슬픔은 순간의 흔적이 모두 사라지고 최종적 크기로만 느낄 수 있는 감정 같아요. 그리고 어떤 슬픔의 최종적 크기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커지기도 하고요.

 

혹은 우주를 홀로 떠돌거나… [Photo by NASA on Unsplash]

 

우리는 무한히 많은 기쁨과 함께 살아갈 수 있어요. 기쁨은 크기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니까요. 우리의 내면은 크기 없이 존재하는 기쁨을 얼마라도 수용할 수 있어요. 하지만 살면서 감당할 수 있는 슬픔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각자의 내면보다 큰 슬픔을 품을 수 없으니까요. 외부의 세계로 흘러넘친 슬픔은 결국 존재를 집어삼키고 말아요. 어떤 슬픔의 크기가 극단적으로 크다면 누군가는 그 한 번의 슬픔으로 인생이 무너져버릴 거예요. 견딜 수 있을 만큼의 크기를 가진 슬픔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슬픔이 누적되어 내면의 크기를 초과하게 되면 결과는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삶이란 어쩌면 슬픔이 정해준 한계 내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고 말이에요.

 

고양이와 함께 살아가는 일은 기쁨은 일상이기도 하지만 슬픔의 사건이기도 해요. 그런데 고양이가 주는 기쁨을 말하고 표현하는 것에 비해 슬픔을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당연한 일이에요. 어느 누가 그렇게 큰 슬픔을 떠올리며 묘사하고 싶겠어요. 고양이와 이별하는 일은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에요. (비록 슬픔의 크기는 다를지 몰라도) 마치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처럼 말이에요. 사회가 권장하는(때론 강요하는) 가족의 개념, 그러니까 이성 간의 결혼 뒤에 아이를 낳아서 가족이란 공동체로 살아가는 데는 한 가지 전제가 있어요. 생물학적으로 명백해 보이는 것이라 그걸 의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래도 논리적인 측면에서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에요. 부모가 자식보다 먼저 죽는다는 것 혹은 죽어야 한다는 것. 여기에 의문을 품으면 우리에게 익숙한 가족의 개념은 성립하지 못할 거예요. 만약 자식이 나보다 먼저 죽을 게 확실하다면 과연 누가 자식을 낳아서 키우려고 할까요. 자식들로 인해 경험할 수 있는 기쁨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말이에요. 그런데 고양이와 함께 살아가는 일은 그렇게, 그게 당연한 채로 살아가는 일이에요. 내가 고양이보다 더 오래 산다는 것.

 

삼삼이를 데리고 봉산아랫집으로 이사를 오자마자 모카가 왔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치코가 왔죠. 그리고 1년 반 뒤에 미노가 왔고 다시 1년 뒤에 오즈가 왔어요. 봉산아랫집은 2018년에 오묘가 되었어요. 오즈 이야기를 하면서(엔드게임 and..) ‘猫니버스의 확장을 더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오즈를 입양 보내려 했다고 썼지만, 실은 좀 더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어요. 모카부터 오즈까지 넷의 태어난 날짜가 2년 반이란 시간 안에 촘촘하게 들어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어요. 나이가 들어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겪는 일은 사람과 고양이가 크게 다르지 않아요. 정신과 육체가 약해지며 시들어 가죠. 나이가 많은 고양이는 노인과 똑같아요. 움직이려는 시도가 줄어들고 드물게 움직이더라도 눈에 띄게 느려져 있으며 높은 곳을 오르지 못함은 물론이고 낮은 곳을 오르는 일도 힘들어해요. 그리고 병 때문에 고통을 받곤 하죠.

 

연년세세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마 짐작하셨을 거예요. 오즈를 구조했을 때, 넷이나 되는 아이들이 거의 동시에 노묘가 되는 미래를 견딜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어요. 몸이 힘든 것에 대한 걱정은 아니었어요. 어쩌면 매일같이 병원을 들락날락해야 하고 약을 챙기고 또 주사를 놓아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아이들이 아파서 제 일상 전부가 고양이 병수발로 채워진다고 해도 그건 감당할 수 있어요. 삼삼이, 모카, 치코, 미노, 오즈가 주는 기쁨과 함께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생각한다면 늙어버린 아이들을 돌보는 건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런 것보단 마음이 견디지 못할까 두려웠어요. 병의 아픔과 불편함으로 힘들어하며 하루하루 쇠약해져 가는 아이들을 지켜봐야 한다는 상상만으로도 힘들었어요. 만약 넷이 모두 아프게 된다면 그 슬픔의 크기를 견딜 수 있을까 걱정되었어요. 물론 노묘라고 해서 모두 병에 걸리고 아픈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 아이들은 절대 아프지 않을 거라고 낙관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혹시라도 마주치게 될 슬픔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오즈를 입양 보내려고 했던 것이었어요.

 

지금은, 연년생으로 다닥다닥 붙은 네 남매가 아프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랄 뿐이에요.
그리고 저에게 고양이와의 인연이 행여 더 남았다 하더라도 막내 오즈와 터울을 좀 두고 그 인연이 맺어지기를 또한 간절하게 바랄 뿐이었으나…

 

To be continued…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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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코의 코스묘스]

시즌 1, 코스묘스의 오묘한 시작

Episode 1. 한낮의 작고 짙은 온기를 닮은 고양이, 오히루

① 반짝이는 삶   |   ② 막연한 기다림   |   ③ 기쁨의 크기

Episode 2. 잃어버린 시간에 관하여, 김삼삼

④ 각자의 자리   |   ⑤ 굴러온 돌   |   ⑥ 잃어버린 시간

Episode 3. 미래에서 온 카오스, 강모카

⑦ 빈 책상   |   ⑧ 혼돈의 카오스   |   ⑨ 오래된 미래

Episode 4. 이치코,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⑩ 화려한 시절   |   ⑪ 보내는 마음   |   ⑫ 이치코의 코스묘스   

Episode 5. 어느 날  갑자기 – 불쑥, 고미노

⑬ 뜻밖의 여정   |   ⑭ 회색의 미궁   |  ⑮ 약자의 마음 (1)   

Episode 6. D의 의지를 잇는 자, 송오즈

⑯ 소리치는 일   |   ⑰ 총체적 난국   |   ⑱ 엔드게임 and..

시즌 2,

길어질 게 뻔한 변명(1)   |   길어질 게 뻔한 변명(2)   |   길어질게 뻔한 변명(3) 

원래 그런 게 어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