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5년도 더 지난 일이네요. 저는 한창 목공, 그러니까 가구 만드는 일에 빠져 있었어요. 퇴근시간이 늦은 밤이어서 공방에 자주 들를 수는 없었지만 시간이 날 때면 대체로 마포구 구수동에 있는 어느 목공방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공방에 낯선 고양이 한 마리가 찾아왔어요. 색깔이 독특한 녀석이었어요. 검은색이라기보단 짙은 회색에 가까운 털이 몸의 대부분을 덮고 있는 삼색 고양이였어요. 간간히 섞인 갈색 털마저 보통의 삼색이보다 훨씬 옅어 차라리 베이지색이라고 해도 될 만큼 흐릿했어요. 그렇게 물빠진 느낌의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녀석이 처음 나타났을 땐, 대개 그렇듯이 간간이 와서 밥을 먹고 가는 정도였어요. 공방을 운영하고 있던 두 사람 중 한 명이 고양이 셋의 집사여서 알뜰살뜰 부지런하게 밥을 챙겨주었죠. 그러다가 차츰 익숙해진 녀석은 어느새 공방 안까지 자주 들어오게 되었고 ‘모아’라는 이름도 생겼어요.

 

물빠진 듯 묘한 색 조합이 인상적인 모아

 

간혹 외출을 하긴 했어도 모아는 공방 안에서 지내게 되었어요. 안전을 위해 모아가 있는 채로 공방 문을 잠그고 퇴근했죠. 모아는 금세 공방에 적응하기 시작했어요. 사람들도 모아가 있는 공방의 풍경이 당연해졌고요. 인간들이 열심히 가구를 만드는 사이를 무심하게 지나가거나 공방 한켠에 잔뜩 쌓인 가구를 캣타워 삼아 느긋하게 잠들며 지냈어요.

 

모아가 공방에 완전히 적응했겠다 싶어서 중성화 수술을 위해 병원을 방문했어요. 그런데 말이죠, 우리가 다 아는 뻔한 스토리예요. 마치 한국의 아침 드라마에서 젊은 주인공 주위를 이유 없이 배회하는 중년 캐릭터가 등장하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주인공의 사라졌던 생모이거나 생부이거나 하는 이야기처럼 말이에요. 모아는 이미 임신을 한 상태였어요.

 

인간들아 열심히 가구를 만들어랏!

 

공방 안에 조산실이 차려졌고 모아는 다행히도 출산을 무사히 마쳤어요. 컴퓨터에 있는 사진첩을 뒤져보니 2014년 10월 22일에 조산실 안에서 꼬물거리는, 어른 주먹보다 조금 클까 말까 한 아이들을 찍은 영상이 있네요. 꼬맹이들은 총 다섯이었어요. 까만 아이가 하나, 카오스 아이가 하나, 삼색이 아이가 하나, 치즈 아이가 둘이었어요. 아직은 이름도 없고 살아가야 할 곳도 정해지지 않은 아름다운 덩어리들이었죠. 꼬물이들은 무럭무럭 자랐고 어느덧 11월 중순을 지나 입양을 보내야 할 시기가 왔어요. 다행히 카오스와 삼색이가 먼저 입양을 갔어요. 남은 셋도 금방 입양이 될 줄 알았는데 그 뒤로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어요. 목공수업이 활발하게 열리는 공방이라 오가는 사람이 많긴 했지만, 아깽이를 입양 보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조산실에서 한창 꼬물거리는 아가들

 

당시에 저는 이미 삼삼이와 함께 살고 있었어요. 게다가 삼삼이가 집에 온 지 1년도 채 안 된 때라 고양이 식구가 더 늘어난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던 시절이었어요. 고양이는 하나만으로도 충분하게 느껴졌거든요. 지금의 저라면 “이 바보 멍충이야, 고양이와 현금은 무조건 많을수록 좋은 거야!”라며 그때의 제 자신에게 뒤통수라도 한 대 갈기겠지만 말이에요. 참, 삼삼이는 조만간 다른 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될, 저희 첫 고양이예요.

 

그렇지만 공방에 남은 세 아이의 입양이 늦어지면서 제 생각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어요. 하나 정도 더 있는 건 괜찮지 않을까? 삼삼이도 친구가 생기면 좋아하지 않을까?(삼삼이에게 물어보진 못했어요. 만약 물어봤더라면 싫다고 했을 수도… 삼삼이는 그런 아이니까요.) 공방에서 고양이를 돌보던 친구의 압박도 점점 심해졌어요. 공방에 갈 때마다 누굴 데려갈 거냐고, 빨리 정하라고 성화였죠. 아무튼 그러는 사이 저도 모르게, 만약 데려온다면 셋 중에 누굴 데려오지? 이름은 뭘로 하지? 등등을 고민하는 단계가 되었어요. 집에 고양이가 늘어나는 건 인간의 힘과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정신을 차려보니 이름까지 지어놓고 데리러 갈 날짜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 있었어요. 공방에 갔을 때 까만 아이가 남아 있다면 요루(夜), 치즈 아이가 남아 있다면 히루(), 그렇게 이름을 정했어요.

 

처음 등장하는 치즈 아이가 히루예요(영상을 꼭 끝까지 보세요)

 

히루 단독샷(엄마와 함께)

 

어느 저녁, 캐리어를 들고 공방으로 향했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치즈 아이 둘만 남아 있었어요. 이제 아이의 이름은 정해졌으니 누구에게 그 이름을 줄지만 정하면 되는 상황이었어요. 전 둘 중에서, 평소에 제일 활발했던 아이를 선택했어요. 흰색 털이 목 주위를 감싸고 있어서 (목덜미의) ‘덜미’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던 아이였어요. 활동성이 워낙 좋고 깨발랄해서 공방에 갈 때마다 제일 눈에 띄다 보니 저도 모르게 맘이 갔었나 봐요. 그렇게 덜미는 히루가 되었어요. 그리고 집에 온 첫날부터 마치 제 집이었던 양 난리를 피우기 시작하는데….

 

집에 처음 온 날, 겁먹은 (듯 연기를 하고 있는) 히루

 

가끔은 무얼 기다리는지 알지 못하는 기다림도 있는 것 같아요. 세상엔 명확하게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아서, 사람의 처지 또한 어렴풋한 불안의 상태나 막연히 희망적인 상황에 놓이게 될 때가 종종 있어요. 뇌의 사고체계가 인식하지 못해도 몸의 감각은 알고 있어요. 불안에 겁먹었을 땐 갑자기 공기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거나 그림자의 깊이가 더 깊어 보이기도 하고, 때론 하늘이 덜컥 주저앉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희망으로 부풀었을 땐 길을 걷다 가로수 이파리 하나하나의 떨림을 감지하거나 봄날의 햇볕이 내 몸에 부딪쳐 경쾌한 소리를 내고 튕겨나가는 걸 느끼기도 하고요. 그런 기분에 빠져있을 때 예상치 못한 사건을 겪게 되면 누구라도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혹시 내가 이 사건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히루와 함께 살게 된 사건도 그랬어요. 제 삶이 반짝이게 될 것 같은 느낌,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긴장과 흥분이 늘 곁을 떠나지 않았죠. 설명할 순 없지만 분명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죠. 막연하지만 간절한 기다림이었어요. 아마 히루도 똑같았을 거라 생각해요. 직접 물어보진 못했지만, 히루도 아마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대답했을 것 같아요. 왜 더 일찍 함께하기로 마음먹지 않았냐는 핀잔과 함께 말이에요.

 

to be continued…….

 

P.S. 모아도 그 뒤에, 이틀이나 사라졌다가 상처를 입고 돌아온 일이 있은 후 공방 사람의 집으로 들어갔어요. 그 집엔 고양이가 넷이 되었고 모아는 뚠뚠이가 되었어요.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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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코의 코스묘스]

시즌 1, 코스묘스의 오묘한 시작

Episode 1. 한낮의 작고 짙은 온기를 닮은 고양이, 오히루

① 반짝이는 삶   |   ② 막연한 기다림   |   ③ 기쁨의 크기

Episode 2. 잃어버린 시간에 관하여, 김삼삼

④ 각자의 자리   |   ⑤ 굴러온 돌   |   ⑥ 잃어버린 시간

Episode 3. 미래에서 온 카오스, 강모카

⑦ 빈 책상   |   ⑧ 혼돈의 카오스   |   ⑨ 오래된 미래

Episode 4. 이치코,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⑩ 화려한 시절   |   ⑪ 보내는 마음   |   ⑫ 이치코의 코스묘스   

Episode 5. 어느 날  갑자기 – 불쑥, 고미노

⑬ 뜻밖의 여정   |   ⑭ 회색의 미궁   |  ⑮ 약자의 마음 (1)   

Episode 6. D의 의지를 잇는 자, 송오즈

⑯ 소리치는 일   |   ⑰ 총체적 난국   |   ⑱ 엔드게임 and..

시즌 2,

길어질 게 뻔한 변명(1)   |   길어질 게 뻔한 변명(2)   |   길어질게 뻔한 변명(3) 

원래 그런 게 어딨나요? 

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1)   |   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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