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아랫집의 오묘는 어떤 기준에 따라 각각의 고양이들이 닮은 꼴로 묶이기도 하고 전혀 다른 카테고리로 분류되기도 해요. 이를테면 삼삼이와 모카는 높은 장소를 선호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어요. 이불 속을 좋아하기론 모카, 미노, 오즈가 서로 닮아 있고요. 그런가 하면 입이 짧아서 간식에 엄청나게 까탈스러운 삼삼이, 모카, 미노, 오즈의 그룹도 있어요. 이상하네요. 치코 이름이 없네요. 치코는 웬만한 기준으로는 나머지 아이들과 닮지 않은 묘한 녀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콩파라는 이유로 미노와 함께 묶을 수 있어요. 두 녀석 모두 수컷답게 우람한 덩치를 가졌어요. 오묘 중 셋(삼삼, 모카, 오즈 – 레이디들)은 5kg 이하이고 둘(치코와 미노 – 땅콩파)은 거의 8kg에 육박하니 참 극단적인 광경이란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둘이 수컷으로서 닮은 점은 딱 그것뿐이에요. 심지어 덩치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무게만 비슷할 뿐이지 체형은 전혀 달라요. 치코가 푸근하고 펑퍼짐한 모양인 데 반해 미노는 길쭉한 근육질의 몸매에 가까운 편이니까요(최근엔 그 근육들이 물컹한 어떤 것으로 변하긴 했지만요).

 

(before) 조각 미남

 

(after) 미남

 

미노는 몸무게를 제외하곤 수컷의 전형성과 거리가 먼 편이에요(그에 반해 치코는 전형적인 수컷 고양이에요). 호기심을 자극, 이를테면 간식이 든 서랍을 여는 소리라든가, 장난감을 꺼내는 소리라든가, 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앞장서 뛰쳐나가기보단 경계심을 먼저 발동시키곤 해요. 물론 미노가 제일 좋아하는 장난감을 흔들고 있으면 해맑은 표정으로 부리나케 달려들지만 그 와중에도 늘 주변을 살피며 조심하는 게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미노는 사람이건 고양이건 간에 다른 존재를 대할 때 상전처럼 굴지 않아요. 차라리 그 반대라고 해야 할 거예요. 늘 자기가 낮은 위치인 것처럼, 상대가 더 높은 존재인 것처럼 행동하곤 해요. 다른 고양이를 윽박지르는 일은 절대 없고 언제나 천진하고 살갑게, 간혹 투정을 부리듯 행동해요. 오즈가 아깽이로 집에 왔을 때 엄마처럼 딱 붙어서 살갑게 챙긴 것도 미노였어요. 사실 그땐 약간 놀랐어요. 언제나 응석 부리기 좋아하던 막내에게 그런 모습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으니까요. 아무튼 미노는 수컷들, 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전형적인 모습에서 많이 비껴 있어요.

 

봉산아랫집의 오묘 중 치코가 건강의 문제에서 약자라고 한다면 미노는 태도의 측면에서 약자에 해당해요. 사실 집안에 쫄보들이 한둘이 아니긴 해요. 미노뿐만 아니라 모카와 오즈까지 쫄보 그룹에 속하니까요. 하지만 미노는 그중에서도 가장 여리고 겁이 많은 고양이예요. 모카와 오즈가 강쫄보, 송쫄보로 불리는 데 반해 미노는 그냥 쫄보라고 불릴 정도니까요. 모카는 겁 많음과 경계심 많음이 복잡하게 엮여 있어 마냥 쫄보라고 불리기엔 억울한 면이 있고, 오즈는 쫄보라고 놀림당해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겁이 많지만 호기심이 발동하는 순간 희한하게 용감해지는 도른자(!)의 기백을 함께 지니고 있어요. 그렇지만 미노는 그저 순수한 쫄보, 겁쟁이예요. 거기다 늘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한발씩 물러나는 것까지 더해 전형적인 약자의 태도를 가지고 있어요. 가끔씩 미노가 보여주는 약자의 모습이 안쓰러울 때도 있어요. 하지만 미노가 바뀌어야 한다거나 (삼삼이나 치코처럼) 강자의 태도를 배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변해야 하는 건 약자가 아니라 약자를 둘러싼 세계라는 걸 미노를 통해 배우게 되었거든요.

 

약자들의 굳건한 연대(?)

 

저는 태어나서 한 번도 약자의 입장에 처해본 적이 없어요. 늘 강자의 세계에 속한 채 성장해 왔어요. 제가 그걸 원했던 건 아니었어요. 노력을 통해 성취한 건 더더욱 아니고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 있었어요. 남자, 경상도 출신, 장남… 아, 그만할게요. 지금 나열한 것만으로도 누군가는 치가 떨릴 수도 있겠어요. 아무튼, 그런 것들이 강자의 세계를 드러내는 상징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도 한참의 시간이 더 필요했어요. 남자-여자, 경상도 출신-전라도 출신, 장남-둘째/셋째.. 등의 배치가 단지 객관적 차이를 표현하는 게 아니라 권력의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강자란, 그가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약자의 세계를 누르고 서 있는 존재라는 걸 인식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런 관계의 역학을 알게 되었다 해도, 성별과 출신 지역, 거주 지역, 학벌 등이 바뀌지 않았을뿐더러, 나이를 먹으며 오히려 (대개는 남성들에게만 주어지는) 사회적 권위까지 획득한 기성세대가 된 저는 여전히 강자의 입장에 서 있어요.

 

그래서였던 것 같아요. 약자의 세계를 뚜렷하게 볼 수 있으면서도 약자의 마음에 관해선 계속 무관심한 채 살아왔어요. 물론 생각이 달라졌으니 여러 행동이 바뀌긴 했겠죠. 스스로 (존재만으로 약자를 억압하게 되는 구조적 측면에서의) 강자라는 자각을 한 뒤로는 말 한마디, 표정과 몸짓 하나 조심하려 노력했던 것 같아요. 단지 자기만족은 아니었어요. 저와 관계된 약자들이 불합리한 억압을 느끼지 않게 하려는 구체적인 목표을 달성하기 위해 애를 많이 썼어요. 하지만 그 노력이 그다지 결실을 보았던 것 같지는 않아요. 여전히 약자의 마음엔 관심이 없었으니까 말이에요. 굳이 말하자면, 약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때려죽일 놈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대체적으로 형편없는 (혹은 기껏해야 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놈이었을 거예요. 무해한 존재가 되려 노력했지만 실패했어요. 그런데 미노를 만나고 나서부터 조금씩 달라졌어요. 엄청난 겁쟁이, 쫄보에 맨날 눈치를 살피느라 잔뜩 주눅 든 미노를 보면서 약자의 세계뿐만 아니라 약자의 마음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많은 걸 다시 깨닫게 되었어요.

 

이렇게나 선명한 호랭이 무늬에도 불구하고…

 

약자의 마음에는 수십, 수백 가지의 모습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주어진 몫에 쉽게 만족해버리는 모습일 거예요. 명백히 부족하게 배당된 몫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그만큼이 스스로 누릴 수 있는 최대치인 양 현실에 주저앉고 마는 마음요. 강자의 마음은 그렇지 않아요. 끝없이 불만을 제기하고 더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심지어 타인의 것을 뺏어서라도 자신의 몫을 키우려고 하죠. 그것이 권리라고 당당히 말하면서 말이에요. 왜 약자는 늘 노심초사해야 할까요. 조그마하게 손에 쥔 것뿐인데 그것마저 뺏기지 않을까 하고요. 왜 약자는 매번 지독하게 적은 몫에 만족해야 할까요. 이 정도라도 주어지는 게 어디냐고 안도하면서요. 왜 약자의 마음은 이토록 수동적이어야만 할까요…. 이런 생각들을 미노 때문에 하게 되었어요. 장난감을 대하는 미노의 태도를 보며 생각했어요. 미노가 어떤 장난감이 제 것인 양 맘껏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어요. 마치 친구의 장난감을 빌려서 노는 아이처럼 조심스럽게 장난감을 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저 장난감은 오즈가 좋아하는 거니까 나는 조금만 가지고 놀아야지’라거나 ‘치코 형아가 지금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으니까 난 기다렸다가 이따 해야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예요. 미노는 그렇게 적게 가진 것에, 자기 몫이 없는 것에 늘 만족해 버리곤 해요. 영락없는 약자의 마음이죠. 더 많이 가져도 좋은 순간, 더 많은 걸 누려야 마땅한 순간에 스스로 주눅 들어 물러서는 마음 말이에요.(그래서 이 마음은 ‘배려’와는 확연하게 다른 것 같아요)

 

아… 쫄보여

 

제가 약자의 입장에 처해본 적 없다고 말했지만 한편으론 저 역시 항상 약자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약자인 채로 살아가야만 하는 처지라고 할 수 있어요. 국가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한에는 국가라는 강자에게 짓눌린 약자로, 회사의 직원으로 일하는 동안에는 회사라는 강자의 눈치를 봐야 하는 약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니까요.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일 거예요. 국가나 회사에 비해 힘이 약할 뿐 아니라 국가가 제공해주는 것에, 회사가 주는 것에 쉽게 만족하며 뺏기지 않으려 애쓰는 약자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죠. 국가나 회사에 더 내놓으라고, 왜 내 몫은 이것밖에 안 되냐고 큰소리치며 항의하는 사람을 만나긴 힘든 것 같아요.(임금협상처럼 상호 합의된 절차는 빼고요.)

 

이를테면 퇴직금 같은 경우, 다들 알고 계시듯이, 1년을 일하면 한 달 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을 받을 수 있는 제도예요. 법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어요. 그런데 법 조항을 자세히 읽어보니까 제가 놓치고 있던 중요한 단어가 들어 있더라고요.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제8조(퇴직금제도의 설정 등) 1항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어요. “퇴직금제도를 설정하려는 사용자는 계속근로기간 1년에 대하여 30일분 이상의 평균임금을 퇴직금으로 퇴직 근로자에게 지급할 수 있는 제도를 설정하여야 한다.” 바로 ‘이상’이란 단어. 그러니까 ‘1년에 한 달 치’로 환산되는 퇴직금은 노동자가 받을 수 있는 퇴직금의 최소 금액이란 거잖아요. 하지만 회사에 큰소리치며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경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몰라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약자의 마음이라서 그럴 거예요. 이만큼이면 됐지, 이 정도만 해도 어디야, 라며 쉽게 물러서는 약자의 마음 말이에요.

 

최저임금에 관해서도 얘길 하고 싶지만 너무 길어질 게 뻔해서 넘어가는 게 도리임에도 불구하고 딱 한 마디만 하자면, ‘최저’임금이라고 해놓고 그 ‘최저’를 당연한 최댓값처럼 취급하는 우리 사회가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이번 편은 좀 시사적이네요…)

 

“내 차례는 언제일까?”

 

뭐 이렇게 온갖 생각들을 하다가, 시작은 미노의 장난감이었죠, 어느덧 길고양이의 마음에 다다르게 되었어요. 그 마음은 틀림없이 약자의 마음일 거예요. 위태로운 마음이기도 하고요. 세상이 길냥이들에게 내어준 몫이 얼마일까 생각해 봤더니 너무나, 터무니없이 적었어요. 골목 사이 구석진 곳에 겨우 몸을 숨길 만한 공간, 주차된 자동차 아래에 드리운 조그만 그늘, 사람이 먹다 버린 음식이거나 쓰레기로 배출된 음식물 찌꺼기들… 길냥이들이 겨우 그만큼 주어진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슬펐어요. 그들은 더 많은 걸 누려도 되는 존재들인 걸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삼삼이와 식구가 되고 나서 3년이 넘도록 길냥이들의 밥을 챙겨주지 않았어요. 길냥이에겐 길냥이의 세계가 있는 법이지, 라며 그들의 삶을 냉담하게 대해왔어요. 당장 생명의 구조가 필요한 위급한 상황에 직면했을 땐 외면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지만 평소에는 그저 무심했어요. 그런데 미노의 마음, 약자의 마음을 (서툴게나마) 헤아리기 시작한 뒤로는 길냥이들의 세계를 못 본 체할 수 없었어요. 길고양이의 보호와 구조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분들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제가 오가는 길에 보이는 아이들만이라도 살펴야겠다고 결심하고 집 근처에 밥과 물을 꾸준히 챙겨주기 시작했어요. 고작 사료 한 그릇, 물 한 그릇이지만 매일, 가능하면 정해진 시간에 채워주려 하고 있어요. 그것으로 길냥이들의 세계가 극적으로 바뀌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마음만이라도 다치지 않고 평온해졌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동네의 온 골목을 배회해야 하는 일이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았으면, 갈증 난 목을 축이기 위해 후미진 곳에 고인 썩은 물을 찾는 것보다 안전한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면…

 

미노야, 고마워

 

삼삼이와 히루, 모카, 치코, 미노, 오즈는 모두 저에게 선물을 주었어요. 고양이를 사랑하는 세계가 있다는 걸 알게 해주었고 영원히 빛나게 될 순간을 살게 해주었고 오래 기다려야 얻는 게 있다는 걸 알게 해줬죠. 연약한 존재가 굳건히 서는 기쁨을 만날 수 있었고 한없이 순수한 존재를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어요. 여섯 아이에게서 참 많은 걸 받았지만 그중에서 제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미노의 선물이었어요. 약자의 마음에 관해 생각하게 된 것. 약자의 마음에 무관심한 채, 제 숨소리마저 누군가에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채 계속 살아갔을 생각을 하면 아찔하고 끔찍해요. 여전히 부족한 점투성이고 더 많이 변해야겠지만, 어쨌거나 조금씩 무해한 존재로 변해갈 수 있어서 너무 다행스러워요. 미노의 뜻밖의 여정이 저를 다시 태어나게 만든 셈이에요. 미노야,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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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에피소드, 마침.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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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1, 코스묘스의 오묘한 시작

Episode 1. 한낮의 작고 짙은 온기를 닮은 고양이, 오히루

① 반짝이는 삶   |   ② 막연한 기다림   |   ③ 기쁨의 크기

Episode 2. 잃어버린 시간에 관하여, 김삼삼

④ 각자의 자리   |   ⑤ 굴러온 돌   |   ⑥ 잃어버린 시간

Episode 3. 미래에서 온 카오스, 강모카

⑦ 빈 책상   |   ⑧ 혼돈의 카오스   |   ⑨ 오래된 미래

Episode 4. 이치코,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⑩ 화려한 시절   |   ⑪ 보내는 마음   |   ⑫ 이치코의 코스묘스   

Episode 5. 어느 날  갑자기 – 불쑥, 고미노

⑬ 뜻밖의 여정   |   ⑭ 회색의 미궁   |  ⑮ 약자의 마음 (1)   

Episode 6. D의 의지를 잇는 자, 송오즈

⑯ 소리치는 일   |   ⑰ 총체적 난국   |   ⑱ 엔드게임 and..

시즌 2,

길어질 게 뻔한 변명(1)   |   길어질 게 뻔한 변명(2)   |   길어질게 뻔한 변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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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1)   |   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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