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스튜디오는 각각 독립된 영화들에 밀접한 관계를 부여하면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라는 세계관을 구축했어요. 한 영화에서 캐릭터의 서사가 변하면 다른 영화에서 그 캐릭터가 등장하거나 언급될 때 변화된 결과가 반영되는 식이에요. 이 세계관은 각 영화의 독립적인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기보단 MCU를 공유하는 영화들 전체의 흐름에 관여하는 쪽으로 작동을 하더라고요. 대표적인 예가 인피니티 스톤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아이템일 거예요. 그런가 하면, 평소에는 느슨해 보이던 세계관이 전면에 드러나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경우도 있어요. <어벤져스>라는 타이틀이 붙은 시리즈가 거기에 해당하죠. <어벤져스> 시리즈의 마지막은 잘 아시다시피 ‘가망이 없’는 <엔드게임>이었어요. 여러 캐릭터가 퇴장하고 한편으론 새로운 캐릭터의 탄생을 암시하는, 일종의 중간 기착지 혹은 맺음 역할을 하는 영화였어요.

 

고양이와 어울려 사는 일 역시, 영화만큼 극적일 순 없다 하더라도, 세계를 만들어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은평구 봉산 아래에도 하나의 세계가 있어요. 아이언맨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독불장군인 삼삼이부터 블랙 위도우만큼이나 은밀하게 움직이며 매력을 뿜어대는 모카, 토르를 똑 닮은 무대뽀 치코, 캡틴 아메리카처럼 멋진 허우대를 자랑하지만 융통성이라곤 없는 미노까지 四묘가 살아가는 봉산아랫집의 猫니버스였어요. 그런데 봉산아랫집 猫니버스는 누가 봐도 감탄할 만큼 근사한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어요. MCU의 탐욕을 닮아 적당히를 모르고 계속 확장하려는 힘이 있다는 점이었어요. 미노를 식구로 맞았을 때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콩깍지만 한 집에 고양이가 계속 늘어나는 게 부담스러웠고 넷만 해도 제대로 돌보기엔 벅차다고 느꼈어요. 하지만 오즈의 등장에 따라 봉산아랫집 猫니버스가 다시 확장될 위기에 처해버렸죠.

 

왜? 밥을 왜? 그런 자세로?

 

猫니버스의 확장을 더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오즈는 입양을 보내기로 했어요.
하지만 몇 차례 우여곡절만 남긴 채 오즈를 입양 보내는 일은 결국 실패했어요. 음.. 실패했다는 표현은 좀 그러니까, 다섯 번째 식구가 되는 데 성공했어요. 봉산아랫집 猫니버스 역시 성공적으로 확장되었어요. 축하해주셔서 감사.. 아, 이게 아닌데 말이에요. 아무튼 그렇게 독수리 오형제 부럽지 않은 봉산아랫집 五묘가 되면서 저는 그전보다 더 깊은 고뇌에 빠지게 되었어요. 이젠 정말로 고양이 식구가 더 늘어나선 안 된다는 위기감이었어요. (다음 편쯤에 자세히 설명하게 될 어떤 이유로 인해) 당장 앞으로 몇 년 만이라도 ‘절대로 고양이가 더 늘어나선 안 된다’는 다짐을 매일 되뇌어야 할 판이었어요. 오즈의 합류가 봉산아랫집 猫니버스의 ‘엔드게임’ 역할을 해주길 바라야만 했어요. ‘이젠 가망 없’는 게임 엔드가 아니라 최종장으로서의 역할, 당분간은 고양이 식구가 늘지 않고 유지되는 일종의 맺음 역할을 말이에요.(오즈는 어벤져스의 누굴 닮았냐고요? <엔드게임>의 주인공 그분이에요. 우주 생명체의 절반을 몰살시킨 뒤 홀연히 귀농하신 분, 타농부, 타노스, 총체적으로 도른자.)

 

“나도 귀농할까?”

 

/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을 두고 조언이나 충고가 오갈 때,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과 대충 그럭저럭 살아도 된다는 말의 비율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치열하게 살라는 말이 훨씬 많을 거예요. 최근엔 사회적 트렌드랄지 구조적 한계랄지의 이유로 인해 현재의 행복에 초점을 맞추고 느슨하게 살아도 된다는 얘기가 간간이 나오고는 있지만 여전히 열심히 사는 일이 더 높은 가치로 인정받는 분위기인 것 같아요. 그런데 ‘열심히’와 ‘설렁설렁’이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에서 항상 대립되는 개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대개는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열심히 할 것과 설렁설렁할 것을 적절하게 선택해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어요.

 

아무리 인생을 대충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도 본인이 좋아하거나 관심이 있는 일에는 적극적이고 치열하기 마련이에요. 아는 이 중에 직장을 비롯한 사회생활엔 아무 욕심도 없이 무심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요. 누가 보더라도 거참 대충 사네,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거예요. 하지만 그건 낚시를 하는 그 사람의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에요. 그 사람은 절대 낚시를 대충하지 않아요. 물때가 맞다면 밤이고 새벽이고 가릴 것 없이 낚시터로 출동해서 철야를 감행하는 일은 예사이고, 늘 새로운 장비를 탐색하며 낚시의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전 낚시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어요. 직장생활은 대강, 낚시는 치열하게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열심히 사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설렁설렁 사는 사람일까요? 그전에, 치열한 삶이란 대체 뭘까요?

 

열심히 사는 게 무조건 좋은 것일까? 하는 질문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사실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아요. 왜냐면 치열함이 경쟁을 전제로 한 개념으로 와닿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사는 시대가 공동체의 지속을 위한 협동,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 종교적/윤리적 금욕 같은 가치들에 비해 경쟁적 요소가 더 도드라진 세계라서 그럴 거예요. 물론 경쟁 자체를 두고 善惡의 판단을 내릴 순 없다고 생각해요. 생명체의 존재 방식에서 경쟁을 제거하는 건 불가능할지도 몰라요. 외부에서 에너지를 제공받아야만 생존이 가능한 이상, 성장에 필요한 에너지 혹은 생명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한 개체 간의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일 거예요. 심지어 식물의 세계에선 무한히 제공되는 햇빛을 두고도 서로 경쟁하곤 하니까요. 자연 상태의 경쟁은 제거할 수 없을뿐더러 냉혹한 규칙이에요. 경쟁에서 밀릴 경우 생존 환경이 열악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종종 죽음에까지 이르곤 하죠.

 

“언니오빠들처럼 열심히 자야 되는데 안 졸리네..”

 

그 냉혹함이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에 적용되어도 괜찮은가, 라는 물음에 맞닥뜨렸을 때 ‘그렇다’고 대답하는 이가 많지는 않을 거예요. 인간의 역사는 경쟁을 통한 발전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경쟁에서 도태된 이들이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 애써 온 역사이기도 해요. 수천 년, 어쩌면 수만 년 전부터 그랬을 거예요.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해주는 가치들이 그 증거예요. 사랑, 우정, 연민, 존경, 배려, 양보 같은 것들요. 하지만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현대 사회에선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을 善으로 치켜세우는 일이 잦은 것 같아요. 경쟁이라는 시스템을 사회적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곤 하죠. 당신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쟁에서 도태된 것이다, 라는 잔인한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오가곤 해요. 우린 어쩌면 슬픈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과 분리되지 못하고, 절반쯤은 함께 살아가는 동물의 세계 역시 슬픈 세계일 수밖에 없어요. 인간의 세상과 분리되어 살아가는 생명 역시 슬픔을 피해가기는 힘들고요.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세계가 확장될 때 그곳을 선점해 살고 있던 식물과 동물은 비극을 직면하게 되죠. 공존의 가능성을 고려했다면 덜 다치고 덜 죽었을 생명들이 변화된 공간에서 배제된 채 힘없이 쫓겨나거나 사라지고 말아요. 인간이 자연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걸 자축하는 동안에 말이에요. 그래도 우리가 그 슬픔을 직접 느끼는 경우는 잘 없어요. 아주 멀리 떨어져 있거나 이미 소멸해버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렇다고 슬픔까지 없는 일이 되지는 않지만요.

 

우리 가까이에 있는 생명의 슬픔은 훨씬 직접적이에요. 인간과의 경쟁에서 패하고 밀려 사라지는 모습이, 그 슬픔이 눈에 보이니까요. 저에겐 길냥이의 세계가 그래요. 길냥이들이 스스로 인간의 도시에서 살아야겠다는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들도 영문을 알 수 없었을 거예요. 어쩌다 여기에 던져졌는지, 어쩌다 이렇게 살아가게 됐는지요. 그렇기 때문에 길냥이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건이란 애초에 존재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불편함을 길냥이 탓으로 떠넘기고 있어요. 쓰레기봉투를 뜯어서 동네가 지저분해진다, 밤마다 울어서 시끄럽다, 심지어 재수가 없다, 는 이유를 들면서요. 이 경쟁은 시작부터 잘못되었어요. 한쪽이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신경질을 부리는 동안 다른 한쪽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경쟁이니까요.

 

언제나 위태로운 일상

 

모든 이가 길냥이의 세계와 관계 맺기를 바라는 건 아니에요. 무관심할 수도 있어요. 길냥이의 밥을 챙겨주고 비를 피할 자리를 마련해주고 아픈 아이에게 약을 주고 어미 잃은 아이에게 살아갈 공간을 마련해주는 일에 다 같이 나설 필요는 없어요. 그보다 훨씬 작은 힘만으로도 충분해요. 수고로움을 감당하겠다고 나서는 소수의 사람만 있어도 길냥이들의 삶은 충분히 안전하고 풍요롭게 바뀔 수 있어요. 다만, 모두가 길냥이의 존재를 인정하기만 한다면요. 길냥이의 세계를 부수려는 사람이 없다면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사람이건 동물이건 간에 최소한의 생존 조건을 지키기 위해 발악에 가까운 몸부림으로 버텨야 하는 곳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것을 경쟁이나 치열함이라 부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단지, 함께 살아가자는 것뿐이잖아요.

 

봉산아랫집에 4년 넘게 살며 五묘가 되는 동안 집 밖에서도 여러 일이 있었어요. 아무래도 길냥이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보니 슬픈 일이 먼저 떠오르네요. 싸늘하게 굳은 채로 길에서 생을 마감한 고양이를 세 번 보았어요. 두 번은 아깽이였고 한 번은 성묘였어요. 한눈에 보아도 살날이 얼마 남아 보이지 않을 만큼 초췌한 모습으로 비틀거리는 녀석을 매일 오가는 길에 만나야 하기도 했어요. 눈여겨보던 아이가 일 년에 두세 번씩 임신을 하고, 처음엔 넷이던 새끼가 셋으로 둘로 하나로 줄어 가는 걸 보야야 했고, 어떨 땐 출산을 했음이 분명한데도 새끼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혼자 돌아다니는 걸 보기도 했어요. 갓 어미로부터 독립한 듯한 아이의 건강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여서 어떻게든 병원에 데려가려고 잠자리채를 집에 사놓은 적도 있어요. 아이가 트럭 아래에 있는 걸 발견하고 잠자리채를 가지고 나왔더니 이미 사라져버렸고 그 뒤로는 다시 보지 못했던 적도 있어요, 그런데 하필 아이의 마지막 모습이 힘들게 구토를 하던 모습이었어요. 어떤 슬픔을 만날지 몰라 집으로 가는 길이, 골목을 두리번거리는 일이 두렵게 느껴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런가 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기쁜 일도 많았어요. 초췌한 모습으로 비틀거리던 녀석의 정체를 알고 봤더니 동네의 터줏대감이었어요. 골목 어귀에 있는 시장의 아주머니가 말하길, 본인이 15년째 가게 앞에다 길냥이 밥을 챙겨주고 있는데 그 녀석은 처음 밥을 주기 시작했을 때부터 찾아왔던 아이라고 했어요. 얘길 들은 다음부터는 길에서 만날 때마다 ‘대장’이라고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나누게 되었어요. 반찬가게에서 멀지 않은 자리에 있는 문방구에는 세 마리의 고양이가 건강하게 살고 있어요. 셋 중 두 아이는 가끔 밖에 나와서 일광욕을 즐기곤 하는데 지나다 볼 때면 항상 기분이 좋아지는 풍경이에요. 매년 임신을 하던 아이의 새끼 중 몇몇은 무사히 성묘로 자라는 걸 볼 수 있었어요. 다른 동네로 떠난 아이들도 있고 여전히 이 동네에 남아 얼굴을 비치는 아이들도 있어요. 오즈가 봉산 아랫동네에서 구조한 첫 번째 아깽이라서, 길을 가다 만나는 녀석들의 얼굴과 무늬와 몸짓을 유심히 살피며 쟤는 오즈 형제 같은데? 니가 오즈 엄마니? 혹시 오즈 아빠 아냐? 하며 탐정 놀이를 하는 것도 즐거운 일 중 하나예요. 무엇보다 기쁘고 감사한 일은, 길에서 꺼져가는 생명을 오즈 다음에도 두 번이나 더 구했다는 거예요. 한 아이는 귀한 인연을 만나 입양을 갔고 한 아이는 조만간 입양을 갈 예정이에요.(이 글을 쓰는 지금도 열심히 임보 중이에요…)

 

봉산아랫집 猫니버스

 

봉산아랫집의 猫니버스는 오즈가 식구가 되는 데서 확장을 멈춘 채 2년 가까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어요. 오즈가 ‘엔드게임’의 역할을 제대로 한 셈이에요. 하지만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한순간도 가만있지 않았어요. 제가 삼삼이와 처음 관계를 맺었던 그때부터 매일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고 우연한 만남이 발생하고 기쁨과 슬픔과 안도와 좌절의 순간이 쌓여가고 있어요. 집 안의 고양이 수가 늘어날수록 집 밖에 있는 고양이의 삶이 더 가깝게 다가왔어요. 랜선을 타고 흘러드는 소식을 보며 함께 축하하거나 안타까워하는 일도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연재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6개월 동안 봉산아랫집의 五묘(와 히루)의 소개를 겨우 마쳤네요. 원고지 500매 이상의 분량, 흔히 말하듯 책 한 권은 될 만큼의 이야기를 했지만 고작 소개가 끝났을 뿐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충격적이긴 해요. 아직 해야 할 얘기가 많이 남았어요. 삼삼, 모카, 치코, 미노, 오즈와 살아가며 겪는 리얼 버라이어티 쇼는 물론이고 길에서 만나는 고양이, 남의 집 고양이, 책이나 영화나 그림에 나오는 고양이.. 온갖 이야기들이 밀려 있어요. 기대하셔도 좋을 만큼요. 세상에 고양이가 존재하는 한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멈추지 않을 거예요. <어벤져스 : 엔드게임> 나왔다고 MCU가 끝나던가요?(얼른 나와라! <블랙 위도우>)

 

_

<이치코의 코스묘스> 시즌 1, 코스묘스의 오묘한 시작. 마침.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구독하기

 

[이치코의 코스묘스]

시즌 1, 코스묘스의 오묘한 시작

Episode 1. 한낮의 작고 짙은 온기를 닮은 고양이, 오히루

① 반짝이는 삶   |   ② 막연한 기다림   |   ③ 기쁨의 크기

Episode 2. 잃어버린 시간에 관하여, 김삼삼

④ 각자의 자리   |   ⑤ 굴러온 돌   |   ⑥ 잃어버린 시간

Episode 3. 미래에서 온 카오스, 강모카

⑦ 빈 책상   |   ⑧ 혼돈의 카오스   |   ⑨ 오래된 미래

Episode 4. 이치코,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⑩ 화려한 시절   |   ⑪ 보내는 마음   |   ⑫ 이치코의 코스묘스   

Episode 5. 어느 날  갑자기 – 불쑥, 고미노

⑬ 뜻밖의 여정   |   ⑭ 회색의 미궁   |  ⑮ 약자의 마음 (1)   

Episode 6. D의 의지를 잇는 자, 송오즈

⑯ 소리치는 일   |   ⑰ 총체적 난국   |   ⑱ 엔드게임 and..

시즌 2,

길어질 게 뻔한 변명(1)   |   길어질 게 뻔한 변명(2)   |   길어질게 뻔한 변명(3) 

원래 그런 게 어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