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코의 코스묘스> 연재를 시작할 때 나름의 빅픽처가 있었어요. 먼저 봉산아랫집 식구들을 소개하고(시즌 1) 그다음엔 동네 길냥이들, 여행지에서 만난 아이들, 지인들의 고양이 등을 소개하면서 고양이와 인간과 자연과 사회에 관한 성찰(?)을 시도하다가(시즌 2) 어느 정도 됐다 싶으면 형식을 완전히 바꿔서(이를테면 고양이가 화자가 된다든가, 그림일기로 간다든가…) 일상의 작고 짙은 온기(!)를 전하는 콘텐츠(시즌 3)로 나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시즌 2의 시동을 한참 걸던 와중에 갑자기 ‘소소한 산-책’의 연재를 맡게 되면서 아쉽게도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휴면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어요. 7개월을 쉬었네요. 그러다 [월간소묘: 레터]의 형식에 변화가 생기면서 다시 연재를 하게 되었어요. <이치코의 코스묘스>와 <소소한 산-책>을 격월로 싣는 방식으로 말이에요. 물론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거예요. 그 둘이 뭐가 다른데? 고양이 얘기, 책 얘기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거기서 거기 같던데? 놉! 아니에요. (자세히 보면) 달라요. 고양이 얘길 할 땐 말이에요, 어떤가 하면요, <이치코의 코스묘스> 시즌 3 시작합니다!

 

해가 바뀐 지도 벌써 여러 날이 지났네요.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저는 만화책을 정주행하면서 한 해를 시작하고 있어요. 잡지에 연재되는 만화를 단행본 단위로 읽다 보면 매번 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전에 읽었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몇 권까지 샀는지 헷갈린다는 것. 작년 가을에, 평소 챙겨 읽는 만화 단행본의 신간을 산 적이 있었는데요. 새 책의 래핑을 뜯어서 읽으려다가 앞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예전 걸 복습하려고 책장을 뒤지다가 깜짝 놀랐어요. 지금 26권을 샀으니 책장 어딘가에 25권이 있어야 하는데 보이질 않는 거예요. 심지어 24권까지. 23권 다음에 26권, 이게 무슨 일이지? 책장을 정리하면서 다른 데 섞여 들어갔나 싶어서 온 집을 다 뒤졌지만 24권과 25권은 찾을 수 없었어요. 이미 있는 책을 또 산 적은 있어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어요. 만화책 두 권의 발매(시간으로 따지면 무려 6개월)를 건너뛰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동네 만화방을 찾아갔어요. 들어가자마자 허겁지겁 24권을 찾아서 후루룩 넘겨봤어요. 그랬더니 세상에, 처음 보는 내용이었어요. 25권은 말할 것도 없고요. 아, 어쩌다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만화책 신간이 나오는 것도 모르고, 그것도 두 번씩이나 모르고 살았을까, 한탄이 나왔어요. 하지만 이미 놓친 걸 어쩌겠어요. 그러고 있다가 새해도 밝았고 이참에 새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1권부터 다시 보기 시작했어요. 24권과 25권은 진작 주문해서 책장에 꽂혀 있었고요. 만화책의 제목은 <골든 카무이>예요.

 

<골든 카무이>

 

“모험, 역사 낭만, 문화, 수렵 별미!

LOVE & GAG! 전부 때려 넣어 팔팔 끓인

일본풍 묻지 마 짬뽕 웨스턴.

드디어 똑 떨어지는 제10권!!!!!!!!”

<골든 카무이> 단행본 10권의 뒤표지에 있는 문구 중 일부인데요. 출판사 담당자의 고뇌가 느껴지는 카피라고 할 수 있어요. <골든 카무이>는 한 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장르이고 남들에게 선뜻 추천하기로 어려운 내용이지만, 일단 빠져들면 헤어나올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작품이에요. 일본 코믹스가 으레 그렇듯이 스토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아요. 러일전쟁(1904년~1905년) 직후 어딘가에 숨겨진 막대한 양의 금을 쫓는 이들의 모험, 음모, 배신, 우정, 사랑 등을 그려내고 있는데 문제는… 금을 찾기 위한 열쇠인 지도가 24명인가 되는 사람의 몸에 나뉘어서 문신으로 새겨져 있기에 그걸 하나로 모으려면 치열한 상황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 굳이 껍질(?)을 벗기는 과격한 방법을 쓰지 않더라도 문신을 베껴 그리면 될 것 같지만, 몸에 보물 지도가 새겨진 이들이 하나같이 기구한 인물들(문신이 새겨진 장소가 어느 교도소)이라 이야기가 순순히 흘러가지 않고 총과 칼이 난무하게 되고 신체가 뎅겅뎅겅 떨어져 나가고 그러다가 결국 껍질이 벗겨지고, 뭐 그런 스토리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이 작품의 진짜 매력은 스토리가 아니라 따로 있어요. 2016년 일본만화대상까지 받은 작품이니까 궁금하시다면 검색 오네가이시마스!)

 

곱게 접은 문신인피

 

<골든 카무이>를 보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인간이란 참 뭐든 할 수 있는 존재구나, 그게 좋은 방향의 의외성이든 나쁜 쪽으로의 일탈이든 극단의 폭이 정말 크다고 느꼈어요. 그러면서 오랜 세월 붙잡고 있던 질문 하나가 떠올랐어요. 과연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신뢰하며 사랑하는 게 가능한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개별적 사람이 아니라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집합체, 보통은 대중이라든가 민중이라든가 하는 이름으로 불리는 인간 군상을 사랑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에요. 한때는 당연히 가능할뿐더러 일종의 의무에 가깝다고 여기던 때도 있었어요. 젊었고 에너지가 넘쳤고 낙관적이었던, 지금은 부끄러움으로 더 많이 기억되는 짧은 시절이었지만요.

 

그 뒤의 긴 시간은 민중을 사랑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일이란 걸 매일 깨닫는 날들이었어요. 사람들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일이 가능하기 위해선 종교적 신념 혹은 문명의(역사의) 발전에 대한 믿음이 꼭 필요해 보였어요. 그런데 저는 둘 다 아니었어요. 종교도 없고 (인류의) 진보도 믿지 않는 쪽에 가까웠어요. 사랑할 가치가 없는 흉악한 자들(타인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는 놈들 – 살인자, 강도, 사기꾼 등등)이나 과연 저들도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 보이는 파렴치한 이들(자신의 이익/편의를 위해 타인의 불행을 조장하는 사람들 – 아파트 경비원이 출근길 주민들에게 90도로 인사를 하게 시키는 자들 등등)을 대중의 카테고리에서 빼더라도 마찬가지였어요. 그저 평범한 이들에게서조차 사랑의 동기보다 미움의 근거가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어요. 좀처럼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없었어요. 그러니까 전철 문이 열리고 안에 있는 사람이 내리기도 전에 밀치고 들어오는 이들, 공공장소에서 주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큰소리로 통화를 하는 사람들, 좁은 골목길에서 보행자가 비켜주지 않는다고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리는 자들을 사랑하기엔 제 마음이 너무 좁고 메말랐어요. 점점 냉소적으로 변해갔어요.

 

Photo by ERIC ZHU on Unsplash

 

지금은 냉소적 태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금씩 노력하고 있어요. 희망과 낙관만으로 세상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킬 수 없듯이 냉소 역시 나쁜 쪽으로 무너져가는 세계를 멈출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하지만 여전히 냉소의 잔재들이 몸에 깊게 배 있어요.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건, 인간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고 그 무슨 짓의 대상이 인간이라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라는 생각이에요. <골든 카무이>에는 인간의 엽기적 행태가 자주 등장하곤 해요. 사람(시체)의 피부를 꿰매 옷(?)을 만드는 취미를 가진 박제기술자, 호텔 투숙객을 대상으로 고문과 인체 실험을 자행하고 인육을 먹는 것까지 서슴지 않는 전직 의사, 치밀하게 계획된 그루밍으로 부하들을 속여 자신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하게 만드는 군인 등, 사실 어떻게 보면 등장인물 거의 전부가 윤리적 기준에서 많이 빗겨나 있다고도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아니, 인간이 어떻게 이런 짓을…!’이란 생각을 딱히 하지는 않았어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지만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은 아닌, 충분히 있을 수도 있는 일 정도로 여긴다고나 할까요.

 

만화책이나 영화를 볼 때만 그런 건 아니에요.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온갖 추악하고 잔혹한 일들, 신문 기사에서 그런 사건을 접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저런 짓을…!’이란 생각보단 ‘그래, 인간들이 원래 그렇지.’라는 생각이 바닥에 깔려 있는 쪽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슬프고 화나고 분노하고 절망하는 인간적 감정이 일지 않는 건 아니지만요. 그런데 그 냉소적 태도에도 예외는 있어요. 인간이 벌이는 무슨 짓의 대상이 동물이 될 때, 그땐 감정의 폭발과 함께 이성의 가장 깊은 곳에서 현실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와요. ‘강아지에게 저런 몹쓸 짓을…!’, ‘고양이한테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라고요. 간혹 동물 학대에 관한 기사를 보고 나면 며칠씩 그 장면이 불쑥불쑥 떠올라 괴로운 날을 보내야만 해요. 얼마 전 꽁꽁 언 강 위에 돌덩이에 묶인 채 버려졌다 구조된 강아지의 기사를 보았을 때도 그랬어요. 아침에 세수를 하다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그냥 길을 걷다가… 아무 때고 눈앞에 생생하게 나타나는 그 아이의 눈빛에 털썩 주저앉으려는 몸을 추슬러야 했어요. 기사를 본 지 엿새 정도 지난 것 같은데 여전히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이 나고 온몸의 생기가 모두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어요. 동물을 괴롭히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에요. 열 번을 죽었다 깨어난다 해도 인정할 수 없어요. 진짜, 그러지 마라. 인간들아, 제발 쫌.

 

시월이, 기억하실까요?

 

시월이는, 기억하실까요? 재작년 10월에 봉산아랫마을에서 구조한 아이예요. [월간소묘: 레터] 2020년 12월의 편지에 입양을 홍보하는 글을 올렸고(길어질 게 뻔한 변명-3) 다음 달에 무사히 입양을 갔어요. 봉산아랫집은 다시 평화로운 오묘의 세계로 복귀했고요. 그런 줄 알았어요. 아니 석 달 동안은 그랬어요. 2021년 4월 24일, 딱 100일 만에 시월이가 다시 봉산아랫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휴… 봉산아랫집은 오묘에서 육묘가 되었고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가족 소개만으로도 끝이 안 나게 생겼고… 이게 무슨 일인가요.

 

농림축산식품부가 실시한 ‘2021년 동물보호에 대한 국민의식조사’ 자료*가 며칠 전 공개됐는데요. 이 자료에 끔찍한 현실이 들어 있더라고요. 반려동물의 양육 포기나 파양을 고려한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양육자의 26.1%가 ‘있다’는 응답을 했다고 해요. 1/4이라니, 넷 중 하나가 그런 정신 상태라니, 다들 미쳤나 봐요. 과격한 표현 아니냐고요? 아니요. 파양의 이유를 보시면요. 물건 훼손·짖음 등 동물의 행동 문제가 27.8%, 예상보다 지출이 많음이 22.2%, 동물이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함이 18.9%, 이사·취업 등 생활 여건의 변화가 17.8%로 나왔다고 해요. 말이 안 되잖아요. 아이가 울고 물건을 훼손한다고, 분윳값·기저귓값이 많이 든다고, 아프거나 다쳤다고, 이사를 가거나 취업을 했다고 해서 양육을 포기하거나 아이를 내다 버리는 짓을 하지는 않잖아요. 사람 아이라면 말이에요. 물론 그런 몹쓸 짓을 서슴지 않는 나쁜 인간들이 있기는 하죠. 하지만 그 비율이 전체 양육자의 26.1%나 되지는 않아요. 왜 동물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걸까요. 동물은 장식품도 장난감도 아니에요. 함께 살기로 마음먹은 이상 동물도 사람과 똑같은 가족이에요. 아니, 어쩌면 사람보다 더 소중한 가족이에요.

 

시월이는 파양되어 봉산아랫집으로 돌아왔어요. 시월이 처지가 마음이 아파 다른 말로 표현해보려고도 했지만 그건 분명 파양이었어요. 17.8%의 이유 때문이었어요.

 

불렀으?

 

시월이가 오고 봉산아랫집은 북적북적해졌어요. 원래 북적북적했지만 더 북적북적해졌어요. 북적북적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게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것이므로 오묘와 육묘의 북적북적은 캐나다의 인구밀도와 싱가포르의 인구밀도만큼이나 크게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어요. 얼마나 북적북적한지 북적북적하단 걸 잊고 살 정도예요. 1, 2, 3, 4, 5, 6, 아, 북적북적.
구조 당시 350g에 불과했던 시월이는 몰라볼 만큼 우람한 덩치가 되어 있었어요. 그리고 덩치만큼 놀라운 비밀이 하나 더 있었고 그로 인해 봉산아랫집의 일상이 요동치기 시작하는데…

 

To be continued…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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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코의 코스묘스]

시즌 1, 코스묘스의 오묘한 시작

Episode 1. 한낮의 작고 짙은 온기를 닮은 고양이, 오히루

① 반짝이는 삶   |   ② 막연한 기다림   |   ③ 기쁨의 크기

Episode 2. 잃어버린 시간에 관하여, 김삼삼

④ 각자의 자리   |   ⑤ 굴러온 돌   |   ⑥ 잃어버린 시간

Episode 3. 미래에서 온 카오스, 강모카

⑦ 빈 책상   |   ⑧ 혼돈의 카오스   |   ⑨ 오래된 미래

Episode 4. 이치코,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⑩ 화려한 시절   |   ⑪ 보내는 마음   |   ⑫ 이치코의 코스묘스   

Episode 5. 어느 날  갑자기 – 불쑥, 고미노

⑬ 뜻밖의 여정   |   ⑭ 회색의 미궁   |  ⑮ 약자의 마음 (1)   

Episode 6. D의 의지를 잇는 자, 송오즈

⑯ 소리치는 일   |   ⑰ 총체적 난국   |   ⑱ 엔드게임 and..

시즌 2,

길어질 게 뻔한 변명(1)   |   길어질 게 뻔한 변명(2)   |   길어질게 뻔한 변명(3) 

원래 그런 게 어딨나요? 

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1)   |   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2) 

고양이의 버킷리스트 

떨림이 멈추지 않는 세계에서(1)   |   떨림이 멈추지 않는 세계에서(2) 

시즌 1, Again

• Episode 7. 고양이, 장소, 환대, 시월이

⑲ 1, 2, 3, 4, 5, 6, 북적북적   |   ⑳ 혁명의 선봉   |   ㉑ 앙시앵 레짐    |   ㉒ 우정과 환대      

시즌 2, Again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